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일 년 후

대도시의 사랑 이야기. 누구나 들어봤을 법 한 전개로 삶의 일부, 어쩌면 전부를 바치게 되는 매혹적인 주제이다. 여러 선택지 중에 고르고 고른 또렷한 마음의 소리, 하지만 명제로 치부될 수는 없는게 사랑이라 말한다. 수많은 인연들 속에 피어난 사랑의 짧음과 덧없음에 대하여.

그 형태를 마주할 때의 용기, 단순함 그리고 환상. 어쩌면 비극인지 모를 사랑의 묘한 힘을 믿는 순간이었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는 개연의 축적이 존재한다. 마침표를 들고선 주변을 둘러보며 필사적으로 쉼표를 찾으려는 베르나르, 치명적인 소용돌이를 몰고 다니는 아우라의 대명석 베아트리스. 모순된 불씨와 순간의 불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언제나 흔들리고 또 다른 빛으로 위장된다.

“정말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시간이 있는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눈을 찾는다.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랑은 타인을 향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비추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었다. 평탄하고 순조롭고 따뜻한 사랑을 원하는지, 그저 열렬한 사랑을 원하는지 자문했다.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무삭제 완역본)

드디어 읽었다. 어찌나 대출자와 예약자로 에워싸던지 도서 주변으로 아우라가 느껴졌다.
나는 딱 세 가지 포인트만 소개할 예정이다.
1.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져라.” 모든 인간은 95%가 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내 이야기를 상대에게 쏟아내고 자랑하고 싶을 때가 많다는 의미이다. 미소를 짓고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 상대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라는 건 최선을 다해 상대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노력을 시도하라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집에 돌아가면서 떠오른다. 관심사를 주제로 원활하게 주고받았던 대화는 나와 결이 비슷하게 느껴졌고, 그와 만남을 위한 자리를 또 마련하고 싶을 정도였다.
2. “누구나 칭찬과 인정을 갈망한다. 그걸 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첨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누가 봐도 보편적으로 해줄 법한 칭찬도 좋다. 외에 스며들어 향조차 맡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해 준다면 뿌리지 않아도 은은하게 배어나는 매력이 될 거 같다. 나만의 시그니처를 파악하는 계기가 될 수도, 역량을 더 강화하기에도 적절해 보인다.
3. “용기를 줘라. 상대에게 무언가를 못 한다, 소질이 없다, 몽땅 틀렸다고 한다면 더 잘해야 할 이유를 모조리 파괴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한 거나 다름없겠다는 어조일 테니까. 약간의 격려는 의욕뿐만 아니라 동기부여와 자극을 불러일으켜 새벽까지 방에 불을 켜놓게 된다. 당신의 말 한마디로 영혼을 구하고 변화시키는 기적을 원한다면 !
인간관계가 막막한 이들, 본인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내부로 쏠려 눈치 보게 되는 이들, 보다 더 안정적으로 세계관을 확장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한다.
그렇게 카네기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성공 경험을 쌓아나가길 바랐다.

돈의 심리학 (당신은 왜 부자가 되지 못했는가(보너스 스토리 수록))

“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에는 가격이 있다. 집, 휴대전화, 에어컨, 힙한 바지, 하물며 고양이까지도. 언뜻 표면적으로 보기에 동일해 보여도 어떤 제품에는 손이 가기 마련이다.
이를 설득 당한 행동, 즉 선택이라 부른다. 사업, 투자, 성장을 생각할 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먼저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고, 그걸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스토리는 다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힘을 경제에 미친다. 돈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시간을 어떻게 보고, 나와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질문하는 것이다. 10년을 내다볼 것인가? 30년의 가치를 기대할 것인가? 1년 안에 팔 계획인가?투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내가 사실이길 바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고 믿어 버린다.” 매력적인 허구라 치부한다. 어떤 예측을 하면서도 우리는 잠재적 결과가 ‘내가 옳은 것’과 ‘내가 아주아주 옳은 것’ 사이에 놓이길 바란다.

내가 깨달은 것은 부와 안정, 미래와 투자, 성공과 존경 이 키워드를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획득하고 싶을테다. 세상에 대한 관점이 불완전할 때 우리는 그 속을 스토리로 채우려 한다. 하지만 본질은 ‘충분’을 알고 방점을 찍어야 할 순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판단력이고, 만족감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임을 느낄 때가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한 일 -결코 버릴 수 없는 것 -에 확실히 묶이고, 지키기로 한 것을 지키면서 자유로워진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단어를 살아낸다고 수년째 주장해 오고 있다.

오늘 마음에 새긴 단어는 ‘앎’이다. 앎을 얻으려 쏟아부은 시간은 앎과 결코 동등한 라인에 설 수 없다. 조각낸 미세한 앎을 발견하고 앎의 전부인 마냥 춤을 춘다. ㅇ인지 인지 ··· 쓸데 없는 것은 많이도 알면서 정작 중요한 마음은 놓치고 있는걸까, 매일 보는 태양에 대해서 조차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래 너는 하나뿐인 인생으로 무얼 한 거지?” 이 행복이 행복인 줄도 모르고, 이 사랑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이 평안이 평안인 줄도 모르고.

멋지고 근사한 일이 내게 찾아왔는데 너무도 몰랐다.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내가 찾던 것들이 주변에 있는 줄 몰랐다.

“지금은 알았니? 이제는 보이니?” 딱 하루 어깨를 돌렸더니, 이 한 끗 차이로 세상이 환했다. 얼마나 슬픈 세상에서 얼마나 기쁜 언어가 있는건데?

그 세계가 어떤 모형인까 하는 의문으로 가득찼다.


어쩌면 슬픈 세상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목적지로만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여러 압력에도 불구하고 공유되는 따뜻한 언어를 바라본 작가의 시선이 뭍은 세계라며 어렴풋이 짐작한다. 한 줄로 그어진 라인과 걷는 모양새가 제각각인 문장들처럼 말이다. 지금은 이 스토리를 위해 글을 빼곡하게 채우기 급급하지만, 훗날 엮었던 자음과 모음을 분리해 도화지처럼 여백으로 남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이 덮는다.

부자는 왜 더 부자가 되는가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리고 돈에 대해 배우고 싶었다. 주로 학교 시스템은 좋은 학점을 받고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해서 기업에 입사 후 저축하고, 더 나아가 노후 대책이라는 분산 장기 투자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봉급 생활자로는 단언컨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기하급수적으로 점점 빠르게 변하는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었고 전 세계가 돈을 찍어 내고 있으며, 명목 화폐의 가치는 점점 하락하고 있다. 그게 부유층과 빈곤층, 중산층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이유다.

세상은 사분면, E: 봉급생활자 / S: 자영업자, 소규모 사업가나 의사, 변호사, 부동산 중개업자 같은 전문직 종사자 / B: 직원 500명 이상을 고용한 대규모 사업가 / I: 적극적인 투자자로 분류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 다니고 일자리를 구하라는 명목 아래의 삶에 길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분면은 E 사분면뿐일 것이다. 현 교육의 시스템이 정신 / 신체 / 감정 / 영혼을 봉급 생활자로 걸어가게끔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일까? 싶은 의문이 들 텐데 우선 진정한 금융 교육을 받아야 한다. 즉, 수입과 지출에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 자산과 부채에 집중해야 한다. 풀어서 설명해 보면 (이 도서는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대학원생 버전이라 칭할 수 있는데, 금융 문해력을 키우는 것에 일조하는 복습 개념이 등장한다.) 가난한 아빠는 일자리를 구하라고 하지만 부자 아빠는 돈을 위해 일하지 말길 권유한다.

부자는 투자 소득과 수동적 소득을 위해 일한다. 예를 들어서 투자 소득은 부동산이 폭락할 때 매수한 후 가치가 상승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매도하는 경우다.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닌 저가에 매수하고 고가에 매도할 때마다 발생한다. 주식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반면 수동적 소득은 자산에서 발생하는 현금흐름을 의미하는데, 10만 달러에 임대 부동산을 구입하고 월 순수 임대 소득이 1,000달러인 경우 그 1,000달러가 수동적 소득이다. 이 부분이 발전된다면 극소수의 매우 부유한 사람들의 소득을 알 수 있다. 빈곤층과 중산층이 볼 수 없는 현금흐름, 부채와 세금의 파생상품이 “유령 소득”의 핵심이다. 물론 부채는 까다롭고 자칫하면 위험해지기 쉬우므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부채를 활용한 정교한 투자자는 자산가치의 상승을 불러일으키며, “좋은 부채란 다른 사람이 대신 갚아 주는 부채” 라는 것을 명심하라고 강조한다. 또, I 사분면을 이용해 세상을 지배한다거나 황금을 가진 자들이 규칙을 만든다는 사실도 그 속에 스며있었다.

일자리를 로봇이 대체하는 현시점에서 기술의 가속화는 나를 불안으로 내몰았다. 그럼에도 경제적 안정이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훌륭한 스승을 찾고자 손을 뻗었고, 그 본질을 파헤치고자 여정을 떠나려 한다. 판매, 리더십, 거절에 대한 두려움 극복과 지연된 만족에 관해 탐구하고 평생 배움을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나는 오늘 행운을 읽고 현명을 얻었다. 비록 지금은 작을 테지만 굴리고 굴려서 내공을 쌓아 나아갈 거다.

탕비실 (이미예 소설)

탕비실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더니 처참하게 망했다. 날아드는 비난을 피해 서바이벌을 재창조 했는데, 등장인물은 이러하다.

  1. 정확한 니즈 파악으로 커피와 콜라를 얼린 ‘얼음’
  2. 자칭 환경 운동가: 20여 개의 텀블러 보유
  3. 주머니 속에 쑤셔 넣은 ‘커피믹스’
  4. 중얼 거리는 ‘혼잣말’
  5. 공용 냉장고에 꽉 채운 ‘케이크’
  6. 공용 전자레인지 코드 뽑고 충전한 무선 ‘헤드셋’
  7. 사용한 걸 버리지 않고 쌓아둔 ‘종이컵’

누가 가장 싫습니까?

룰은 간단하다. 하루에 허락된 탕비실 체류 시간은 100분이고, 목표는 술래를 찾아내는 것이다.

술래에 관한 흰트는 규칙을 위반하면 제공된다.

마치 언행을 분석하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세상 속 작은 세상에 온 기분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쉽지만 정말로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건 어렵다.” 저마다 기준과 잣대로 결론을 내린다.

같은 상황을 겪거나 관찰할 때 어디에 초점을 맞췄는지 제각각 다르다. 여러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실 술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반전을 기대했다. 다소 얇은 서적에 긴장감과 몰입감 그리고 세세한 심리적 단서들을 충분히 녹여내기엔 어려워 보였다. 그래서 술래를 찾지 못했다. 적어도 내 눈엔 보이지 않았다. 허구의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고, 일상에 늘 함께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상기 시켰다. 의문이 들었다. 부도덕한 행동을 보며 그들을 질책하려는 걸까? 주변인에게 피해주지 말고 올곧게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담겼나? 자신의 대인관계를 돌아보고 자아성찰을 하라는 의도였을까?

3자의 입장에서 나와 너를 보게 되었다.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개인주의, 의심, 질투, 욕심, 불만, 이익 실현, 무모한, 암묵적 룰 파괴 등 단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사회가 원래 그런 것이라며 다독이는 마음과 한편으론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물으려 하지 않았다. 당사자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시도할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대의 결이 스친다는 상상만으로도 불쾌감 지수는 고점을 찍을테니까. 간단하면서 복잡한 질문과 모르는 듯 알 수도 있는 정답으로 둘러싸인 기분이다.

어떤 사람을 곁에 누구를 두고 싶은가? 내가 그리고 있는 상사나 동료의 모습은?

그럼 내 모습은?

싫고, 좋고, 그냥 그렇고.

밤의 공항에서

더 깊은 여행으로 이끈다. 저자의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통찰을 경험케 한다.
그런 뒤 행복, 저녁, 그릇, 세상, 여행, 어른, 열정, 후회, 걸음, 내일 ˴˴˴ 여러 단어를 조합하고 나열해서 인생의 빈칸을 채운다.
어딘가에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도 문을 열고 나가 모험을 하는 모습이 꼭 나 같다. 더욱 마음이 가고 애정이 쌓였다.
불특정 장소나 관광지가 아닌 여정의 서사를 알고 나니 작가의 그릇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담았고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이 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내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는지.”

“남한테 신경 쓰며 이것저것 맞춰 주다 보면 제 스타일만 망가집니다. 스텝이 엉키고 리듬이 흐트러져 버리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방식대로 하세요,”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그릇을 가지고 있다. 20대와 30대에 이 그릇을 최대한 넓히고 많이 담아 둬야 한다. 나이 들면 이 그릇에 담긴 걸 꺼내 먹으며 살아야 하니까.”

틈이 없는 톱니바퀴는 멈춰버리고 만다.”


“세상은 우리가 다가가지 않으면 진면목을 보여 주지 않는다. 저질러라. 그다음에 생각하라.”

“얘야, 여행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 얻을 수는 없다는 걸 가르쳐 주지. 하지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얻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도 가르쳐 준단다. 그러니 계속 걸어가렴.”

그 속에서 나도 마음에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도 생겨났다. 공책 한 장을 가득 채웠다.
인생의 진리와 정답을 탐색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세상에는 정말 뾰족한 해답을 가질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걸 체득했다.
옳은 길로만 걸어가고 싶은 시기였는데, 이 책은 내가 미궁 속에서 허우적댈 때 어느 길의 중간마다 띄엄띄엄 서있는 소나무 같았다.
조언이나 안내를 해준 건 아니다. 그저 쉼을 제공해주며 다른 형태도 존재한다고 내 어깨와 나란히 맞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뭐가 그리 조급하고 불안했는지 과거의 습관은 싹 잊고, 현재에 충실하도록 하루라는 카드를 선물 받았다. 더 가지고 싶지만 더 가질 수 없는 하루라는 카드.
이것만으로 닮고 싶은 마인드를 지녔음을 알 수 있었다.
순간마다 감사하기로 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여러 문장들을 더듬어 갔다.
나는 다른 얼굴을 갖게 됐고, 깊은 눈빛을 지니게 됐다. 계속 걸어가기에 그만하면 충분했다.
이런게 삶의 모형이 아닐까?



부의 역설 (생각은 내가 하고 행동은 뇌가 한다)

나는 1000억을 벌 것이다.


잠재의식과 사고는 정신 작용을 넘어 신진대사에도 깊게 관여하는데, 뇌는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중심축으로서, 우리의 감정과 에너지 흐름을 조율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뇌를 의지대로 컨트롤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자주 생각하는 순서대로 일을 처리할 뿐이다. 결국 내가 영어 공부를 자꾸 미루는 것도, 내가 독서나 디자인 작업, 운동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었음을 인지한 순간이었다.

뇌가 에너지를 분배해줬을 뿐인데 기분까지 바뀌는 이유는 우리의 의지가 뇌의 판단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반복하면 뇌의 생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내면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면 행동을 실행하는 에너지 예산을 충분히 집행해주고 활력을 만들어줄 것이다. 즉, 미루는 습관은 뇌가 ‘그것은 나의 생존에 중요하지 않아’라고 여기고 있다. 의식적으로 해야 할 것은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통해 뇌를 바꾸는 것이다. 아주 작은 생각의 전환은 뇌의 판단 체계를 바꾸고, 그 변화는 삶에 방향을 바꾸는 거대한 파도를 일으킨다.

개인적으로 입시를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구체적인 대학교명을 거론하며 합격 기원하길 바라는 내용으로 기도했다. 입시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불안이 엄습할 때 희망하던 대학 순위는 점차 내려갔다. 그 속에서도 변치 않았던 굳은 의지는 “4년제 인서울 대학에 합격해서 재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믿음이었다. 놀랍게도, 결국 모든 일이 내가 믿은 대로 이루어졌고, 지금은 3학년으로서 대학 생활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 모습을 돌아보면, 생각은 결국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부자의 뇌를 지녀야만 부자가 될 수 있다.”

사고방식과 신경회로가 현실을 창조한다는 과학적 근거를 가진 주장이다. 신경과학에서는 우리 뇌가 경험과 생각에 따라 변화하고, 심리학에서는 시각화와 자기암시가 실제 행동 패턴의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이 존재한다. 원하는 모습에 집중하고 ‘성공한 나‘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를 그리며 지속적으로 상상하고 몰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만큼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반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영화관 기법, TOTE(Test-Operate-Test-Exit)모델, 성과 중심 사고방식과 같이 불필요한 것들을 비우고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감각을 프로그래밍을 삶의 태도에 적용한다면, 그것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연결되는 당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해도 당신이 성공한 모습에 대한 생각과 상상은 절대 포기하면 안된다.”

책을 덮으니 경제적 자유와 내면의 풍족함을 쌓는 지혜의 문장들이 내게 남았다. 

마음의 여섯 얼굴 (우울, 불안, 분노, 중독, 광기, 그리고 사랑에 관하여)

인류가 삶을 마주할 때 드러나는 보편적인 얼굴과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한 책이다. 우울에서 시작해 사랑에 이르기까지- 불안, 분노, 중독, 광기를 거쳐 흐르는 감정의 배열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인간이 심리적 고통을 지나 회복과 연결로 나아가는 내면의 여정을 담고 있다.

“해부학적으로 보아도, 뇌에서 감정에 물드는 경로는 자연스럽고 풍성하다.“ 감정은 특정한 하나의 회로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우울이라는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우울을 ‘어둡다’, ‘고립되었다‘는 말로 단순화하지만, 뇌 속에서 우울은 고립된 감정이 아니다. 편도체는 과활성화되고, 전두엽의 기능은 저하될 때 뇌는 위협과 불안을 과도하게 감지하면서도 이를 이성적으로 다루지 못한다. 그 결과 사람은 현실보다 더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이때 내부에서 끊임없이 ‘연결하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불안정한 감정의 파동은 개인을 넘어, 지금 이 시대를 흔든다. 지금 우리는 ‘불안의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제는 불확실하고, 관계는 느슨하며, 미래는 지나치게 유동적이다. 소셜미디어는 타인의 일상을 비교하게 만들고, 끊임없는 선택과 경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늘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한 불안’을 안고 살게 만든다. 이 불안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만연한 정서의 유행처럼 퍼졌다.

결국 분노와 광기의 문을 열 수 있는지를 조용히 직시하게 만든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분노를 ‘리비도(욕망 에너지)의 좌절에서 비롯된 공격성’으로 보았다. 억눌린 감정은 무의식에 쌓이고, 그것이 해소되지 못할 때, 자아는 외부 대상에 그 감정을 투사하거나 전이하게 된다. 즉, 원래는 나를 향했던 좌절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바뀌는 것이다. 분노는 이렇게 나를 보호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이자, 억압의 부작용이다.

분노는 결국 감정을 더 이상 품지 못한 자아의 비명이다. 억눌린 감정이 외부로 튀어나오고, 그것조차 제어되지 않을 때 사람은 내면의 허기를 숨기려 중독에 기대게 된다. 그리고 그 끝, 감정이 말로도, 행동으로도 다 표현되지 않을 때 우리는 광기를 마주한다.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언어를 잃고 터져나올 때, 인간은 현실의 틀을 벗어나고 만다. 광기는 무너짐이지만, 어쩌면 가장 절실한 생존의 몸짓일지도 모른다.

이후의 사랑은 상처를 지닌 존재들이 다시 세상과 연결되려는 감정의 회복점이자 출발선이다. 『마음의 여섯 얼굴』은 말한다. 인간은 무너지고도, 다시 사랑을 찾아 나선다고. 사랑은 완전한 상태에서 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부서진 마음들이 다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때 시작된다. 

사랑은 가장 오래된 감정이지만, 가장 회복적인 감정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사랑을 감정의 종착역이 아닌, 다시 감정의 회랑을 순환하게 하는 다정한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우울에서 불안으로, 불안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중독과 광기로 이어진 감정의 여정은 결국 사랑 앞에서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다짐이 된다.

이처럼 “감정은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직관을 가장 빠르게 직접 전달해주는 전령이며, 이성적 사유 자체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다.” 따라서 우울은 불안으로, 불안은 분노로, 분노는 중독과 광기로, 그리고 마지막엔 사랑으로 가는 감정의 연쇄 속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이는 정서적 회랑이며 삶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의미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

마지막 여정으로 나아가는 사랑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 삶에 있어 필연적이면서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디딤돌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뇌피셜이 존재했다. 그런데 사랑은 단순한 연결과 기쁨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도 다시 손을 내미는 감정이었다. 결핍과 고통을 껴안고 타자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행위였다.

무너진 마음의 잔해 위에 피어나는 감정이라 더 특별하다. 상처는 회복되고, 다시 세상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포되기 때문에 감정을 회복하려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즉 부서진 채로도 여전히 타자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의지 그 자체다. 그 의지는 단순히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어둠과 약함까지 조심스레 꺼내어 누군가 앞에 놓는 일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랑은 맨몸으로 타인 앞에 서는 가장 용기 있는 감정이며, 가장 조심스러운 고백이 된다.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사랑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리비도 에너지의 건강한 방향 전환’이라 말한다. 자기애에 머무르던 감정이 타인을 향해 이동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아의 경계를 넓히고 세상과 다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사랑은 관계를 맺겠다는 감정적 선언이자, 두려움을 안고 건네는 손짓이다. 또, 뇌과학의 언어로도 사랑은 특별하다.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 사랑의 순간마다 뇌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신경화학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사랑하는 능력을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경계와 다른 사람들의 경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경계 주변에서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타인을 침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먼저 나의 한계를 이해하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타인의 경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해보다는 기다림이고, 소유보다는 머무름이기에 가장 약해졌을 때, 가장 약한 감정으로 가장 강한 선택을 해야 하니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문득, 사랑이 감정의 종착점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게끔 하는 시작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과 불안, 분노와 광기까지 지나온 사람만이, 더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말. 결국 감정의 끝에서 사랑은, 감정이 우리에게 허락한 가장 인간다운 얼굴이었다.

”사랑을 놓지 않을 힘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한다.“

이방인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이 작품을 읽고 독서토론을 진행하였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 책 속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왜 이방인이라고 불리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쪽에 가까웠다. 단순히 사람들이 이 인물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방인으로 불리는 것이 맞을까? 사람들이 규정해둔 일종의 보편성을 수행하고자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가 이 책을 읽는 데에 가장 중점이 되었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토론에서 두드러졌던 주요 주제는 나는 뫼르소보다 나은 인간인가?’ 였다. 이 질문을 두고 독서 클럽의 조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과정에서 뫼르소의 솔직함에 집중하였다. 뫼르소가 사람을 살해한 것을 제외하면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뫼르소보다 나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 의견에 일부 동의하면서도 소위 말하는 보편적인 도덕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주인공의 행동이 타인에 대한 배려를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뫼르소보다는 나은 인간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사회성을 겸비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가 타인을 배려하는 만큼 나도 타인에게 배려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암묵적인 룰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범죄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물론 작품 속에서 뫼르소는 타인에게도 배려를 받기를 원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 역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지만 뫼르소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은 오로지 사회에서 그만 이방인을 담당했을 때 성립 가능하다. 만일 모든 사람이 그처럼 행동했다면 그 사회는 결과적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베르 카뮈가 당시에 살았던 시대상, 그 시대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상실과 회의감. 이 작품은 현 시대의 사람들보다는 당시 쓰여졌던 그 시대 사람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작품이라기 보다, 당시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을 보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뫼르소의 재판장면에서 유일하게 연기를 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했던 사람은 뫼르소 한 명이었다는 점이었다. 한 명의 학생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과연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는 이 작품이 왜 가치있는지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