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페어 컬처란 오늘날의 과소비 사회가 쓰고 버리는 태도에 저항하는 운동의 출발점이다. 과거 증기기관차가 탄생하면서 세계는 거대한 성장을 이루는 산업혁명을 거쳐 지금의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우리가 잃어버린 지식과 능력은 무엇이 있을까? 그 중 하나의 예로, 일체형 디자인이 도입하면서 일부 부품의 결함은 전체를 갈아엎어 무분별한 자원의 낭비로 이어지게 하는 기이한 상황을 발생시킨다. 즉, 기업은 우리를 수리ㆍ수선에서 멀어지게끔 자리 잡았고 그 속에서 적응하고 망라한 소비자들이 넘쳐난다는 의미다. 그렇게 만들어진 산물은 고장이 난 제품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사고 회로를 돌리게 유도하며, 나 또한 구멍난 양말을 보곤 바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듬어 보니 자원으로서의 풍족함에 기댔던 것 같은데 이러한 개인의 특성들이 모여 집단이 되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는 현시대를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지속가능한 경제가 과거부터 꾸준히 거론되는 이유 역시 유한한 자원을 지닌 지구에 속해 시스템을 바로잡아야 하기에 이와 관련이 있는데, 저자가 주는 시사점을 개괄해보면 이전의 문화를 다시 익힐 시간이라는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시대가 그만큼 많이 바꼈다. 오늘날의 광고는 매일같이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은 어떤 욕망을 보여주려 한다. 내 손에 쥐어진 게 아닌 것들을 바라보게 만들고 충동적인 소비를 갈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번 독서를 통해 창조를 기반으로 한 성장이 아닌 내가 현재 지닌 무언가를 활용해서도 성장이 가능하다는 이론을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것은 환영 받겠지만 오래된 것을 사랑하는 자세로 나를 둘러싼 사물을 대해보는건 어떠한가? 그 태도가 자신을 대변해 줄테니 말이다.
호감의 시작(트윙클 에디션) (관계, 일, 인생이 풀리는 매력의 법칙)
건강한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약점과 나약함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골든 올포트의 말처럼, 모든 면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각기 다른 매력 재료를 꺼내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셰프가 된 것처럼 인생에도 프로듀싱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동감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나’라는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고찰을 경험하면 자기객관화된 성장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언제 가장 행복한지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시간이 중요하듯. 본연의 색감을 파악하고 이를 도화지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본인에게 달렸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틀과 툴인데, 내가 지금껏 살아온 환경과 사용하는 능력만을 고수한다면 나의 발전 가능성을 차단시킬 우려가 존재한다. 한 가지의 색상만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면서 잠재적 팔레트의 유무를 찾아 나서게 된 계기가 된다. 불확실성 속에 불안을 바라보기 보단 섬세하고 따뜻한 용기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 독서를 하며 제목에 이끌려 집어든 내면의 본질과 함께 지혜롭게 인간관계 형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사랑받길 원하면 사랑하라.“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기후정의선언 (우리는 실패할 권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가한 손상을 보수하는 것은 인간의 소명입니다.
“우리는 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소비는 실질적 수요를 맞추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수요를 창출하고 촉진하는 수준까지 발전했습니다. 결국, 성장은 더 많은 물질을 욕망하고 축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80%는 G20이 배출하지만 정작 기후 피해의 약 75%는 빈곤국에서 발생합니다. 전세계 인구 10% 부유층은 온실가스 52%를 배출하는데, 7% 배출하는 빈곤층은 기후위기를 피해갈 방안도, 대책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현실입니다. 소수계층의 단기적 이익 창출의 중시로 공공자원이. 지구적 권리가 무너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 깨어진 천명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기후난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시리아 난민 문제는 2010년 러시아 가뭄에서 시작했는데 밀 생산이 줄어들자 수출을 중단했고, 그로 인해 폭동이 번져 내전으로 치닫았습니다. 국제 사회는 400만 명이라는 시리아 난민을 수용할 수도, 해결하기에도 버거우며 식량 안보 문제는 전세계적으로 대단한 파급을 미칠 것입니다. 2001년부터 인식했던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정책이 실질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며, 우리 모두 답을 알고 있지만 과학을 무시하며 합리적 선택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과학자가 내린 뻔한 결말에 가속이 붙어 재앙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바라만 보고있습니다. 조금 과격하게 말했다지만 현실입니다.
현대 사회의 인류 문명 위기는 자연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풍족한 삶으로 나아가려 지구에 상처를 냈지만 회복할 수 있는 시점은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팽배해진 경제를 끌어안고, 두둥실 떠올라 마치 여행하는 듯 미소를 띄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단상
사랑의 담화에 이성을 꼬집은 담론을 문형이라 부른다. 알렝 바르트는 언어학 용어를 빌려 통사론적 곡조로 치부하는데, 문형도 어둠속에서 분절된 언어의 주름으로 출발한다는 시구가 문형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사랑이란 모형을 미학적인 어구로 풀어헤쳐 배열하는 양상을 띈다. 마치 “근사해!”란 동어 반복으로 결핍을 넘어 하찮은 것까지 매료되는 포용의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난 널 사랑해’는 새로운 뉴런 입자를 도출하는 선상을 경험케한다. 한쪽에는 ‘나’가 다른 한쪽에는 ‘너’를 교착하는 그 중간에서 애정의 교착어 ‘사랑해’가 고착되어 있다. 이 문장의 유형은 하나의 완전한 언표도 언술 행위도 아닌 발화라 부를 것인데, 속에 욕망 억압 기대가 내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능동적인 기호 아래의 관점에선 추신자와 발신자 사이의 행위로써 사랑의 원형을 변형 없이 표현 받고자 함으로 치부된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이지 대상이 아니다. 상상계를 위했던 이미지와 욕망적 추상의 혼성으로 부재한 틈을 채워주기에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고 베르테르는 주장한다. 그러한 사랑을 얻기 위해 바치는 고통과 찬미의 총체적 형상은 하나의 역전을 이루며, 독창적인 관계를 쟁취하여 우리라는 형상으로 발전한다. 고뇌를 거친 엄숙함의 크기와 감각을 조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과학적 기술로 측량 불가하며 내가 지금껏 했던 사랑은 무엇일까 하며 숙명적 정체에 관한 탐색과 세밀한 분석으로 이어졌다.
또 나는 오늘 그 사랑을 위해 감정의 윤곽을 그려 이성을 소모한다. 그리고 그 단상 위에 처염하게 앉는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시집)
음미해 보는 시도와 다소 난해한 활자 그 중간에 끼임과 동시에 내 머리에 들어있던 전구 하나가 번뜩 켜진다. 청춘의 기습을 낭독하니 가슴 한편이 쿡쿡 찌르는 듯한 미세한 아픔을 느꼈다. 주워 담았는지 어디서 흘렸는지도 모를 손아귀 모양의 한탄 바구니를 든 채 쏜살같이 나만 백스텝을 자처하는, 버리지도 그렇다고 들고 다니지도 않을 책망으로 뒤덮이던 그날이 떠오른다. 물론 지금은 뿌리친 고역으로 단단한 새벽을 맞이하고 넘어야겠단 마음 하나 우두커니 새겨. 모양새가 달라졌지만 나 만큼은 알아볼 수 있는. 돌아보니 거침없이 내던졌고, 불태워진 밀알 한 줌은 되었을까 싶을 때 견고해진 태양이 저 너머 지평선에서 올라온다. 그동안 끌어안았던 것은 무엇일까, 두 번째로 만난 지구 서랍을 보며 느낀다. 지구에 한 발 내딛으며 귀함을 보탤 거라고 잠시 아픔을 잊어도 된다고. 허나 너무 잊진 말라는 궁리를 한다. 그렇게 주름진 귓가에 속삭였는데 말랑해진 공기 틈으로 아직 아물지 않았던 자국은 고개를 돌려도, 스쳐만 봐도 알아. 내가 그걸 헤아린다고 해서 누군가 덮어 놓은 얼룩을 말끔히 지울 수나 있나 싶어. 그걸 너도 원하는지. 그렇지만 마지막 밤의 골짜기를 무엇으로도 채우고 싶지 않았다. 가득 차 만족하는 모습이 완전할까 했는데, 두둥실 떠다니는 문장들을 비벼 실로 꼬아 까만 하늘 잠시 봉제해 둔다. 그 순간에도 과거에 넋을 놓아 무엇이라도 되랴 다단한 실 뭉탱이 움켜쥐고, 일말의 물음 없이. 여기까지 아득히 여백뿐인 청춘이었다.
소년이 온다 (한강 소설 l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그날의 총성은 고귀하고 보물 같은 시절을 가르고 달려 고요히 눈을 가렸다. 앳된 나이에 경험한 침묵의 숨결, 시뻘건 눈빛과 총구를 겨누던 차가운 몸뚱이를 뚜렷하게 기억할 수밖에. 세찬 비를 맞아 씻겨 내려가던 끈적이는 피와, 절대로 씻을 수 없는 것. 이렇게 두 가지가 존재한다. 그건 지금도 유효하고. 잔폭스러운 기억은 광장과 골목 곳곳에 거닐면서 안타깝고 암울한 소식으로 전해져. 그들은 못다 한 생을 생각해서라도 태양이 되어 익살스럽게 웃는다거나, 어쩌면 마른 낙엽잎이 떨어지더라도 다시금 새 순이 돋아날 수 있는 거름이 되어 현재의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지도 모른다. 하여 무엇을 지키며, 무엇을 위해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지 낱장에 스며든 이들의 처절한 신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텅 빈 가슴으로 관조하려니 들끓는 분노의 밑바닥을 바라보게 한다. 짐승의 머리를 한 거대 생물은 역겨운 냄새를 풍겼고, 그 주변은 숭고한 희생으로 물들어 고요히 막을 내린다. 이로써 이들에게 앗아간 것은 정신없이 흘러내린 고통의 세월이다. 스위치 누르듯 한 번에. 그것도 캄캄히. 과거형으로 끝나는 문장들처럼 다시 실상에서 볼 수 없게끔, 그 시절에 뭍은 별들은 뿔뿔이 흩어져 그래야만 하는 간절함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다.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아픔은 아물지 않을 테니. 이윽고 그 끝에 남겨진 가족들은 먹고 마시고, 읽고 만나도 허기를 느낀다. 눈을 꼭 감은 혼들은 지금쯤 서로를 알아보았을까.
13계단(밀리언셀러 클럽 29)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작품의 주인공 미카미 준이치는 사람을 실수로 죽여 감옥에 가게 된다. 사건의 경위는 단순하지 않았지만, 준이치의 과거 전력과 사회적 편견이 그를 가혹한 처벌로 몰아넣었다. 준이치의 이야기는 개인의 실수가 어떻게 사회적 시스템과 맞물려 더 큰 비극을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사건의 전말이 단순한 방어 행위였음을 알게 된 독자는 준이치에게 내려진 형량이 과연 공정했는지 고민하게 된다.(물론 끝에 반전이 있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랬을 것 같다.)
교도관 난고 쇼지의 시선은 사형제도의 본질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사형 집행관으로서 그는 법을 집행하는 단순한 행위를 넘어 인간적 갈등과 도덕적 딜레마를 겪는다. 첫 번째 집행에서는 피해자 가족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을 정당화했지만, 두 번째 집행에서는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을 사형시켜야 했던 딜레마에 빠진다. 난고의 경험은 사형이 단순히 정의의 실현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폭력의 반복일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준이치에게 누명을 씌우고 사건을 조작한 사무라 마츠오는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교훈으로 사형제도의 필요성이 누군가 대신 응징을 하여 복수의 연쇄를 끊는 것이 목적이라는 견해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제목인 13계단은 사형수의 마지막 계단과 사형이 집행되기까지의 절차를 상징한다. 소설은 준이치와 난고, 그리고 사무라 마츠오의 이야기를 통해 사형제도의 존재 이유와 문제점을 탐구한다. 또한 저자의 심도 있는 자료조사는 사형제도에 대한 존폐여부를 고민하게 한다.
13계단은 소설이라는 형태를 통해 넘어 정의와 형벌의 목적, 그리고 사형제도에 대한 여러 관점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만약 사형제도와 형벌 그리고 교화에 대해 관심있다면 읽어볼 만한 소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