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JTBC의 <비정상회담>에서 콜럼부스는 신대륙 발견의 위인이 아니라 사실 잔혹한 침략자라는 이야기가 나와 뉴스를 가득 채웠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인’의 잣대가 한 분야의 정복에 맞춰져있기도 하고, 위인은 승자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이를테면 히틀러를 실패한 위인이라고 하는 것으로 역설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라는 제목과 달리, 반 이상의 초점이 스페인에 맞춰져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라틴’이 스페인을 기원으로 하기 때문인지, 본토에 대한 이야기보다 스페인, 유럽, 아프리카인 등의 유입과 융화의 역사를 더 상술한다. 모두는 어딘가에서 이리로 왔다.(p.424) 라는 말처럼, 아메리카라는 땅은 아메리고의 발견 이전에도 시베리아 쪽을 통한 유목인의 유입을 통해 정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유입과 융화는 그들의 배경이 아니라 역사 그 자체다. 표지로부터 300페이지가 지나고 나서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등장하며 근대와의 직접적인 끈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사실 푸엔테스의 이런 서술은 역사를 논하는데 당연한 수순이며, 라틴 아메리카 같은 경우는 그 과정이 침략과 식민으로 시작했기에 더욱 연원을 서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장의 손길로 하나하나 수놓은 이 책에 첨언은 사족처럼 필요하지 않다. ** 요약해서 말하면 스페인인의 전쟁은 지방주의, 게릴라 전쟁, 개인주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플루타르코는 스페인의 전쟁지휘관은 ‘연대자(solidarios)’라고 불리는 충실한 심복부하들을 주위에 두고 있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사령관이 죽으면 그들도 생명을 바쳐 싸운 후 뒤따라 죽었다고 썼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상호간의 연합을 거부하고 오로지 그들의 토지와 지도자에게만 충성심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로마인들은 스페인인들이 훗날 아스테카나 잉카 제국을 괴멸시키기 위해서 썼던 것과 유사한 방법, 즉 우수한 무기를 동원하고 고도의 정보작전을 통해서 그들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멕시코인들이 자신들이 사는 촌이나 우두머리에 바치는 충성을 제외하고는, 그들끼리 광범위한 동맹 없이 그저 모자이크처럼 뿔뿔이 흩어진 지역중심주의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코르테스 역시 로마가 이베리아인들을 쳐부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아스테카족을 정복할 수 있었다, (p.42) 세네카의 철학이 스페인에 끼친 영향은 강력하고 영속적이었다. 지금까지도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세네카”라는 말은 지혜를 의미하는데, 그 지혜는 바로 인생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행복한 세계에서는 철학자가 무슨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죽음에 대해서 세네카 자신은 금욕적으로 대처했다. 즉, 네로의 총애로부터 멀어지자 그는 황제의 노여움을 예측하면서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도 스페인 정신의 핵심을 이루는 영원한 철학을 남겼다. 무절제를 억제하고, 전쟁과 발견, 정복, 폭력, 죽음이라는 대모험 끝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성인과 화가, 시인과 전사의 나라 스페인은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이 진실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Don Quijote)」로서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귀향해서 예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죽음을 맞는, 최후에 가서는 그의 광기 어린 모험을 진정시키는 한 인간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p.46) 이렇게 해서 시간을 이해할 필요성은 인디오 세계에서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을 이해하는 것은 생존과 파멸 사이에 놓인 차이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즉,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삶의 지속성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시간을 셀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신들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라고 마야의 시인은 말했다.(하략) (pp.119-120)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는 1511년 몬테시노스 신부가 크리스마스에 행한 설교와 인디오의 운명에 관해서 던졌던 질문, “이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이요? 그들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까?” 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제 인디아스는 파괴되고 있다”라고 외쳤다. 몬테시노스가 한 그 설교는 “아메리카에서 정의를 향한 최초의 외침이었다”라고 현대 도미니카의 작가 페드로 엔리케스 우레냐는 썼다. (p.159)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농촌공동체는 순전히 인디오들로 이루어진 촌락과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했던 메스티소 공동체 사이의 경쟁으로 점점 분열되어 갔다. 그러나 노동관계의 중심은 곧 ‘엔코미안다(인디오를 보호하고 기독교화해주는 대신, 그들에게 사역을 시키는 것)’이나 ‘레파르티미엔토(임시적인 터전에 의거한 단순한 원주민 노동력의 분배)’를 계승해서 등장한 ‘아시엔다(hacienda)’라고 불리는 대농장제도에 의하여 공고해졌다. 이 제도는 오늘날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아시엔다 제도는 영속적인 노예노동의 형태, 즉 노동자들이 진 부채를 노동으로 갚는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빚은 노동자 자신의 살아 있는 동안 영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한테까지도 대대로 물려졌다. (p.165) 오늘날 토마토와 초콜릿은 누구나 알고 있는 흔한 것이지만, 당초 유럽인들은 토마토에 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꺼렸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이 토마토가 대단히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토의 어원은 아스테카어의 히토마틀(xitomatl)에서 유래하는데, 이탈리아인들은 아마도 낙원의 일화로부터 쾌락과 죄를 상기시켜주기라도 하듯이(그러나 이들은 구별된다) 이것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인 포모도로(pomodoro, 즉 황금의 사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p.251) 메스티소(mestizo)라고 불리는, 아마도 가장 독특하고 역동적이었던, 제4의 인종 그룹은 1810년쯤에는 그 수가 약 500만 명 정도였다. 메스티소는 세 개의 그룹 모두가 혼혈된 것을 지칭하는 말로 모멸적인 호칭으로 분류되었다. 메스티소는 백인과 인디오의 자식을, 물라토(mulato, 이 모멸적인 명칭은 물라[mila, 노새]에서 나왔다)는 흑인과 백인의 자식을, 삼보(zambo)는 인디오와 흑인의 자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테르세론(Tercerón)은 물라토와 백인의 자식을, 쿠아르테론(cuarterón)은 테르세론과 백인의 자식을 지칭했다. 그리고 테르세론과 물라토는 텐테넬라이레(tentenelaire, 문자 그대로 공중에 붕 뜬 의미)의 범주에 들어갔고, 쿠아르테론과 흑인의 결합은 살타파트라스(saltqapatrás, 인정족 후퇴를 의미하는 “뒤로 튄다”는 뜻)라고 불렀다. (pp.286-287) 베네수엘라의 작가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는 라틴 아메리카인은 흑인 유모나 인디오 유모로 인해서 세 문화의 혼합을 가지게 되었다고 썼다. 비록 순수한 백인일지라도 그들은 흑인이고 인디오이다. 또 순수한 흑인과 순수한 인디오로 남아 있어도, 그들은 유럽 세계를 동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런 3차원의 문화주의는 인종상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화는 인종주의를 초월한다. (p.303) 1829년부터 1852년까지 로사스는 23년간 최고권력자의 자리를 유지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여전히 아르헨티나 국민들 사이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국가의 통일, 무질서의 종식, 적극적인 국제무역의 확대, 애국주의, 외국 간섭의 배제, 거기에 더해서 국내 생산력의 육성을 달성했던 것은 그의 공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로사스를 변호하는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질서를 가장한 무법, 잔혹, 공포가 과연 자유의 대가로서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p.328) 멕시코 혁명이 라틴 아메리카인들을 위해서 20세기의 막을 열었을 때, 그들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예상할 수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인은 수많은 위기를 겪으며 살아왔다. 때때로 정치와 문화는 엄격히 분리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가깝게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커다란 희망과 만연된 폭력의 세기를 맞는 이때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와 문화의 통합은 이제 미완의 작업으로 남게 되었다. (p.382) 이렇게 역사의 주기는 숙명적으로 우울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허약한 문민정부는 새로운 군부 쿠데타에 의해서 전복되고, 혼란 뒤에 독재정권이 탄생하고, 또 독재에 의해서 또 다른 혼란이 뒤따른다. 레콜레타 묘지는, 작가인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스가 지적한 것처럼, 시체애호증이 있는 한 나라의 상징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화려한 시체는 아마도 아르헨티나 자신일 것이다. (p.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