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난 문학수업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문학에서 보여주는 하얀 것에 대한 해석은 그리 포괄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깨끗함, 물들지 않음, 순수, 기염 그리고 승화의 의미로 기억한다.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회색빛 달동네에 대조적인 색깔로 내리는 하얀 눈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받는 눈은 어느 곳에서 보다 쓸쓸하고 아픈 의미로 해석되었다. 전봇대 조명 아래에 고요히 내려앉는 눈을 보고 있는 장면이 생각나는데 그 상황에 느껴지는 감정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도 많은 이들에게 잘 전달된다. 눈 내리는 모습에 공통으로 전해지는 감정의 결이 있다는 건 흰 눈이 사람의 감정을 동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한강의 흰 것에 대한 여정은 쓰라리고 아프다. 내가 생각하던 하얀색의 표상이 아니었다. 한강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몰입하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서글펐다. 그녀의 문장이 너무 아픈 나머지 내가 공감했다고 말하는 건 염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아픈 기억을 드러내고 기록하고 기억하는 이 행위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싶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상처 난 피부에 소금 치는 거라 비유했지만 이것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큰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이 크게 공감했던 부분도 비슷한 맥락이다. 온몸으로 내 삶이 아프다고 표현하는 작가에게 ‘나도 그래요’라는 한 표를 던지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낼게.
촛불을 바라보며 세상을 떠난 언니에 대해 오직 흰 것을 건넨다는 말. 결국 이 삶에 대해 내린 정의는 아픔이기 때문에 이 흰 것을 내가 건네도 될지 조심스러운 사람이 된다. 혈육이 이 세상의 언어를 떼지 못한 채 떠나간 결과로 자기 자신을 두고 있음을 내비치는 작가가 때론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난 작가가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한도가 없음을 느꼈다. 난 얼마든지 슬퍼할 수 있는 감정을 말하고 있다. 이미 나는 나의 존엄한 감정을 숱하게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 일상을 견뎌야 했다. 그녀의 슬픔 앞에 왜 내가 자신을 비참하게 여겼는지 알게 되었다. 작가가 슬픈 그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있음이 곧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아픔에 갇혀버렸지만 도망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작가로서 말하는 인간의 고통, 삶에서 느끼는 회의란 사람들이 현실에서 외면하고 싶은 일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외면하려 도망친 곳은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사소하게 넘어갔던 과거의 내 아픈 감정들을 마주했다. 그 문장에 공감하고 이입하는 이유는 여전히 내 마음이 그곳에서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인 듯 하다. 나 또한 아픔에 갇혀있는 게 아닐까. 철장 안에서 나온 새는 진정한 자유를 맛본 줄 알았지만, 그곳은 또 다른 거대한 철장이었다. 사람들이 삶의 목적으로 찾는 행복이 진정한 삶의 이유라면 한강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부정의 의미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스스로 부정적으로 진단하고 있는 한강의 삶이 ‘진짜 인생’이 아니라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