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또라이 검사’이야기
법과 재판에 관한 이야기여서 법에 문외한인 나에게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김웅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재치와 입담 덕에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은 대략적으로 두부분으로 나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웅 검사님께서 검사실에서 겪었던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신기하고 기괴한 사기꾼들의 이야기들과 작가의 생각이 나오는 부분과
책의 뒷부분에서는 회복적 사법의 필요성, 법률시장이 직면한 현실 등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점들을 다루고 그에 대한 김웅 작가님의 신념과 생각으로 이루어져있다.
“법을 공부하다 보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너무 많이 보여. 우리가 생각할 땐 분명 사기인데 합법적으로 이걸 빠져나갈 수 있는 거야”(p.11)
현재 대한민국은 사기꾼들도 너무 많고, 그만큼 억울하게 사기를 당하는 약자들도 많다. 김웅 작가님는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법의 모순적인 면을 일일이 언급했다.
작가님은 대한민국을 ‘사기 공화국’이라고 표현하며 ‘사기는 남는 장사’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대한민국에서는 한 해에 24만건의 사기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사기꾼이 구속될 확률은 재벌들이 실형을 사는 것만큼 희박하고 처벌도 굉장히 약하기 때문에 사기범의 재범률은 77%에 이른다. 책의 1장에서는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사기가 행해지고 얼마나 어려운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며 사는지 알 수 있다.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것은 큰 위기이다. 재산을 비롯한 물리적인 피해를 당할 뿐만 아니라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 위기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예방하고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김웅 검사는 말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여럿이 모이면 좀 더 나은 판단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집단 지성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18급 100명이 머리를 짜낸다고 이창호 국수를 이기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여럿이 모일수록 그 집단이 빠진 오류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오류에 빠진 사람이 오류에 빠진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p.78)
사기를 당하는 피해자들은 사기꾼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더 쉽게 판단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한 번 오류에 빠지면 어떤 증거와 사실을 보여줘도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사기꾼들의 접근이 없었다면 당연히 피해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 천지인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도 조심성과 신중, 절제가 필요한 상황이다. 나 또한 내가 속한 집단에서 어떤 오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 해야겠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때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가해자 편을 들어 조용히 끝내기를 강요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학생들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p.185)
김웅 작가님은 사기 범죄뿐만 아니라 학교 폭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작가님은 왜 피해자였던 학생들이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지 그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린다. 아이들이 폭력을 당하지만 말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파헤친다. 그 이유는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상황은 더 악화되고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해자는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고 피해자는 더 큰 보복과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피해자의 피해 회복과 가해자의 속죄가 사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작가님은 말하고 있다. 굳이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피해자인 학생들에게 화해를 강요해서도 안된다고 강조한다.
검사내전은 평소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던 책이었다. 또한 김웅 검사가 겪은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통해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보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책은 4차 산업혁명을 내세운 변화의 시기에 법과 제도의 본질을 생각해보고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현대인 모두의 과제라는 것을 알려주며 복잡한 세상을 지탱하는 규칙인 ‘법’에 대해 사유하는 행위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현대인에게 크고 작은 통찰을 줄 것이라고 말해준다. 비록 마지막장에서는 법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는 많지 않다고 나오지만, 이러한 법의 본질적인 문제를 알고 있음으로써 옳은 방향으로의 긍정적인 변화가 조금씩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범죄심리학, 법의학, 프로파일러. 모두 가려진 범죄 현장을 밝히는 현대 수사의 등불들이다. 나는 강력 범죄, 특히 살인을 범인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범인이 숨겨놓은 증거들을 종합해 미재로 남을 뻔 했던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 평소에도 이와 관련된 책을 주로 감상한다. 이 책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가 만든 정통 법의학과 과학수사의 교과서라 불리어도 무방하다. 책 속의 각양각색의 범죄들을 하나씩 짚어나가며 다양한 법의학적 증거들을 예로 들어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를 통해 과학적인 수사 방식으로 범죄 행각의 뒤를 쫓는 법의학자들의 노력을 추리소설처럼 박진감 넘치게 전하고 있다. 독극물학. 혈청학, 지문 감식, 사망자 얼굴 복원, 법의학적 탄도학, 범인에 대한 심리학적 추정, DNA감식 등 법의학의 여러 분야들을 총망라해 이론을 누구나 알기 쉽게 풀이한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 용어들도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다양한 상상을 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석산이 흐드러지게 피어진 꽃밭을 지나 고통의강을 지나면 모든것에 해탈한 피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도 있고, 동전 한푼을 뱃삯으로 받는 뱃사공을 따라 스틱스 강을 건너 갈 수도 있다. 그대의 심장은 깃털 하나보다 무겁기에 암무트에게 영원토록 먹히는 형벌을 받을수도 있을 것이며 , 윤회의 수레바퀴로 다시 한번 생을 이어갈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마다 각각 자신들만의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에 기인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아니 인류 뿐만이 아닌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본능적으로 두려워 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이 죽음이건만 아무리 세계가 발전한다 할지라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에 순응하고 체념하게 된다. 거스를 수 없는 공평한 죽음이란 짧게 불타오르는 불꽃놀이와 같아 화려하게 피고 지는 불꽃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일생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작가는 호스피스로서 자신이 직접 본 죽음에 대한 형태를 기록했다. 공평한 죽음이지만 그 누구든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모든 사람이 다르기에 그것은 다양한 사연으로 나타난다. 죽음이란 마법과도 같아 죽기 직전이라면 그 누구도 솔직해 진다.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다. 그러하나 모습을 작가는 25가지로 기록했다. 병에걸린뒤 하는 뒤늦은 후회라던가, 죽은 뒤의 유산, 자신이 잊고 살아왔던 꿈이라던가, 식욕과도 같은 원초적욕구, 사랑과 결혼, 그리고 자신을 기억해줄 아이라던지. 사람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후회를 남긴다. 죽음 이후가 무섭기에 그들은 후회한다. 후회하고 발버둥 치지만 죽음은 다가온다. 피할수 없기에 그들은 체념을 한다.
인류사에 있어서 종교의 필요 이유는 오로지 사후세계에 대한 긍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든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공포심을 가질수 밖에 없으며 종교는 사후세계라는 믿음을 통해 그 죽음에 대한 극복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운명의 곁에는 언제나 죽음이 같이 있으며 그것을 외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앞서 말한 종교적 믿음이거나 자신의 철학적 사유, 아니면 고된 일상을 통해 잊는 다거나. 물론 죽음이라는 것은 잊는 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삶을 살기에 죽기 전 후회를 남기겠지만 그 유한한 삶을 살기에 우리는 화려하게 타들어가는 불꽃같은 생애를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 죽기 전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후회만이 남는 삶을 살지 않았기를 빈다.
요즘 뜨거운 논쟁거리인 페미니즘. 여성주의라는 의미로서 여성의 권익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수 많은 사회기득권자들이 옹호하며 이를 피로한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억압받았다고. 여성이기에 불평등했으며 여성이었기에 차별받았다고. 이제 여성이 일어나 여성의 권익을 스스로 챙길 떄가 되었다고.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태어나서 부터 어쩔수 없이 짊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선택으로 짊어지는 것 일수도 있다. 성별이라는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짊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고를수도 없으며 그들을 서로 이해할 수 도 없다. 최근 혜화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몰카 규탄시위라고 한다. 이 시위의 발단이 된 계기가 조금 어이가 없더라. 몰카를 찍은 가해자는 여성이었고 피해자는 남성이었다. 그리고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가해여성을 일찍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시위에서 외친다. 남성과 여성이 사법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고. 옳은 말이다. 실제 여성과 남성은 형벌에 있어서 큰 차별을 받고 있다. 다만 그치들이 생각하는 대로 여성이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닌 남성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남자로서 살아오면서 항상 나는 남성이기 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육체적 고난이나 정서적 차별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군대가 정점이었다. 나는 남성이기에 군대를 갔다. 그리고 여성들이 소위 말하는 ‘집지키는 개’로서 2년을 복무 했으며 ‘살인기계’가 되어서 나왔다. 자긍심을 가져야 할 군 복무는 여성들의 눈에는 천박하고 야만스럽기 짝이없는 일이 되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부정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현남이라는 의미는 대한민국 페미니스트 들이 쓰는 ‘한남’이라는 단어에서 따왔으며 그 의미 또한 한남충, 한국 남자 벌레라는 의미로 쓰여지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 작품에서 자신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며 여러 여성의 차별을 받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우선 가부장제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고 싶다. 그녀들은 항상 말한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인격을 파탄내는 부조리한 일이며 우리 여성들은 피해자 라고. 그들은 그 당시 시대의 남자들을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사람이라 욕하며 한물간 시대의 퇴물이라 욕한다. 축하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지키기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싸워온 아버지를 병신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회생활 이라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현대화가 된 지금 시대에도 온갖 위험과 고생이 산적해 있는데 그 당시 시대에는 어떻겠는가. 가부장. 집안의 기둥이라는 의미이다. 한 가족의 경제권자로서 그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상사의 구둣바닥을 핥으면서 버텨왔다. 자기 자식의 미소를 보기 위해 땀을 흘렸으며 자신이 책임 져야할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버텨왔다. 남성이 버텨오는 동안 여성은 무엇을 하는가. 집안일이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기본이다. 흔히들 페미니스트 들은 말한다. 남성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억압하고 여성을 짐승처럼 다뤄 왔다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그들은 한순간에 포주가 노예를 지키기 위해 부리는 꼬장으로 바꾼다.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과연 알량한 페미니스트 들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싸워온 위대한 아버지들을 한남충으로 몰아 넣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 소설은 진행 되면서 남성은 폭력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이라고 세뇌를 시킨다. 여성 참정권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전쟁만이 남성들이 알아듣는 유일한 언어라고. 그 누구도 피와 살이 찢겨나가는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누구도 폭력에 의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이 전쟁터에 참전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딸자식을 위해서 그들은 원치않은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섰다. 페미니스트 들은 말한다. 인류 역사상 여성은 항상 억압받아 왔다고. 그러나 그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 흘려왔던 수많은 피는 보지 않는다. 애써 외면한다. 인류 역사상 항상 여성은 지켜지는 존재 였다. 비 바람에서든 가난에서든 어두운 밤의 으슥한 범죄에서든. 물론 현대에 와서는 그러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존재로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킬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지켜졌다는 것을 잊는 것 같다. 여성의 탄압만을 바라보지 말고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 흘려왔던 피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 중 ‘버닝’이라는 영화가 있다. 칸 영화제에서 벌칸상을 수상한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재해석해 만들었다. 영화를 흥미롭게 봤던 나는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원작인 ‘헛간을 태우다’보다 ‘반딧불이’라는 단편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이 책은 6가지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그리고 ‘영화의 원작은 당연히 장편이어야 돼’라는 내 생각을 정면에서 부순 책이기도 하다. 6개의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반딧불이’라는 소설이다. 사실 살아가다 보면 자신을 사회에 맞추고,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라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무기력하고 평범한, 무엇 하나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인물. 그러나 주인공의 친구가 자살하면서 그는 친구의 여자친구와 가까워지게 된다. 자신이 친구의 대용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녀에게 팔을 빌려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까지 그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특별한 생각이 없었다.
잃어봐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는 말이 있다. 남자친구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계속 안으로 쌓아왔던 그녀를 공감하지 못하고 위로하던 그는 결국 그녀가 그를 떠난 뒤에야 허망함을 느낀다. 대학생활 동안 전공과 진로 등에 대해 숱한 고민을 치르지 않았던 그가 사실은 그녀를 만나는 동안 외로움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소설의 끝부분에 그의 룸메이트가 그에게 인스턴트커피 병에 넣은 반딧불이를 건네준다. 기억 속의 반딧불이와 다르게 희미하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빛을 보며 그는 병뚜껑을 열었다. 반딧불이는 재빠르게 호를 그리며 아까보다 밝은 빛의 선을 어둠 속에 그려내었다. 날아가는 반딧불이를 보며 그는 손을 뻗어보았으나,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이 책은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양과 이별의 다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결국 병 속의 반딧불이는 붙잡을 수 없는 친구의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잡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마음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책인 것 같다.
일상 속 ‘새삼스러움’ 찾기
– 김기택 시인의 『껌』
시인 김기택의 『껌』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거들떠 보지 않는 것들을 관찰한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에서는 길고양이를, 「삼겹살」에서는 삼겹살을 먹고 온몸에 남겨진 삼겹살의 흔적을, 심지어 「절하다」에서는 좌판에서 팔리고 있는 전기 통닭구이까지 관찰한다. 시인은 익숙한 것들을 관찰함으로써 그 사물에 대한 생경함을 느끼게 한다. 너무나도 세세한 관찰이라 그 대상에 대해 어라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을 아주 세세하게 관찰하는 김기택 시인과 달리 나는 익숙한 것에 쉽게 질려버린다. 익숙함이 마냥 반갑지는 않은 것이다. 버릇처럼 가는 식당은 또 이 메뉴냐며 투덜대면서 들어가기 일쑤다. 오래 돼 어느 사이에 느려져버린 노트북도 달갑지 않다. 그렇다고 무조건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또 아니다. 매사가 조심스러운 나는 신입생 환영회, 아르바이트 첫날 같은 것들은 말만 들어도 고역이다. 스마트 폰 등 전자기기도 새로 적응하는 게 귀찮아 잘 바꾸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서툴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래서 김기택 시인이 익숙한 것들 속에서 찾아내는 ‘새삼스러움’ 은 익숙함과 새로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나에게 큰 메시지가 된다. 새삼스러움이란 우리의 일상에 익숙하게 있는 것들을 갑작스레 낯설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껌」을 예로 들자면, 나는 일상 속에서 껌을 수없이 봐 왔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껌을 자세하게 살펴 본 경험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 씹다가 버린 껌은 더더욱 그렇다. 그도 그럴게 단돈 500원에 사 단물이 빠진 뒤 뱉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 껌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김기택 시인은 누군가 씹다 버린 껌을 집요할 정도로 관찰한다. 우리는 김기택 시인처럼 씹다 버린 껌에서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모습을 찾거나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것이라는 감상을 느끼지는 못한다. 지나치게 익숙하며 어디에든 널려 있는 껌은 그 누구도 깊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기택 시인의 집요한 관찰은 껌이라는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끔 한다. 껌이 낯설어 지는 것이다. 그저 우리에게 씹히는 음식물에 지나지 않았던 껌이 잇자국이 남겨지는 대상, 이가 먼저 지쳐 뱉어지는 대상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진다.
익숙한 것에서 생경함을 찾는 것은 비단 사물에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주변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존재해 있던 것들 사물이나 사람, 환경 같은 일상 모든 것들에서 생경함을 찾을 수 있다면 껌이 그랬듯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새롭지만 익숙하기 때문에 서툴지 않게 말이다. 어떤 큰 사건보다 반복되는 일상이 더 지치고 고민될 때가 많다. 그럴 땐 너무 익숙해져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진 않은지 김기택 시인이 세상을 관찰하듯 주변의 것들을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일상 속에서 ‘새삼스러움’ 찾기 위해서 말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별것 없는 하루가 모여 일상이 되고, 별것 없는 일상은 우리의 인생을 이룬다. 별것 없는 것들의 소중함은 멈춰 서 자세히 바라보다 생경함을 찾았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