우리시대의 소설가 (1991이상문학상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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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소설도 환불이 되나요?

 

우리는 사이즈가 맞지 않거나 박음질이 잘못된 옷을 자연스럽게 환불한다. 요구하는 사람도, 판매했던 사람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은 어떨까. 소설을 읽고 내용이 부실하다면 작가에게 환불을 요구할 수 있을까? 1991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조성기의 <우리 시대의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이다. 

강만우 씨는 소설가다. 상업화가 진행 중인 동네에 살고 있다. 그는 공장과 레스토랑이 들어서는 걸 보며 소설가가 살 만한 동네가 아니라고 푸념한다. 주변 집들이 상가로 변하고 있지만 자신의 집만큼은 옛날 모습을 유지하려 한다. 소설가라면 상업적인 행위,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문의 광고면을 들어내버린 뒤 ‘신문다운 신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강만우에게 독자 민준규가 전화를 걸어 책의 환불을 요구한다. 강만우는 거절하고 전화를 끊지만 민준규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와 끈질기게 책 값 3천500원을 돌려달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강만우의 모순적인 삶이 폭로된다. 

강만우는 인당 25만 원 그러니깐 150만 원이 들어오는 과외비에 문학 그룹 과외를 수락한다. ‘소설 창작을 지도하고 지도받고 하는 것보다 더 웃기는 일도 없죠’라는 자신의 말과도 정면으로 반대되는 행동이다. 또한 작가인 자신에게 환불을 요구하는 민준규에게 출판사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가니 환불은 출판사에 요구하라고 한다. 또한 환불을 해준다 하더라도 책이 팔렸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윤만큼만 환불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작가의 양심이나 책무를 중요시 여기는 듯 말하다가도 환불해달라는 말에는 이윤을 따져 대답한다. 이처럼 강만우는 상업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 한 이중적인 인물이다. 

강만우의 모순적인 모습은 작품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쓰고 있는 소설에서 세르베투스는 “‘영원한’ 하느님”이냐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다 화형을 당한다. 단어 하나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강만우는 자신이 산 책이 『염소의 노래』인지 『염소의 배꼽』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주인공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간택’이라는 단어를 쓴 김수옥 여사에게 단어의 뜻을 알고 쓰는지 의아해하던 모습과 달리 말이다. 자신의 책을 환불해달라는 독자를 설득하려 나간 자리에서 책 내용도 모르고 있다는 건 작가로서 최소한의 책임의식마저 결여된 상태임을 의미한다.

반면 독자 민준규는 책도 경제 구조 내에서 판매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환불 요구 또한 정당한 것이 된다. 그러나 독자들의 눈치를 보는 작가의 자세에는 비판을 가한다. 신문 연재도 안 할 수 없냐 묻는다. 신문 연재는 구독률과 독자의 반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민준규가 책을 꼼꼼히 읽고 비평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 식의 인상 비평이 아닌, 작가가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작품에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며 작품을 관통하는 세계관 또한 구축하지 못했기에 『염소의 노래』가 불량 작품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책이라는 상품 자체를 구매하고 환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책을 읽고 의견을 제시하며 논쟁을 펼치는 자세는 독자의 바람직한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번 등장하는 ‘신문’을 통해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강만우가 처음 젖은 신문을 집어 들어 광고면을 떼어버리는 장면이다. 소설의 작품성이나 내용이 아닌 광고와 마케팅에 의존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장면이다. 둘째, 남녀 상봉 지사를 넣어달라는 문화부장의 전화에 ‘아, 네’ 하고 대답하는 강만우와, 이야기를 지지부진 늘어놓는 신문 연재를 그만 두라 말하는 민준규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신문의 본문과 광고란 사이에 해당하는 배꼽 부분에 연재소설이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문학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고뇌를 표현한 것이다.

작품과 작가, 문체와 내용, 완성도와 소설의 주제가 완벽히 일치하는 건 힘든 일이다. <팔 없는 사람의 명상>처럼 명상과 행동 사이의 모순은 소설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상업성과 문학성을 함께 가져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 둘 사이의 균형을 잘 잡아가는 게 소설가의 역할이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평가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되 휩쓸리지 않을 정도의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독자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마르셀 푸르스트처럼 철저히 개인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독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문학이 상업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다리를 딛고 서있기 위해서는 작품의 완성도와 문학성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으면서도 창작 또한 노동이자 생계수단이라는 걸 존중하는 사회적 문화가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소피의 세계 1

  ‘소피의 세계 1‘은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자연철학,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먼저 자연철학에 들어가기에 앞서 고대에는 종교신화가 있었다. 이는 과학적 지식과 사실이 없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발전되지 않은 고대에는 의, , , 질병, 전쟁, 농사 등 모든 것에 대한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달기 힘들었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주었다.‘ 혹은 신이 화가 나서 가뭄이 들었다.‘ 등 그 당시 사람들은 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라는 궁금증을 보다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였고, 그렇게 탈레스는 만물이 이라 대답하게 된다. 이후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밀레토스학파와 엘레아학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성으로서 생각을 내뱉게 된다. 특히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40-480)와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의 생각을 주의 깊게 들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것은 변화하지 않으며 감각적 인식을 부정하고 이성(로고스)’을 중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 즉 변화한다고 하였으며 감각적 인식을 일부 긍정한다. 이것은 후에 플라톤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보충하도록 하겠다.

  두 번째로 소피스트가 있다. 소피스트들은 자연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인간과 인간사회에 중점을 두었다. 책속에서는 소피스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적진 않았는데, 내가 덧붙여 설명하자면 소피스트라는 뜻은 지혜로운 자라는 뜻이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은 부정적으로 괴변론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소피스트는 상대주의철학을 제시하였는데 그 이유는 관심을 인간인간세계에 두었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사회는 동일한 조건을 원천적으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동일한 결과가 나올 수 없었으며 따라서 인간을 탐구한 소피스트들은 상대론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아테네 사회가 바라볼 때 상대주의 철학을 내세우는 소피스트들은 위험분자로 보였고 따라서 괴변론자라는 오명을 얻는다.

  세 번째로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는 문답법과 대화법을 강조하였고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강조하며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다. 또 무지에 대한 인식에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실천을 강조하였다.

  네 번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다. 플라톤(기원전 427-347)을 보기에 앞서 질문을 한번 던지고 싶다. 한 사람이 똑같은 빵 50개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같은 빵틀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역시 불가능인 이야기다. 하지만 속으로 상상하는 생각하는 이라는 개념은 같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자신의 상상 속에서는 똑같은 빵 50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위의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 도입할 수 있는데,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감각세계(현실세계)에서는 만물은 시간이 흐르면 소멸하는 물질이다. 이것은 모든 것은 흐른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의견과 일치한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와 동시에 만물은 영원하고 변치 않는 초시간적 형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빵은 시간이 지나면 눅눅해지거나 곰팡이가 생겨 썩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의 형상은 고유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과 일치한다. 즉 만물은 변화하면서 한편으로는 영원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변하지 않는 고유한 것을 이데아라고 칭하였는데 이데아의 세계는 감각세계 뒤편에 있는 참된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육체는 비록 늙고 사라질 지라도 영혼은 영원한, 고유한 이데아를 쫒으라고 플라톤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비유를 동굴로 들기도 하였다.

플라톤에 대해 또 한 가지 유명한 철학이 있는데 바로 국가이다. 플라톤의 이상세계, 유토피아는 철학자들이 통치하는 나라였다. 또 육신이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졌듯이 플라톤은 통치자, 수호자, 상인계급이 국가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바르게 인식하고 역할을 수행하라고 하였다. 플라톤은 여성도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였고, 또 공공 유치원과 전일제 학교를 처음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플라톤은 스파르타의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고, 그러한 생각은 그의 철학관에도 스며들었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는 전체주의 성향을 띄기도 한다. 플라톤의 철학 의의를 살펴보면, 그의 이데아론은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국가론은 파시즘,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플라톤의 제자로, 이념에 충실했던 플라톤과 달리 자연현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여러 학술어를 남겼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보다 닭의 이데아가 먼저라는 플라톤의 견해에 동의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닭의 형상은 닭의 육체와 나눌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감각으로 인지하고 지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성, 이데아를 중시하였던 플라톤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데카르트,  흄, 칸트철학 등이 궁금해서 철학 서적을 찾아보다가 이 ‘소피의 세계’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어린아이인 ‘소피’의 시각으로 어려운 철학적 개념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책인 것 같다. 지금 읽은 소피의 세계1은 고전철학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중세와 근대를 풀어낸 2, 3도 매우 궁금해졌다. 

말투 하나로 의외로 잘 되기 시작했다

말투 하나로 의외로 잘 되기 시작했다. 진짜로.
책의 1장에는 말에 크게 휘둘리는 세 가지 유형이 나온다.
커뮤니케이션이 힘든, 인간관계에서 쉽게 긴장하는, 남과 다른 부분에 집착하는 대부분 나한테 해당하는 유형이다.
자기 전에 하루동안 있던 일, 했던 말을 곱씹으며, 화 나고 후회하고 한 없이 우울해지기 쉬우신지?
나는 뭘 해도 안된다고, 새로운 일이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시는지?
당장 오늘 있던 작은 일에 화나고, 내일 있을 일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소리내서 말해보기를 권장한다.
한 마디, 한 마디 따라 읽으면서 복잡하던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인간관계에서의 효과는 아직 잘 모르겠다.
책이 워낙 금방 읽혀서 40분동안 읽고 바로 쓰는 리뷰라서.
마음에 든 말을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생각 날 때마다 읽는다면 사는게 한결 편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잘 해왔고, 잘 하고 있고, 잘 하게 될거야!”

고도를 기다리며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과 많은 것을 공유하려고 대화를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가끔 답답한 사람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나도 종종 답답하다는 말을 듣고, 상대를 답답하다고 느끼는데, 한 번도 그에 대해 진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답답한 대화가 흘러가는 패턴을 조금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작품 해설에서도 쓰여있었지만, 이 연극에서 자신의 존재는 말로서 표현된다. 주요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한 자리에서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극적인 사건이 터지거나, 그런 상황이 형성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둘이서 장난을 치거나, 시시콜콜한 장난을 치는 정도로 작품은 전개가 된다. 그러다가 그들 앞에 포조와 럭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포조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지만, 포조는 그 질문에 답하기는 커녕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 당연히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해서 반복되는 질문을 하지만, 포조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내내 그들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던 포조는 자신의 할 말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주인공 둘에게 자신에게 더 궁금한 것이 있는 지 물어본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이들의 대화를 지켜본 소감은 아주 답답함. 그 자체였다.
 이 책 마지막에서 이들이 실재 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그들이 끊임없이 말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에 공감하기가 어렵다. 그들의 대화는 사실상 집단 독백에 가까웠다. 희곡을 포함한 모든 창작물의 대사, 장면, 소품 등은 모두 작가의 철저한 설계하에서 조직된다. 그렇기에 대사 하나하나가 유의미하고, 사건 하나하나에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내 믿음에서 봤을 때, 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그들의 대화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 말이 어떤 느낌인 것인지 한 번 경험해보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말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 말이 꼭 상대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 상대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이에 적절하게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점을, 작품 내 대화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독 짓는 늙은이 (황순원 단편선)

 [독 짓는 늙은이]라는 작품은 2017학년도 수학능력검정시험을 본 학생이라면 익숙한 작품일 것이다. 다소 낯선 “뚜앙뚜앙”이라는 의성어가 머리에 각인되어 한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으리라. 사실 나도 그 기억이 떠올라, 이번 기회에 본 작품을 음미하고자 이 책을 골랐다. 결론적으로 보면 음미하고자 이 책을 골랐지만, 여전히 이 책을 잘못 이해하고 읽은 것 같다. 나는 이 책의 결말이 ‘씁쓸하지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좀 더 찾아보니 ‘씁쓸한 배드엔딩’이 정확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 [ 독 짓는 늙은이 ]에서는 독을 짓는 장면이 많은 만큼, 독 짓는 과정에 대한 서술도 많다. 그 중 유난히 눈에 띄었던 것이 ‘독 말리기’와 ‘불질’이었다. 작품에 의하면, 독 말리기는 다 지어진 독을 말리는 단계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햇빛을 너무 많이 쬐면 안되고, 적당한 비와 적당한 바람이 있어야 갈라지지 않고 잘 말릴 수 있다. 나는 이런 상황이 독 짓는 늙은이인 송영감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독이라는 완성품을 만들기 위해서 적당한 비와 바람이 필요한 것처럼, 현재 안 좋은 상황에 처해진 송영감의 상황은 더 좋은 무언가를 완성하기 위한 단계라고 이해했다. 게다가 작품 중 “독 말리기에 아주 알맞은 날씨였다.”라는 말이 있어, 내가 한 해석에 확신을 가졌고, 송영감이 완성하고자 하는 독 한 가마를 채우고, 그의 아들과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로 끝나리라 예상했다.

  다음으로 눈에 띄던 ‘불질’은 가마 속에서 독을 구워내는 불을 관리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잘못하면 독이 깨지고, 잘되면 독이 여러 빛깔을 내다가 마지막에 맑은 햇빛과 같은 빛을 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송영감은 본인이 말하기 전까지 불을 계속 끄트리지 말라고 왱손이에게 명한다. 결국 독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리게 되었고, 독 한 가마를 채울 수 없게 된 송영감은 아들을 입양보내기로 결정한다. 결국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족이 전부 해체된 송영감을 보면서 ‘씁쓸하지만 해피엔딩’이라고 해석한 이유는 이 다음 장면에 있다. 아들을 입양 보낸 후, 가마 속으로 들어간 송영감은 가마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맑은 햇빛을 본다. 이 색은 독이 성공적으로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빛이기에, [독 짓는 늙은이]에게는 최고의 빛깔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결국 가족도 파탄나고, 송영감이 목표로 한 독 한 가마는 채우지 못했지만, 한 예술가로서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라는 결말이라고 해석했다. 마지막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의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의 완강한 장인 정신을 지키면서 동시에 그의 아들에게 나름의 살 방향을 제시한 결말이 비극적이기만 한 결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당시 황순원 작가의 생각을 배제한 채, 소설의 요소로만 해석한 결과이다. 당시 시대 상황이나, 황순원의 작품상을 토대로 보면 이 작품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구 시대적인 요소가 다음 세대에 전해주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져간다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이 작품의 결말은 결국, 어딘가 씁쓸한 행복한 결말이 아니라 완전히 비극적 결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소설 하나를 읽을 때도 작가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있어야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착해져라 내 마음

현실에 부딪히면서 내 자신을 잃어가는 느낌을 받아서 급하게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그 중 학술정보관 추천 도서에 있던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 그대로 나에 대해 돌아보면서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지에 대하여 적혀있었다.
평상시에는 나름 긍정적인 편이지만, 조금만 힘들면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알고 싶었다.
책 속 모든 내용이 나와 맞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나에게 적절한 방법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서툰 감정

친구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제목과 표지를 보자마자 나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중점으로 얘기를 해나가는 것이 취향에 맞지는 않았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들게 되었다.
실제 있었던 일들이여서 그런지 더욱 현실감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많은 경험을 토대로 써나간 책의 내용들은 정말 양질의 내용들이었다.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책이었다.

감정의 온도 (지금 당신의 감정은 몇 도인가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항상 부러움을 느꼈다.
내가 보기에 나 자신은 그렇게 따뜻하지 못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따뜻해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한 번에 변하기는 힘들어도 조금씩 바꿔나갈 것이다.
작은 거 하나하나 실천 중인데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다.
작은 습관도 바꾸려 하니까 영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울수록 사람을 더 채우는 말 그릇

나의 말그릇은 어느정도일까
라는 의문을 갖고 보기 시작한 책이었다.
보면 볼수록 나의 말그릇의 크기를 가늠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말그릇을 채우는 방법에 대하여 고찰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거리에 선 페미니즘 (여성 혐오를 멈추기 위한 8시간, 28800초의 기록)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마 페미니스트의 주장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러 여성들이 자신이 겼었던 여성 혐오적인 요소를 8시간 정도 발언한 것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여성인 나에게도 충격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신의 친오빠나 주변 지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그런 내용이 심심찮게 수록되어 있었다. 발언자 중에는 이런 경험을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겪었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20여년이라는 짧은 삶을 산 내게 모든 이야기가 낯설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집의 통금이 엄격하고, 남자들의 무례한 행동이 ‘남자라서’용인 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기에 이런 소소한 것들에서는 공감되는 내용이 꽤 있었다.
 이 책의 전제이자 주 내용은 ‘여성이기 때문에’ 강남역 사건의 피해자가 여성이었고, 고로 이는 여혐(여성을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는 중간에는 살짝 이에 설득되기도 했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이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우선, 이 범죄의 피해자가 여성인 이유는 성별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였기 때문이다. 즉, 그녀 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노인과 같은 다른 사회적 약자가 범죄자의 눈에 띄었다면 아마 살해 당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이 사건을 ‘여자를 혐오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드디어 드러났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페미니스트라면 여성을 사회적 약자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반발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은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사회적 약자가 맞다. 여성은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물리적인 힘이 약하다. (이 점을 빼면 딱히 사회적 약자라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노인과 어린이가 사회적 약자인 이유 중에서도 물리적인 힘의 차이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기에, 힘의 차이만으로 사회적 약자로 정의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늦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남성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건장한 남성을 제압할 힘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늦은 밤 골목길에서 느껴지는 공포, 집 안 문고리가 고장나 누군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모두 물리적인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하나는 남성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보호를 받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에 모두 따를 필요는 없고,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다.


 페미니스트의 시선에서 본다면 나의 주장은 너무나 수동적일 것이다. 또 남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뻔뻔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결국 나의 주장은, 여성은 사회적 약자임을 인정하고, 남성의 보호를 받되 자신만의 삶을 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백하게 여성과 남성이 구분되는 이 사회에서 차라리 나의 주장대로 사는 것이 마땅하고 안전하다 생각한다. 물리적인 차이가 분명하게 남에도 ‘남성과 동일한 대우’를 고집하며, 여성 경찰 비율을 억지로 높여 국가 치안에 위협을 줄 바에야, 차라리 차이를 인정하고 여성으로서의 다른 역할을 찾아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