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창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을 때 정작 나는 이 책을 찾지 못했다.
엄청난 인기에 모든 서점에서 품절이었고 그나마 e-book으로 나왔길래 뒤늦게 읽어볼 수 있었다. 사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었고 노벨 문학상 수상 책조차 처음 접근하는거라 많은 기대와 함께 책의 내용이 많이 낯설며 어쩌지 했다. 소문으로 여러 이들의 평을 들었지만 모두 해괴하고, 난해 하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읽는 내내 나의 기분은 묘했다. 이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노벨문학상에 대한 의문점이 생길 것 같았다.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모두 깨우쳐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노벨문학상의 가치가 있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읽는 것이 문학일 때도 있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의미와 숨은 뜻을 찾아내는 것도 문학을 즐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초입 내용은 신비로우면서도 거무튀튀한 현실 냄새가 풍겼다. 누리끼리한 필름에나 나올 것 같은 고전 독립 영화 같은 그림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축축하고 비 냄새 가득할 것 같은 소설 속 도시는 주인공 영혜의 첫 인상은 채식주의자라고 느껴졌다. 채식주의를 하는 사람이 주변에 몇 명 있었는데 조용히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가치가 아니라 그 가치를 지켰을 때 ‘ 나 ‘ 의 모습에 취한 이도 있었다. 나는 후자의 사람을 정말 싫어하기에 영혜의 그 초입 부분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들이 솔직히 조금 호들갑 이라고 느꼈다. 어떻게 보면 영혜 남편의 기분이 무척 이나 잘 이해되고 공감 되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면 결혼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한 그런 황당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을 거다. 하루아침에 내가 알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 불편하고 억지스러워서 짜증 난다. 하다 못해 집안에서만 그러는 것도 불편한데 공석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우기며 나를 창피하게 하다니 끔찍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했음에 짜증이 나면서도 굉장히 슬퍼 했을거다. 이때까지 나와의 모든 삶은 거짓말이었나 하고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또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했는데 저 사람을 놔줘야 하는건지 두렵고 화가 났을거다. 영혜 남편이 정말 영혜를 사랑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맺은 가족이 이렇게 쉽사리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진다면 영혜 남편도 위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혜 집안 내용에서 아버지는 굉장히 엄하다. 엄한 가정에서 자라온 딸아이는 굉장히 소극적이고 위축되어 있으며 또 순종적일 확률도 높다. 영혜는 따라야만 하는 삶이 답답했을까? 그래서 마음 속 묵혀왔던 고통들이 그렇게 채식주의로 터져 나온걸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병이 생기면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을 한다. 그 병은 가정폭력으로 생긴 걸수도 있고 사람간의 관계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생길 수도 있으며 각각의 이유가 있다. 표현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폭력에 고통 받았던 이들은 폭력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영혜는 폭력에 지쳐 그 폭력조차 표현하기 무서운게 아닐까 싶다.
 중반 내용은 내게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해야 하는데 의미를 찾기엔 변태 행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속에서 또 폭력을 저지르기 싫다던 영혜가 불륜을 저지르며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것을 보며 인간은 하지 않고자 해도 폭력을 저지르는 존재인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조심하고자 몸을 웅크려도 웅크린 팔 아래로 또 누군가 피해를 입을 때가 있다. 우리가 조심하고자 무언가를 금지하고 피하면 또 그곳에서 피해가 생기고 소리가 나온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지구에서도 늘 그런 존재다. 태어나고 존재 자체가 죄악인 것 처럼 이 지구 위에서 저지른게 너무 많아서 이제는 조심하고자 해도 그마저 피해를 일으킨다. 이 모습을 채식주의자라는 영혜를 이용해 비웃는듯 했다.
지금 사회의 갖가지 폭력을 이 책이 말하는 거라면 나는 이해된다. 폭력에 폭력을 낳고 폭력을 하지 않고자 해도 그마저 폭력인 존재 자체가 민폐인 인간의 삶, 우리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환경에 민폐를 끼치고 함께 사는 세상이라며 사회성을 기르고 모든 생명과 공존해야 한다고 하지만 서로를 헐뜯고 미워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세상에서 우리를 서로가 미워할 수 있을까. 해결 할 수 없어도 이런 우리의 모습을 깨닫기라도 해줄 수 있는 책이다. 

백광

이 책은 한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린 이야기다.
한 집안의 아이가 앞마당에서 시체로 매장된 체 발견되며 가족들과 그 주변인들에 대해 조사가 시작된다.
자신의 일과보다 서로의 일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어찌 보면 과할 정도로 잘 알고 있기까지 한다. 
인묻들의 관계와 알리바이를 따라가다 보면 드는 생각은 ‘ 그래서 누가 범인인데?’ 이다. 새로 떠오르는 알리바이는 또 허무하게 끝나며 다음 사람의 알리바이로 연결된다. 그러나 전혀 아이와의 죽음과는 연관이 먼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 간의 증오,미움,결핍이 가득한 관계가 수면 위로 차츰 윤곽을 드리우고 결국 그것이 사실은 아이의 죽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집안의 증오와 미움은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왔다. 새로운 관계가 생길수록 미움이 싹트고 대화로 해결 한다 같은 쉬운 시도 없이 침묵과 혼자만이 끌어가는 것으로 마음의 병이 된다. 모든 가족이 그 병을 마음에 짊어지고 있었다. 

 살면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한 명은 꼭 있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미워한 건 아니다. 사람 간의 불화는 당연히 생기지만 그것을 말로서 풀어내지 못 했을 때 용서할 수 없는 미움이 된다. 시도를 했지만 실패 할 수도 있고, 시도조차 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다 진실에서 멀어져 더 깊고 짙은 미움으로 변질된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과의 대화를 통해 객관적으로 깨닫기 전까지는 그 미움의 진실을 들여다 보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내 미움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사회에서 비난 받을 정도의 큰 잘못을 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죄 값을 충분히 받거나 혹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도 미워할 것이 분명하기에 미움의 정도가 짙지 않다.
 이 책에서도 사회에서 비난 받을 관계가 있고 그에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 유키코와 히라타,류스케 이 세 명은 불륜 관계이다. 엄연히 따지면 유키코라는 여자 하나가 두 명의 남자와 바람을 피운 것이다. 본 남편인 다케히코는 그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고 분노하는 사람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문드러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관계에 분노함에도 자신이 지켜야 하는 ‘ 가족 ‘ 이라는 관계를 위해 말하지 않은 것이다. 사토코 또한 류스케의 불륜을 알고 있음에도 발설하지 않는다. 그녀 또한 자신이 발설하기 전까지는 ‘ 가족 ‘ 이라는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괜히 평화로움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다케히코는 불륜을 저지르는 본처에 이미 마음이 뜬지 오래였고 본처에 비해 조신하고 조용한 사토코를 마음에 둔다.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랑은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관계에 한정되면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주저없이 드러내고 행동한 이들과 또 이를 여러 이유에 있어 드러내지 않은 이로도 나뉜다.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왜 이런 관계가 되어야만 했을까, 혹은 조금 더 좋은 방법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서로가 원하는 연인이 아닌 상태였다 해도 지금의 어지러운 불륜 관계가 되지는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마음을 온전히 다 드러낼 수 있는 사회라면 얼마나 속 편하고 좋을까.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사회 속에서 자라나며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함을 배운다.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자가 약자고 패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이 어른들은 드러내고, 행동하며, 서로의 관계가 어떤 상황을 초래할 것인지 예상치 못한다. 그 밑에 본인들이 저질러 놓은 생명체들이 어떻게 꿈틀거리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 문화 센터 ‘ 의 기능도 관심을 주는 척 하는 이들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문화 센터를 데려간다는 이유로 나는 충분히 아이에게 배울 기회와 놀 기회를 주고 있고 부모로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실제론 머릿속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이런 어른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온전한 환경에서 자랄 수 없다. 기괴하고 오싹한 미움이 가득한 집안에서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 아이들은 그 기운을 알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순진하기에 우리보다 더 근원을 잘 들여다보며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니까 그 어른들의 기행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미움 받고 싶지 않지만 잘 미워한다. 감정에 도달하기 까지 갈림길이 없고 일직선만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잘 미워하는 시기의 어린 아이들에게 미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 또 미워하기 전 까지의 수많은 선택지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어야 한다. 그걸 알아야지 아이들은 서로가 밉더라도 한번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아이가 되고 자신이 싫어하는 부분을 이야기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소통을 할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이 소설 속 아이들은 어땠을까? 나오코와 가요는 두 엄마의 관계 아래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녀야 하고 매 시간 붙어 있는다. 가요가 나오코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어른들처럼 복잡한 사정은 없다. 어린아이기에 싫어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가오는 나요코가 매장되어있던 흙 위에 올라서며 그 밑에 살아있는 생명을 끝내 확실하게 짓밟았다. 보통의 아이들은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워하기 때문에 사라져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녀인 나오코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매장을 한 게이조. 그는 이 소설에서 불행의 시작이라 말 할 수 있다. 오래전 전처에게 배신당한 기억에 괴로워 하며 섬에서 소녀를 죽인 것을 숨기고 재혼을 하고, 괜찮은 척 하지만 가면을 쓴 체 시작한 이 가정은 결국 불행을 맞이한 것이다. 아들의 불륜을 책임지고 벌해 달라는 처의 말에 괴로워하며 결국 온전치 못한 정신 속에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사토코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게이조에게 나오코에게 해를 가할 것을 재촉하고 아이의 죽음을 외면한 사람. 불행의 끝이라 할 순 없지만 결국 나오코의 죽음으로 집안의 불행이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며 나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우리는 언제나 말해 온 것이 있다. 가정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아이를 부모가 잘 가르쳐야 한다. 부모가 아이를 잘 통제 해야 하며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고 말이다. 아이의 잘못은 모두 부모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어른도 한 때 아이였을 거고 그들도 그런 어른이 되고자 하고 된 것이 아닐 거다. 그 어른들이 어린이였을 때 또 그때의 어른들이 일 순간의 무관심과 방치가 결과를 만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즈음에 완벽한 아이를 완벽한 어른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알 수 없고 기약할 수도 없다. 그 어떤 무지막지한 신기술이 나오고 효율적인 교육 방법이 나온다고 해도 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그런 아이도, 그렇게 잘 크지 못한 어른도 모두 마음 넓게 포용해주고 다독여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다독여주고 기회를 줌으로서 그들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주어야 한다. SNS 속에서 서로의 잘못을 뼈가 드러나고 그 사람이 생을 마감 할 때까지 헐뜯고 물어 뜯는 지금의 사회는 분명 부드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이 서로의 잘못에 빠져 그것을 묵인하고 혹은 미워하며 우리의 미래가 될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그런 잘못을 한 어른과 아이들에게 너그러워질 수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뇌는 행복을 기억하지 않는다 (뇌파 실험으로 밝힌 불편한 감정의 비밀)

행복하기에도 모자른 하루에, 행복을 기억하지 않는 뇌라…
스트레스와 부정적 생각에는 쉽게 반응하는 뇌가 긍정적 생각과 행복에는 둔감한 뇌
그런 상황에서도 뇌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긍정적 자극을 줘야겠다, 이쁜 것만 바라보며 나아가야겠다 다짐한 !!
왜냐면, 행복한 생각만 하기에도 하루는 짧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