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우리의 무속에 대한 이미지는 무엇인가. 알록달록한 오방색의 한복을 차려 입고 날붙이를 들고 덩실 덩실 춤을 추며 고함을 지르는 여자. 말도 안되는 사이비, 흔히 들 부모님 세대가 용한 점쟁이한테 받아 왔다 하면 보이는 여러 부정적 반응들. 우리에게 무속이라는 것은 눈살을 찌뿌리게 하는 원시적 신앙이며 사기꾼의 집단이라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다. 그리고 이것은 최순실 게이트라는 한국의 현대사에 어마어마한 궤적을 남긴 사건을 시작으로 더 더욱 심해졌다. 우리는 무속을 미개한 영역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무속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자기완결을 낸 것이라 생각한다. 애초에 우리나라의 종교는 적든 많든 모두 무속에 영향을 받았다. 한국 기독교를 보자. 대다수의 종교적 미사는 정숙한 가운데에 치뤄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격렬한 레크리에이션과 합창, 마치 축제분위기 같은 미사 현장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경건 해야할 미사를 훼손한 이단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고 한국의 무속에 영향을 받아 한국식으로 변형 된 것으로 불교 또한 한국의 무속의 영향을 받아 한국식으로 교리가 바뀌는 둥 무속이라는 영역은 단순히 미개한 종교가 아닌 우리나라 종교 전반에 영향을 준 당당한 우리나라 토속 신앙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책은 무속에 대해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들을 서술해 놓은 책이다. 물론 종교라는 것이 꼭 알아야 되는 상식 사항은 아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불교경전을 들여다 본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러나 무속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고 싫어하지 않는다면 한번 쯤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지역마다 다른 무속의 형태, 기본적인 행사의례, 무속의 의미와 기원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이비의 영역이 아닌 긴 세월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져 온 우리나라 토속신앙 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신앙에 높고 낮음은 없다라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인류 역사상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작태들을 두고보자면 신앙이라는 것은 인류에 있어서 독이라고도 생각이 들 정도 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정서적 안정과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의 잠식에 대해 생각 해보면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긴 하다고 생각한다. 무속을 단순히 원시적인 무식한 종교라고 치부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이다. 모든 종교는 원시적이다. 성경의 구약을 한번 읽어보라. 동성애자는 돌로 쳐죽이고 하룻밤에 수십만명을 죽인다. 자신을 믿는 신도를 시험하기위해 아들을 제물로 삼으라는 시험을 내리고 천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산적의 노리갯거리로 넘긴다. 신앙의 의미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최초의 살인 또한 불합리한 신에 대한 저항일 뿐. 누가 누구에게 원시적이라 비난 할수 있는가.

올해의 문제소설 (2016, 현대문학 교수 350명이 뽑은)

의 삶, ‘진짜

 

 

 

1. 문제 상황 분석

 

주객전도(主客顚倒). 소설 속 의 삶은 마치 주인이 다이소의 물건인 것처럼 보인다. ‘는 물건이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것 같아서 사고, 필요한 이유를 만들어서 사고, 급기야 새로 산 물건 때문에 다른 물건까지 구매한다. 보편적인 사람들처럼 필요에 의해 소비하거나, 적당한 기분전환에 그치지 않고 중독된 듯이 다이소에 가는 것이다. 그렇게 에게 다이소는 삶의 일부에서 전부로 바뀌어간다. 그렇다고 다이소에서 물건을 사는 것이 에게 정말 만족스러운 삶을 선물하였는가?

가 다이소에서 산 물건은 어떠한 느낌을 선물하였다. ‘일류 레스토랑에 간 느낌’, 외국 영화의 커플이 된 것처럼 이국적인 느낌말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닌 그러한 기분을 들게 하는 잠시의 착각이다. 이 잠시의 착각은 다른 곳으로 뻗어나간다. 특히 개에게 그렇다. 개가 아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완과의 말다툼에서 개를 아기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개에게 밥을 주지 않은 영완을 육아를 여자에게 미루는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공동육아에 대한 문제까지 걱정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는 점점 진짜를 대체할 수 없는 영역과 마주친다. 영완과 싸우다가 지나가는 젊은 부부와 아기를 보며 자신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개는 아기가 아니다. 소꿉장난은 진짜 살림살이가 아니다. 아기를 키우는 친구의 삶을 진짜삶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가 은연중에 자신의 삶을 가짜라고 느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 좋아하던 어떠한 느낌만으로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는 아기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렇게 물건이 의 삶을 빼앗는 상황과, ‘가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삶에 닿을 수 없는 것이 이 소설의 문제 상황이다.

 

2. 주인공의 문제 해결 방식

는 다이소에서 물건 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넌 다이소 없이 못 살 것 같다라는 영완의 말에 겨우 2천 원짜리 물건에 엄살이 심하다며 대꾸한다. 처음에는 1층에서만 물건을 사던 였지만, 나중에는 전 층을 망라하며 물건을 구매하는 모습은 대수롭지 않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젖병과 딸랑이같이 쓰지 않는 물건도 마구잡이로 구매하던 는 영완과 마지막으로 쇼핑하는 날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한가득 장바구니를 채운다.

그러나 영완이 정말 필요한 물건을 한 가지 골라보라고 말했을 때, ‘는 다이소를 찬찬히 둘러보며 지금까지 샀던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도 하지 못하며, 윤기 없으며, 정말 필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물건의 소용돌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삶을 살다가, 영완과의 마지막 시간이 되어서야 문제를 인지한다. 소설 속에서 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나오지 않았으나, 말미에서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였으니 앞으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한편, ‘가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삶에 닿지 못하는 문제에서는 의 해결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는 단순히 눈앞의 상황만 모면하는 방식을 택한다. 친구가 아기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아기용품을 잔뜩 사는 모습은 현실을 외면하는 의 방식이다. 잠깐 아기용품을 사고 아기를 떠올리며 행복해하는 것이다. 개에게 시선을 돌리며 개를 아기처럼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의 일시적 해결 방안은 순간의 기분만 전환시킬 뿐,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결국 는 개로 인해 영완과 다툴 때 지나가는 아이를 보며 피했던 현실과 마주치고 상실감을 갖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진정 원하는 것은 다른 것임에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도 순간이다.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다. ‘는 계속해서 아기의 물건을 사들이며 마음을 달래고, 영완과 헤어지려 짐을 정리할 때도 애견용품과 아기용품을 놓지 못한다. 계속해서 순간을 모면하는 생활의 쳇바퀴에 갇힌다.

 

3. 평가 및 모색

 

이 소설을 읽으며 에게 강한 동정심을 느꼈다. 한심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인데도 주체를 굳히지 못하고 물건에게 빼앗기는 것이 불쌍했다. 그리고 자신을 친구의 삶과 비교하며 진짜를 갈망하는 모습도 안쓰러웠다.

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자신의 상황을 뚜렷하게 보아야 한다. 다이소의 물건들이 자신에게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자신의 삶을 인지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가 다이소에서 과소비하는 행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눈앞의 상황들만 임시적으로 모면하려는 행동도 돌이켜야 한다.

이렇게 삶의 주체를 되찾는다면, ‘진짜삶에도 다가갈 수 있다. ‘의 문제는 가 원하는 진짜, 즉 아기와 함께하는 삶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진짜삶의 기준점을 친구를 부러워하며 잡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다시 생활습관을 바로 잡고 물건의 삶이 아닌 의 삶을 되찾는다면, 친구와 비교하며 진짜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진짜삶을 꾸릴 수 있으리라.

베를린 필 (2016 제61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샛노란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개나리 산울타리를 만드는 사람들

 

 

 

1. 문제 상황 분석

 

노랗다. 소설 개나리 산울타리는 온통 노랗다. 소설 속 표현은 만개한 개나리 같이 따스한 노란색이지만, ‘남자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온갖 병을 다 얻은 듯 텁텁하고 노르께한 색이 떠오른다. 그런 노란색이 떠오르는 이유는 필시 남자의 역겨운 행동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비윤리적인 일들을 저질렀다. 대학시절 4-5명의 친구들과 함께 후배를 강간하였고, 버젓이 아내와 아들을 둔 가장이지만 불륜에 원조교제까지 한다. 이는 남자가 정신과 의사가 아닌 오히려 치료를 받아야하는 환자가 아닐까 의문을 갖게 한다. 어쨌든 의사인 남자에게는 그에게 상담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있다. 그들은 시각적으로 이상이 없지만 하늘이 노랗게 보여 개나리 손질을 할 수 없다는 초로의 부인과, 심각한 편견에 사로잡혀 회사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내이다. 이들에게 남자를 투영하면 그가 스스로 우물 안에 들어간 개구리이며, 다시 우물을 벗어나려 하지만 실패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2. 주인공의 문제 해결 방식

 

이 개구리는 넓은 세상이 싫어 자신의 안식처에 스스로를 가둔다. ‘남자는 스스로를 산울타리라는 자신의 좁은 생각 안에 가둔다. 그리고 개나리와 같은 들에 둘러싸여 좁은 하늘을 바라본다. 울타리 또한 원하는 위치에 직접 만들었기에, 그 좁은 하늘에는 남자가 보고 싶은 것만 담겨있다. 개나리 산울타리에 사는 그는, 노란색 하늘에 취해 산다. 이는 마치 편견 가득한 환자처럼 자신의 문제(편견)가 무엇인지 알아도 그것이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고 믿는 것 같아 보인다. 이처럼 남자는 유나의 상황에 대해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 막연히 잘 살고 있으리라 믿고 넘겨버린다. 회피하고 자신의 좁은 생각 안에 스스로를 욱여넣어 자기 합리화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남자가 노란 그곳에 자신을 가둘수록 하늘은 더욱 노래진다.

그러나 그는 하늘이 파란색인 것을 알게 된다. 울타리 밖 사람들이 하늘이 파란색이라고 일깨워준다. 남자의 동창은 유나에 대한 죄책감을 비치며 남자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늘은 노란색이 아니라며 그를 찌른다. 사실 남자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란 하늘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파란하늘을 부정하고 숨겼을 뿐이다. 그러나 남자는 계속 해서 찔리자, 무의식중에 파란 하늘을 신경 쓰던 자신을 발견하고, 그제야 울타리 손질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 노란 울타리와 노란 하늘, 온통 노란 세상이 어지러워 빠져나올 수 없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부숴버린다. 아내도, 링고도, 끝내 자신도.

 

3. 평가

역겹다. 소설 속 남자. 가해자가 피해자를 기억하지 못하며, 자기 합리화를 통해 위안을 얻는 모습이. 그 좁디좁은 자신의 생각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다 겨우 내린 결론이 우리는 젊었지만 한 번도 깨끗했던 적은 없었다고. 순수하고 순결한 젊음은 전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고,”라는 것이 더 그렇다. 이는 결론마저 문제 상황을 회피하는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깨끗하고 순수한 젊음이 아니라는 것이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더 깊은 반성과 후회, 물의 터널에 빠져 허우적거릴 정도의 자기 처벌이 필요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주인공을 욕하는 것에만 바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을 통해 자신도 비춰보아야 한다. 개나리 산울타리의 주인공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극대화한 작중 인물이다. 그래서 주인공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과연 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직접 만든 개나리 산울타리 속에 들어가 현실을 외면한 적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개나리 산울타리를 만드는 사람은 우리 모두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실수를 하고, 회피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를 대응하고. 아닐 거야, 아니야. 설마. 라는 말로 자신을 가두고 노란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결국 타인에게 해를 줄 뿐 아니라 자신까지 부수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작은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편견과 좁은 생각, 회피에서 벗어나 문제를 직접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소설 속 남자들이 득실대는 뻔뻔하고 냉소적인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멀리하기 위해, 파란 하늘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일깨워 주는 것도 개나리 산울타리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 (워터프루프북)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인풋이 있으면 아웃풋이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온다는 둥 뿌린데로 거둔다고 들 하는 이야기 이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뜨거운 화두가 아닐 수 없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은 과거 가부장제에 시달린 어머니 세대들을 동정하며 그 악습에 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하며 현모양처여야 하고 어쩌구 저쩌구. 흔히들 말하는 페미니스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남성들의 억압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코르셋을 풀고 행동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 가부장제에 있어서 최대의 수해자가 남성이라 생각하는가? 돈을 버는 것의 고됨을 모르는 철이 없는 시선들. 집안의 기둥이 되어 상사의 구둣바닥을 핥아가며 세월을 버텨온 가여운 그들을 단 한 순간에 남성권력에 취해 여성을 억압하는 무식하고 폭력적인 인간으로 낙인 찍는다. 페미니스트 여러분 축하합니다. 당신들의 아버지, 삼촌, 등등 주위의 웃 어른들의 삶의 투쟁을 한번에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당신만을 보고 버텨온 한 세월을 무시하는 그 행태에 무엇이 남는가. 나는 고민했다.
 
 이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과장된 소설이다. 페미니스트를 겨냥해 쓴 것이 눈에 보일정도로 허황된 통계를 사실인 양 붙여 놓았으며 작가는 이에대해 이런  말을 했다. ‘실제보다 상황이 안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찌 생각하든 거짓말 같은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즉 작가는 소설의 허구성을 인지하며 남성과 여성의 대립구조를 증폭시키기 위해 허황되고 과장된 글을 썻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학적으로 뛰어난 작품인가? 그것 또한 아니다. 조작된 통계를 쓰기위해 구체적인 맥락을 무시하는 등의 단순히 메시지 전달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부족한 글이다. 그렇다면 이글에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즘. 이제와서 나에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온갖 허황된 과장과 거짓으로 범벅이 되어 정치권에서 이슈로 사용하는 얄팍한 사상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의 세상에서는 남성은 당연하듯이 여성을 성희롱 한다. 모든 남성들은 여자를 스토킹하고 남아를 선호한다. 남자는 1등시민 여자는 2등시민. 세상 모든 공공 화장실에는 몰카가 숨어져 있고, 지나가는 모든 남성들은 주부들을 맘충이라 비난한다. 여자아이라서 낙태당하고 여자라서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여자라서, 여자이기에 당한다. 얄팍하다. 이 글은 얄팍한 글이다. 읽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뿐인 글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얄량한 가치를 제외하고 이글에 남는 건 한줌 불쾌감이 전부일 것이다.
 
   
  최근 혜화역에서 여성시위가 일어났다. 이유는 몰카범죄 때문.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관도 아니다. ‘남성의 누드모델’을 몰래 찍은 ‘여성’을 빨리 잡았다는 이유로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요지는 이렇다. 만약 여자가 당했으면 이렇게 빨리 잡았을 것인가. 범죄자를 빨리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애초에 용의자가 특정된 상황에서 수사가 빨리 끝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들에게 논리는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이 범죄를 저질러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여성이라서 더 심한 처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동일 범죄를 저질렀을시 남성이 받는 형량보다 여성이 받는 형량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수혜는 여성이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계는 그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논리로서 행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불행한 삶과 부족한 자존감을 페미니즘으로 체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다시 혜화역으로 나가 소리지른다. 무좆유죄 유좆무죄. 

다섯째 아이

  해리엇은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아무나 혼전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자기의 첫 남자에게 순결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부유함 보다 검소함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둘은 결혼을 해서 네 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그전까진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해리엇이 다섯째 아이 벤을 임신할 때부터 가정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벤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사두증에 힘이 무지 셌고, 인지 능력은 많이 떨어졌다. 마치 다른 유전자거나 생김새 또한 외계인처럼.  벤은 형의 팔을 꺾고, 개를 죽이고, 어머니를 거부하고, 항상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가족을 바라본다. 그를 체감하지 않은 의사들은 벤을 ‘정상 범주에 속하는 인간’으로 판정낸다. 하지만 정상인들의 세계에서 벤은 이해되지 못한다. 벤의 존재로 해리엇과 데이비드들이 꿈꾸는 가족의 이상은 파멸된다.
 
  이 책의 내용은 꽤 공포스러웠다. 특히 하는 행동을 묘사하는 부분은.  난 작가가 읽는 이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고 쓴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원하는 이상향에 예기치 못한 불행이 생길 수 있음을 알려주고 얼마나 그것이 꺠지기 쉬운가. 그걸 가족상에서 보여주고 싶어 한 것 같다. 또한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풍족한 행복을 느끼고 있을 때  한 소녀에게 이런 행복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거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인간의 이기주의를 보았다. 마음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아보자. 한번쯤은 누군가에게 내가 누리는 것을 너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 있지 않을까?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에도 의문이 생겼다. 일상에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그것은 직접 겪어봐야 안다.
  책을 쓴 도리스 레싱은 영국 여성작가다. 도리스가 어릴 때 그녀의 부모님은 아프리카에서 농장을 운영했는데, 황량한 아프리카 대지에서 도리스는 자유로웠고 어떤 집단이나 그룹 안에 있는 걸 싫어했다. 어떤 집단이란 결혼, 학교, 정당 같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속해있는 테두리를 말한다. 이러한 사고는 저자 도리스의 소설 대부분에 영향을 끼쳤고 <다섯째 아이>의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성격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 후 성장한 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야기가 후속작으로 나왔지만 아쉽개도 국내  정발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당신을 위한 감정의 심리학)

[상상독서 베스트리뷰 선정 도서 | 대출하러가기]

 이번 기회를 통해서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 라는 책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제목부터 독자들을 위로해주고, 또 독자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느낌이 들어서 나의 눈길을 끈 책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것을 고민하고, 또 이러한 고민들로 인하여 가끔은 불안하기도 하고 또 상처도 받고 하는 것 같다. 우선 이 책의 제목에서도 암시해주듯이, 너무 남에게 잘해주어야 하고, 남들의 기준에 맞추어주고, 배려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비록 남들이 조금은 서운해 할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 좀 더 중심을 두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고민을 유발하는 상황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마 남들과 비교를 하게 되는 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이만큼의 성과를 내는데, 나는 왜 노력을 해도 이만큼밖에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면 굉장히 속상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위치, 나의 목표를 위하여 하나하나 해나가는 과정들이 가치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세상이 만든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때도 있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조금 뒤쳐진다고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항상 자기 자신에게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며, 또 하루하루를 알차게, 또 자신만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이것이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책에서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이 ‘혼자있는 시간의 중요성’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을 한다. 특히 자신이 지금 힘든 상황일 때,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일부러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보다는 조금은 웅크리고 있는,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 책에서 제시한다. 그러면서 조금 더 자신에 대해 성찰도 해보고 진지하게 앞으로의 계획도 세워보는 것이다. 이런 시간들이 자신을 한 층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하여 많이 힐링도 되고 또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나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도 해보고, 또 결국은 내가 행복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남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하다면, 그만큼 남들 앞에서도 더욱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꼭 확보하여 나의 마음을 추스르고, 또 나 자신에 대해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의 중요성도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또 자존감을 높이고 싶을 때, 읽어본다면 많이 힘이 되어줄 것이다.

목걸이 (BESTSELLER WORLDBOOK 41)

[상상독서 베스트리뷰 선정 도서 | 대출하러가기]

  젊었을 때 순간의 허영심이 부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는 소설의 줄거리는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와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겉 치장에 신경 쓰는 편도 아니고 허영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영심이 조금도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마틸다의 허영심을 나무라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허영심이 마틸다는 좀 더 강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마틸다처럼 자신의 분수 이상으로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된장녀와 같이 이들을 일컫는 신조어도 탄생했다. 사람들은 이들을 나무라고 욕하기만 할 뿐 왜 이들이 무리하게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하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이 시대의 우리가 아닌가 싶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쉽게 평가하고 차별 대우하는 우리들 말이다. 그러므로 된장녀된장녀라 부르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우리가 그런 태도로 남을 대하지는 않았는지,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사실 나도 외모지상주의적 태도가 잘못되었으며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나를 성찰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만 가끔 외적인 부분을 중요시 여길 때가 있다. 물론 첫인상은 3초 안에 판결이 난다고 할 정도로 보는 것은 인간의 오감 중 하나이고 가장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나 또한 꾸준히 외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이 책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순간의 선택이 인생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인데 성인이 되면서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을 지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을 요새 들어 느끼고 있다.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사소해 보이는 선택이라도 그것이 나중에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알지 못하므로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또한 마틸다의 남편 루아젤도 꽤나 멋진 남편이라고 생각되었다. 파티를 좋아하는 마틸다를 위해 어렵게 파티 초대권을 구해다 주고 파티에 마땅한 드레스가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아내를 위해 친구들과 사냥을 가기 위해 마련할 권총을 살 돈을 선뜻 내어놓는 모습에서 아내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또한 마틸다의 실수로 잃어버린 목걸이를 갚아나가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고생해야 할 것을 알지만 끝까지 마틸다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고난을 헤쳐나간 점이 굉장히 멋있게 느껴졌다. 만약 나라면 남편의 실수로 나의 청춘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남편 곁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 소설의 묘미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반전은 나에게 크나큰 충격과 허탈함을 안겨주었다. 목걸이 값을 지불하기 위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젊었을 시절의 고생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도 없고 돌릴 수도 없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아 마틸다가 제인에게 진짜 목걸이 값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받았다고 하더라도 마틸다는 찬란한 젊음이라는 시기를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고등학생 때는 입시 때문에 느끼지 못하였는지 몰라도 스무 살이 된 지금 나는 나의 스무 살이, 이 젊음이 너무나도 좋다. 나만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열정을 쏟을 수 있고 마음대로 꾸미고 어디든 놀러 다닐 수 있는 건 젊은 시절이기에 더 가치있게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마틸다에게는 10년이라는 고생의 세월은 특히나 더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틸다의 사정이 너무 안타깝고 마틸다에게 연민의 감정이 더욱 많이 들었다.

 

   나의 스물한 살이 벌써 반이나 지나갔다. 나의 이십 대는 아직 8년하고도 반년이나 남았지만 뭐든지 처음이고 그래서 더욱 풋풋한 스무 살,스물한 살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버린 것에 요새 나는 하루하루가 아쉽게만 느껴지는 요즘에 이 책을 읽고 내 젊음을 소중히 여기고 누리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세계문학,에밀 아자르 장편소설)

 처음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을 ‘돌들의 사랑’으로 하려했다고 한다. 모모와 로자아줌마가 돌이란 말인가. 그랬을수도 있다. 물론 우리들 눈에만. 대다수의 소설책이 그러하겠지만 이 책은 사랑을 다룬다. 하지만 여느 소설의 사랑과는 다르게 상당히 보잘 것 없다. 창녀의 아들로 태어나 버려진 모모와 그 아이를 대신 길러주는 살이찌고 늙어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모든 병에 걸린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 비록 그들은 혈육관계는 아니지만, 진심을 다해 서로를 위하고 걱정한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소외 계층들이다. 즉 보통의 사람들에게 소외되어 외로운 그런 존재들.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오직 그들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 뿐이었다. 어린 모모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무 지독한 냄새가 나지 않는 이상 쳐다도보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생각해봤다. 만약 이들이 내 옆에 있었다면, 나는 진심어리게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솔직히 말하면 책을 통해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었지만, 만약 이 둘이 실제로 내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있었다해도  난 이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에 이 책을 검색하면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라는 이 책의 소개글을 볼 수 있다. 쓸데없이 태클을 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나는 이 소개글이 아주 싫다. 심지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왠지 이 소개글을 보면 뭔가 보통의 사람들(자신들이 ‘모모’와 늙은 ‘로자 아줌마’보다 훨씬 나은 상황,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딱한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척 하며 우롱하는 것 같다. 즉 모모와 로자 아줌마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소개글을 쓴 사람은 그들을 우롱할 마음없이 그저 우리들에게 그들을 소개해주고픈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내가 그들을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갚이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기때문인 것 같다.  아마 내가 괜히 소개글에 화풀이를 한 것은 이렇게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남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나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결국 보잘 것 없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아니라 이 세상 속 ‘그들’에게 진심어린 관심을 갖지 않던 나였다.

  제목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제목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을 ‘돌들의 사랑’에서 ‘자기 앞의 생’으로 바꿨다. 자기 앞의 생,  즉 여생.  여기서  ‘자기’는 누구일까. 모모일수도 아니면 눈을 감기전의 로자 아줌마일지도 , 혹은 나 일지도 아니면 이 글을 읽고있는 여러분일지도. 우리들 앞의 생은 어떤 것일까. 생의 내용대신, 생 그 자체를 제목으로 한 것을 보면  작가는  삶 속의 특별한 내용보다 각자의 생  그 자체를 축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길 건너 저 카페 앞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빅토르 위고 일수도, 북적한 시장 속 과일가게에서 몰래 옷주머니에 과일을 훔치는 저 꼬마는 모모일수도, 지하철 역 계단을 헉헉대며 오르는 아주머니 이름이 로자일수도 있는 이 생은 그 자체로도 가치있는 것인가보다. 심지어 책을 통해야만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형편없는 나의 생마저도!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

  떠돌이 프랭크는 자기에게 선뜻 일자리를 준 닉의 부인 코라와 사랑에 빠진다. 프랭크와 코라는 닉을 없애고 도피할 계획을 세우지만 경찰에게 덜미를 잡히게 된다. 마지막에 코라는 교통사고로 죽고 프랭크는 사형에 처하게 된다.
  이 책이 출간된 당시, 폭력과 성애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나에겐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번역가가 원본을 순화해서 옮겼는지는 잘 모르는 일이다. 작품해설을 보면, <포스트맨>은 하드보일드(hard-boiled)소설이다. 하드보일드소설은 1930년대 새롭게 등장한 사실주의적 기법의 미국문학인데 대표적인 작가는 허밍웨이가 있다. 이 책의 저자 케인도 그 흐름을 따른다. 이런 기법의 특징은 수식어구 없이 문장이 짧고 간결해서 거침없이 읽히고 사실을 파악하는데 빠르다는 것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는 제목은 소설의 내용과 별 관계없어 보이지만 저자가 실제로 있었던 ‘스나이더-그레이 소송 사건’에서 기본 줄거리를 따왔으며 평소 자기에게 자주 오는 우편배달부가 확인차 벨을 두 번을 울리는 걸 반영했다. ‘스나이더-그레이 소송 사건’은 스나이더의 부인 루스와 그녀의 불륜남이 스나이더를 살해 후 남편의 보험금을 탄 사건이다. 그 안에는 루스가 우편배달부에게 남편의 보험 지급증서를 배달할때 그 신호로  초인종을 두 번 울리라는 부탁이 담겨있다.
  소설의 두 중심인물 프랭크와 코라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내용은 아니다. 실제의 사건이 모티브인 만큼 어둡고 차가운 내용이다.
코라는 젋고 예쁘다. 코라는 남편 닉을 개기름나는 늙은이로 표현한다. 그와 결혼한 건 사랑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에게 눌어 붙어서 살려고 한 것이다. 프랭크는 방랑자다. 소설의 처음에 프랭크는 침대가 아닌 건초 트럭에서 잠을 깨고 코라를 사랑하는 중간에도 다른 여자와 여행을 가기도 한다. 그래도 코라를 사랑한 건 진심이었기 때문에 죽음의 끝에서 코라를 생각한다.  그 두 인물은 닉을 살해하는 걸 계획했어도 그다지 똑똑하지 못했고 본능적이고 충동적이었다.  그점이 경찰에게 덜미를 잡히게 한 것이다.  프랭크의 끝이 사형인 것은 잘못에 대한 현실적인 처벌이라고 생각한다. 사형을 기다리는 프랭크에게 동정심이 생길지라도 그는 살인범, 공범이다. 세상에 프랭크와 코라같은 사람은 많다. 왜냐하면 그런 부도덕함이 모든 우리 마음 속에 조금이나마 있기 때문이다.

늑대토템 1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빽빽하게 세워 진 빌딩이 보인다. 20대를 살아가는 현재. 나는 콘크리트의 정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것이 불편하거나 나쁘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류에게 평안한 삶과 편리함을 주었고, 이는 삶의 질의 향상을 불러왔다. 이 모든 것의 수혜자인 내가 이것을 불평한다면 상당히 뻔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내 마음 속 한켠에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숨어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드넓은 초원, 국내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평선, 군 생활을 제외하고는 본 적도 없는 별 무리에 휩싸인 밤하늘. 현실의 자연이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동경을 하게 된다. 들끓는 벌래, 중구난방 자라있는 잡초들,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 그렇다 하더라도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작품 늑대 토템은 중국 문화 혁명 당시 대학생이었던 주인공 ‘천전’ 이 몽고의 말 목장으로 강제로 보내지면서 겪는 이야기 이다. 그는 몽골의 드넓은 자연의 삶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배운다. 늑대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주의에 순응하던 주인공을 ‘문명화된 양’ 이라 본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친 야성인 늑대의 투쟁이라 여긴 것이다. 작 중 주인공은 마을의 촌장을 스승으로 여기며 자연에 순응하며 공존하는 유목민의 삶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광활한 초원의 숨소리와 거친 늑대의 생명력으로 가득 찬 삶으로 표현된다. 사회의 축으로 모든 것을 순응 하는 삶만 살던 주인공은 늑대를 보고 늑대의 삶을 배우며 점점 변해간다. 인류의 대부분의 저서, 이솝 우화 부터 시작해 어린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에서 조차 늑대는 악역으로 등장한다. 로마시대, 중세 유럽 언제든 늑대는 늘 신성한 종교의 대척점에 존재 하였고 우리는 항상 악인에게 늑대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늑대는 자연의 정령이며 전쟁의 신이다. 언제나 무리를 위해 희생을 하며 초원의 어머니이자 강인한 정신력이다. 그들은 늙거나 약한 일원을 버리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암컷과 새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유일한 동물이며 기아와 탐욕을 절제할 줄 아는 영리한 동물이다. 주인공은 몽골의 위대한 초원에서 늑대의 삶을 보고 배우며 동경하게 된다. 이는 현대의 삶을 살며 초원을 동경하는 나로서는 공감을 느끼게 하는 큰 요소였다. 흔한 대학생이었던 천전이 늑대의 삶을 배우면서 몽골인들과 어울리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며 나는 일종의 대리 만족을 느꼈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생각 했다.
 
 
콘크리트의 정글에 지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연을 동경하게 된다. 문명화된 도시는 분명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우리는 원초적인 자연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는 차량, 바삐 울리는 핸드폰, 시덥잖은 소리를 내뱉는 tv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서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보며 하릴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지는 거다. 이 소설은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드넓은 초원을, 고고한 늑대를 야생 그대로를 옮겨 놓듯이 묘사한다. 나도 언젠가 글 속의 주인공 처럼 훌쩍 몽골로 떠나 초원의 삶을 느껴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