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살인의 동기란 무엇일까?’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의 표지 하단에 적힌 물음이다. 그리고 이 물음의 답은 책의 제목인 ‘악의’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 그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어둠의 이면 말이다. 악의가 있기 때문에 살인을 행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된 악의가 무엇이길래,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감정 또는 심리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무서운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고, 그렇게 섬뜩하고도 소름 끼치는 악의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와닿게 표현한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아동문학 작가인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로 시작된다. 그는 그의 친구인 베스트셀러 작가 히다카 구니히코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 사건을 제3자의 시점에서 수기로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수사를 진행하는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그를 향한 의혹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노노구치가 범인임이 밝혀진다. 범인과 범행 동기의 마지막 퍼즐까지 맞춰지는 듯했으나, 가가 형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노노구치의 진정한 범행 동기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노노구치는 어쩔 수 없는 히다카의 고스트 라이트였으며 히다카의 아내와 얽힌 이야기 등 그의 범행 동기는 명백하게 가가 형사의 추리와 일치했지만, 알고 보니 그 범행 동기 또한 치밀한 조작이었다. 노노구치의 궁극적인 동기는 히다카에 대한 ‘악의’였던 것이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범인이 아닌 범행 ‘동기’를 추리해야 한다. 이야기 초반에 범인이 밝혀졌고 그가 사용한 트릭도 드러났지만, 범인이 ‘왜’ 살인을 했는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동기를 찾기까지의 과정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었고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선한 인물이 돌고 돌아 결국엔 악한 인물이었다는 인물들의 선악구도가 반전을 맞이했다는 점과, 모든 사건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핵심인 동기가 대단한 추리력을 가진 형사는 물론 범인 자기 자신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심리적인 부분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트릭은 노노구치의 수기 초반에 등장한 고양이 사건이다. 히다카가 농약으로 고양이를 죽게 만들었다는 다소 사건과는 동떨어진듯한 이야기는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히다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가가 형사 또한 그러했다는 장면이 나온다. 무의식중에 히다카의 잔혹함이 선입견으로 남은 것이다. 이렇듯 본인도 모르게 내재된 선입견과 더불어 우리의 삶에서 무심코 접했을 편견과 오류가 정말 무섭다고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히다카에 대한 편견은 실제로 언론에 휘둘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 한 개인이나 집단을 둘러싼 온갖 날조와 선동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눈에 선명한 이익을 위한 목적 때문이겠지만, 어떤 경우는 ‘악의’를 갖고 악의를 가진 대상을 향해 어떤 일도 감수한다. 그 일이 살인일지라도 말이다. 노노구치의 궁극적인 살인 동기는 히다카를 향한 ‘악의’였고, 특정한 사건 때문이 아닌 아무 이유도 없는 그 악의는 노노구치 본인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며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악의라는 감정은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에 그래서 더 숨길 수도 있었겠지만, 살인으로 이어질 만큼 숨길 수 없었던 미묘하고 무서운 감정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실제 우리의 인간관계에서도, 개인의 내면에도 누군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또는 오해, 열등감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이 존재한다. 나도 모르게 어떤 사람을 정의 내리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그러한 깊고 어두운 이면의 세계, 자기 자신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라는 심오한 생각이 든다.
달려라, 달리!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심쿵 라이프)
“달리는 병원에 버려진 아이였다. 전해 듣기론 신혼부부가 키우던 아이였는데 사고로 발 하나를 절단해야 한다고 하자 입양 포기 의사를 밝히고 두고 갔다고 한다. 당시 달리 나이가 두 살이었으니 1년은 함께 보냈을 텐데, 하루아침에 달리는 발도 잃고 가족도 잃었다. 몸이 아팠을지 마음이 더 아팠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당시 달리 심정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달리는 훨씬 더 오래 많이 아팠을 것이다.” 이는 책의 끝부분에서 달숙언니가 달리의 옛 사연을 들려주며 한 말이었다. 내 마음도 덩달아 먹먹해져 갔다.
정신적·신체적 아픔이 있었던 달리의 이야기를 지인 Y에게 들었을 때는 달숙언니도 입양이 꺼려졌다고 한다. 아마 그 전에 함께하던 반려견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도 있겠지만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이 거의 사람 아이 하나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아픔이 있는 달리와의 시작은 더욱 신중했을 것이다. 나도 애견인으로서 나의 인생 일부를 함께한 강아지를 떠나보내고 나면 두 번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 다짐한다. 단지 강아지가 아닌 가족을 떠나보냈을 때의 아픔이 너무도 커서 두 번 다시 그러한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진다. 그러나 나도 그랬고 달숙 언니도 그랬듯이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이 필요한 강아지를 외면할 수 없다. 그렇게 달숙 언니는 사고로 앞발을 하나 잃은 강아지 ‘달리’를 가족으로 들이게 된다.
달숙 언니는 먼저 보낸 강아지 ‘달구’에게 못 해줘서 후회됐던 부분들은 잊지 않고 ‘달리’에게 더 잘해주기로 다짐한다. 「달려라 달리」에는 달숙언니와 달리의 행복한 시간들이 기록되어있다. 수 많은 사진들과 듣기만 해도 미소지어지는 행복한 달리의 하루하루들이 달숙언니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받은 달리는 더없이 예쁘고 해맑게 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한없이 즐거운 달리네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가슴이 미어져 갔다. 아마 우리 집에도 혼자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는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강아지를 키우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랑해주려면 함께 있어 줄 시간도 필요했고, 맛있는 간식과 아프지 않게 돌봐줄 돈도 필요했다. 그래서 늘 우리 강아지에게 “미안, 나중에 누나가 여윳돈 생기면 맛있는 간식 매일 사줄게!”, “미안, 오늘은 시간이 마땅치 않아서 산책 못 갈 것 같아.”라며 핑계 대고 미뤘던 지난날들을 지금에서야 후회하고 있다.
이런 나를 꾸짖듯 달숙언니는 주인의 손길에 따라 한 생명체의 존엄이 결정되고, 그 영혼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고 있다고 말한다. 내 손길은 지금 우리 강아지의 존엄함을 지켜주고 있는지, 또 그 짧은 견생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달려라 달리」는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책인 것 같다. 그저 ‘귀여운 달리 사진이나 좀 구경해볼까?’하고 책을 펼친 것이 후회될 정도로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던 것이었다. 단순히 애완견에 대한 사랑을 담은 책이 아닌, 현재 유기견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를 보여주며 ‘개’라는 동물과 함께할 인간들에게 앞으로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그들을 바라봐야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나는 애견인으로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특히 개는 그저 짐승일 뿐 인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도시와 건축을 성찰하다)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책으로 전공서적을 둘러보던 중 발견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이 책 제목이 강하게 나를 이끌었다. 도시가 움직인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건축을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저자는 건축을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했을까?
목차들 제목만 봤을 때는 다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각 세부적인 내용들은 통합적으로 한 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바로 ‘본질’ 이다. 건축이 갖고 있어야하는 의미와 본래의 정의, 그리고 도시가 갖고 있어야하는 고유성과 전통성, 나아가 그들의 상호관계까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지하고 있었지만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가 그 안의 본질보다는 외관을 봐왔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계속 봐왔다는 것을. 비로소 이 책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건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건축은 움직이는 도시 안에 들어있다. 도시 속의 각 건축들은 예술적, 기능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거기서 살아가는 거주자와 그 공간의 본질에 맞추는 것이 먼저이며, 이 보이지 않는 건축을 감싸는 도시들은 마스터 플랜에 맞게 구성된 것이 아닌 그 주변 환경과, 지형, 현재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한마디로 개발과, 기능, 물질이 아닌 관계와 공존, 재생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건축과 도시는 서로 눈에 보이지 않게 아름다움을 지니며,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는 우리의 고유함이 살아가는 공간들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그 안에서 거주하고, 생활하는 건축에 대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단군 신화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삼국시대를 시작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까지 각 시대마다 항상 깊이 나라를 생각하는 위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나와 나의 조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조상들에게 감사한다.
중요한 사실 위주로만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를 이 책을 통해 부가적인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어 매우 유익했다. 책을 읽으며 평소 알고 있던 상식을 뒤집는 내용을 보면서 종종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삼국의 통일과 고려시대의 역사 그 사이에 알려지지 않았던 가야국이나 발해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세세하게 알고 싶은 욕구를 끌어내었다. 그러나 삼국을 통일한 신라와 통일신라를 이어가는 고려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한 장이므로 꼭 배워야 한다.
고려가 있었기에 한반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역사를 이어 조선왕조 500년이 이어지며 이 시간은 근대를 지나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연결된다. 이 긴 연결고리 중 중 가장 감명을 준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전주서고에 대한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임진왜란 때 소실될 뻔 하였으나, 당시 의인 선비들이 사비를 털어 조선왕조실록을 지켜 주어 오늘날 유네스코 문화유산까지 등재되고 조선의 역사를 상세히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연쇄가 참 놀랍고 감사하다.
다만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일제 강점기에 그 많은 애국지사들의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역사적 자료가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문화유산 대신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낸 역사가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후세에 남겨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상들의 지혜와 소중한 의지를 배우고 익혀 이후 세대에 남겨줄 수 있어 정말 자랑스럽다.
각 시대마다 의인들이 있지만, 그 의인들을 도와서 나라를 지켰던 이름 없는 역사 속 수많은 주인공들을 생각하며 나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하루 15분 정리의 힘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공간 시간 인맥 정리법)
몽위 (꿈에서 달아나다)
일본에는 잠꼬대에 답을 하면 깨어나지 못한다는 미신이 있다. 잠꼬대는 이 세상의 말이 아닌 피안의 언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미신은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에 대한 공포로부터 비롯된다. 몽유에 대한 두려움, 무의식에 잠식당하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는 가위눌림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나며, 우리 주변에 흔히 편재되어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온다 리쿠의 ‘몽위‘는 이런 인간의 잠재의식에 대한 공포를 판타지 소재를 사용하여 풀어낸다. 작품의 배경은 미래의 일본, 꿈을 영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몽찰‘이 보편화된 시대이다. 주인공은 이 몽찰을 읽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다. 주인공이 사랑했던 여성은 유이코라는 인물로, 예지몽을 꾸는 걸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큰 사고 후 홀연히 사라진 유이코는 몇 년 후 꿈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타인의 꿈과 자신의 꿈을 통해 유이코의 자취를 쫓아가는 것이 작품의 큰 흐름이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꿈에 대한 공포와 초월적인 능력을 읽으며, 꿈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한계인 의식보다 깊은 잠재의식을 인간은 늘 두려워하면서도 숭배, 혹은 동경해왔다. 그 예로, 이전에 뇌를 100%사용하는 방법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뇌를 100%쓰는 사람에게 일종의 초능력이 발현된다는 일종의 ‘썰‘이다. 틀린 이론이라고 증명되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믿고 있다고 한다. 전생 체험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에게 최면이라는 가수면 상태를 만들어두고 말을 걸어 전생이라고 생각되는 내용을 듣고 전생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전생체험’이나 ‘뇌 100%사용법’은 세기말이라고 칭해지는 90년대에 특히 크게 유행했다. 종말론의 대두와 함께,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극복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현상인 듯 보인다.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인간이 자각하지 못한 무의식 영역을 통제함으로써‘ 더 높은 영역의 자기 통제력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 해몽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무의식의 통제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것이다.
소설 내용 중에 꿈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걸까, 라는 질문이 있다. 먼저 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과학적으로 꿈은 체험이 무의식 속에서 재구성되는 현상이다. 얕은 수면, 즉 렘수면 상태에서 인간은 학습된 상징을 바탕으로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하여 꿈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의식적으로 통제하지 못할 뿐인, 일종의 오해나 상상인 셈이다. 이 무의식적 상상은 오랜 시간 창작자들에게 좋은 소재로 기능해왔다. 장자의 호접지몽도 이러한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황의 몽중작은 꿈속에 선경에 도달한 이황이 그곳에 가 살고 싶다는 내용이다. 사임당이나 황진이도 이런 꿈에 대한 시를 지었으며, 이 몽위라는 소설도 꿈이 소재가 된 소설이다. 비단 동양뿐만 아니더라도 서양에도 꿈에 관련한 다양한 설화나 창작물이 많이 존재한다. 크게 흥행한 놀란의 영화 인셉션 또한 꿈을 다루는 작품인데, 꿈 속에 녹아들거나 꿈을 받아들이는 동양의 많은 창작물과는 달리 꿈을 통해 현실을 바꾸는, 위에서 언급한 무의식의 통제와 초월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렇다면 꿈은 어디로 가는 걸까, 꿈은 자신의 과거에서 와서 미래에 반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지몽과 태몽, 인터넷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꿈 해석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꿈들은 과거의 경험이 재구성된 것이지만, 꿈의 해석을 통해 자기암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사람은 그 암시에 따라 행동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미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예로 꿈자리가 사납다는 말이 있다. 좋지 못한 내용의 꿈을 꾼 사람이 행동을 조심하여 나쁜 일을 피하거나, 그런 꿈을 꾼 후에 똑같이 생활하다가 불운을 겪는다면 그 꿈은 ‘예지몽’이 된다. 태몽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길한 꿈을 꾼 후 주변사람 혹은 본인이 임신을 하면 그것은 ‘태몽’이 된다. 이러한 꿈 해석은 한중일과 같은 동양에 아주 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소설인 몽위 또한 그런 심리의 반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꿈에서 달아난다는 제목을 보며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호접지몽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내용을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인물들은 결국 꿈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달아나다는 뜻의 위는 꿈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위가 아니라 꿈속을 통해 달아난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작품 속의 ‘꿈’은 실체가 있으며 현실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꿈을 통해 달아나던 인물들은 결국 꿈 안에 잡혀버리고 만다. 마치 우리 사이에 흔히 받아들여지는 ‘태몽’처럼 현실과 꿈, 즉 무의식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무의식을 통해 현실을 초월하는 인물을 그린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무의식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일까, 정말 볼 수 있다면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노스트라다무스, 바바반가, 탄허스님 등 유명한 예언가들은 무의식을 초월하여 미래를 예지한 것일까. 결론부터 적자면, 나는 예지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데자뷰라는 현상이 있다. 어디서 본 듯한 상황, 한번 겪었던 듯 한 이미지. 사람들은 이것을 “꿈에서 본 듯하다.”라고 표현한다. 나는 데자뷰란 실제로 그 상황을 겪은 적이 없음에도, 비슷했던 일을 무의식중에 재구성하여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지 또한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본 듯한 일을 간략하게 서술하면 그것이 해석을 통해 재구성되어 후세에 ‘예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몽위라는 작품을 읽으며 꿈에 대한 인식과 그 사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꿈의 초월적 능력, 그리고 현실과의 밀접한 관계를 일본소설 특유의 섬세함으로 풀어낸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소름이 돋거나 하는 일 없이 나는 이 내용이 완전한 판타지로 받아들여졌다. 꿈이란 심리테스트와 마찬가지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해석하기 나름이며, 끼워 맞추면 들어맞는다. 어떤 꿈을 꾸든지, 그 꿈을 통해 자기암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꿈이란 결국 과거의 기억조각을 모아 예쁘게 만든 스테인드 글라스이기 때문이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식탁에 정확히 어떤 고기가 오르는지, 또는 고기를 올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굳이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책은 육식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은 아니다. 자신의 입장을 독자들에게 관철하기 위한 글이 아니며, 독자들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단지 우리가 먹는 동물들에 관해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육식에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따른다. 이 책에는 그런 의견에 관한 글도 실려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떤 종은 다른 종을 잡아먹는다. 육식이 부자연스러운 형태의 식습관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행하는 공장식 축산이 비윤리적이며 잔인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부수 어획’이다. 이 책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지만, 해양과학용어사전의 설명에 따라 요약하자면 부수어획이란 어획 대상 목표종에 부수적으로 어획되는 어획물의 일부를 일컫는다. 우리는 소, 돼지, 닭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어지는지 논하면서도 물고기들의 사정은 잘 헤아리지 않는 듯 하다. 생선 한 마리가 우리 식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수십 종의 물고기들도 죽음을 맞는다. 이 책에 따르면 참치를 잡기 위해 물고기 145종이 아무 이유 없이 죽는다. “상에 차려지는 초밥 한 접시를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 접시에는 초밥 한 접시를 내기 위해 죽은 그 모든 동물도 담겨져 있다. 접시의 길이는 1.5미터까지 늘어나야 할지도 모른다.” 라는 구절을 통해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장식 축산과 유전자 변형 식품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그 이유는 역시 ‘돈’ 이다. 우리가 현재 가축을 다루는 방법들은 간편하며, 돈을 절약할 수 있다. 가축에 윤리 같은 것을 따진다면 ‘돈’은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수할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공장식 축산에 대해 하나하나 알게 되었다. 공장식 축산은 환경 오염, 온실 가스 배출, 감염균 확산 등 세상의 많은 것들에 영향을 준다. 전 세계 인간에게 쓰이는 항생제의 10배가 가축들에게 투여되며 이에 대한 내성은 꾸준히 늘어가고, 인간은 그것을 고스란히 먹고 있다. 동물들에 가해지는 비윤리적인 취급들은 너무 다양하고 그 방법들이 놀라울 정도로 획기적이고 잔인하며 충격적이다.
우리가 단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을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여러 가지다. 채식주의를 결심할 수도 있고,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지만 고기가 맛있기 때문에 육식을 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음식을 먹을지에 대한 결정은 바뀔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정말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먹은 수 없이 많은 동물들과 그것들이 내게 오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리며, 내가 여태까지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모르는 척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는 정말 재미없는 책이다. 서점에서 몇 문장을 봤을 때 정말 재미없었다. 그럼에도 왜인지 모르게 이 책을 사서 집으로 가져왔다. 평소의 수집욕과는 다른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심정으로 책을 다시 폈다. 하지만 서점에서처럼 여전히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인생은 고통과 권태의 시계추 사이를 오고 가는 것이라는 쇼펜하우어 행님의 말대로 기다림의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신음하며 시적이고 지루한 헛소리만을 지껄일 뿐이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한 이유는 이들의 대사는 전혀 소통의 기능을 하지 않아서 극의 진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단지 자신들의 권태를 해소하려고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대화는 독자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한 단편적인 단서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들조차 대체 고도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왜 기다리는 지도 모르고 심지어 고도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인간들은 하루 종일 고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심지어는 목매달아 죽을 생각을 하면서도, 죽었을 때 고도가 오면 어쩌냐는 대화를 나눈다. 블라디미르는 이에 ‘구원을 받겠지’라고 대답한다. 이 대화를 통해 고도는 신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들의 믿음 속에선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수동적으로 기다림을 반복한다. 고도는 대체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이 제일 먼저 고도를 신이라는 구원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신을 찾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고도는 누구이고 언제 오는가? 고도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인가? 나는 신을 찾지 말라고 한 베케트의 말대로 신을 죽여 버린 철학자 망치맨 니체에서 힌트를 얻어 보려고 했다.
니체는 망치를 들고 전통적의 도덕과 윤리관 종교관 등을 쓸어버렸다. 그에 따르면 도덕이란 강자의 힘에 대항하기 위한 나약한 자들의 카르텔이다. 그리고 신은 이러한 나약한 자들이 세운 우상일 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러한 신의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고 자신의 운명 자체를 사랑하며 의지를 실현한 ‘초인’이 되라고 말한다. 그와 연관 지어보니 베케트가 이 작품에서 신을 찾지 말라고 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고도는 ‘의지가 실현된 나’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내일도 내일모레도 고도를 앉은 자리 그대로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구원은 없다. 따라서 나는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 실현을 통해 스스로 구할 수밖에 없음을 베케트는 이 두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고도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그를 기다리느냐 스스로 찾아 나서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등장인물을 이토록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일종의 자기혐오가 아닌가 싶다. 나 또한 제도와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며, 신을 믿진 않아도 한순간의 구원 또는 대박을 바라고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나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기보다는 누운 자리에서 입 벌리고 홍시 떨어지길 바란 적이 더 많았다. 그래서 지금 나 또한 그들처럼 권태와 고통 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으니 그동안은 내 고도는 내가 찾아보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러면 최소한 권태로부터는 스스로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군주론 (개역본)
이 책을 읽을 때 문득 ‘나는 왕도 아닌 거지 대학생인데 군주용 자기개발서 읽어서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주론」은 말 그대로 훌륭한 군주라면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가를 써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다 보니 곧 군주가 아니어도 이 책에 나온 지식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자인 마키아벨리의 인간과 정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하는 작자의 조언들은 도덕과 윤리와 얽힌 낭만적인 것들이 아니라 냉철하고 때로는 잔인하고 그래서 현실적인 것들이었다. 작자는 오랜 정치인 생활을 하며 보고 느낀 ‘실전 압축형 지식’을 군주론에 옮겨 놓은 것이다.
나는 국정에 관련된 부분보다, 우선 나에게 더 실용적 이어 보이는 인간관계에 관련된 장들을 먼저 읽었다. 작자는 수많은 로마 왕들의 흥망성쇠에 대한 원인 분석 결과를 논거로 사용한다. 재밌게도 작자는 그 사례들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악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으며 온건하게 대해주면 만만하게 보는 존재라고 판단한다. 제일 공감이 가는 것은 사람들은 과정보다 결과만을 중시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정치에서 군주는 때로는 윤리와 도덕을 저버리고 짐승의 방법을 사용해야 될 때도 있다고 말한다. 필요에 따라 여우처럼 권모술수를 써야 할 때도, 사자처럼 폭력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물론 작자는 그 악을 행함으로써 더 큰 악을 잡을 수 있을 때 한정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덧붙인다.
꼭 인간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국정에 관련된 부분도 유용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보았다. 그 결과, 나는 이 책을 우화처럼 읽어보기로 했다.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가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그 속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듯, 나는 이탈리아 왕이 아니기에, 비유와 상징의 차원에서 작자의 뜻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일례로, 작자가 제시한 ‘자신의 무력과 역량에 의해서 얻게 된 신생 군주국’과 ‘타인과 무력과 호의로 얻게 된 신생 군주국’의 사례를 현실과 연결 지어본 것을 들 수 있다. 전자에선 내 능력으로 승진해서 얻게 된 팀장의 자리나 하다못해 동아리장이 되었을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것이 좋을지, 후자에선 그 반대의 경우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참고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군주론」의 방식 그대로 정치를 하거나 개인의 삶의 방식을 설정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군주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나타난 인간과 정치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잘 기억하고 응용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다 비슷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역사는 반복됨을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며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작가도 실천 못할 것 같은 자기개발서가 질린다면! 도덕과 윤리의 선비질로부터 일탈을 꿈꾼다면! 실전형 인사이트를 원한다면! 군주론 한 번쯤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