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들의 전쟁 (기계와의 일자리 전쟁에 직면한 우리의 선택)

 저자는 미국의 제조업이 떠나간 한 지역을 소개하며 안정적인 근로소득과 삶의 질의 상관 관계에 대해 보여준다. 해당 지역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전직을 위한 재활 훈련을 받았음에도 절반 가량이 장기 실업자로 전락하며 알코올,마약,게임 중독자가 늘어나고 가정폭력이 증가하였다. 제조업에 종사하며 삶을 영위하던 계층의 결혼률 또한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계층에 비해서 가파르게 감소하였음을 보여준다.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수익성을 창출하는 대부분의 사업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사업이라는 현실을 보여주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으며, 하나의 해결 방편으로 기본 소득에 대한 여러 논의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키오스크 도입 등 이미 많은 종류의 일자리를 기계와 소프트웨어가 대체하고 있으며 Chat GPT를 통한 AI 상용화도 이루어 지고 있는 만큼 저자의 걱정이 빠르게 실행되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이런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앞으로의 삶을 전망하고 준비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실격

[읽게 된 계기]
친구들과 함께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솔직히 말 하자면 표지에 눈이 먼저 간 것은 사실.
[내용 및 줄거리]
나는 이 책의 가장 첫 번째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다. “부끄러운 일이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앞으로의 이 책 모든 내용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해 놓은 것이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첫 문장에 나는 바로 매료되어 그 자리에 앉아 완독을 하였다. 책을 다 읽은 후 왜 작가가 첫 문장을 그렇게 시작했는지 너무도 이해가 잘 되었다. 평생을 유흥과 성욕에 지배되어 살았던 삶이었기에 사실 저 문장 말고는 표현할 말이 딱히 없긴 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 책 내용 자체에서 다자이 오사무(작가)가 어떻게 주인공 요조에게 본인의 모습을 투영시켰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대표적인 공통점이 있다면 애인과 함께 동반자살했다는 것. 다자이 오사무도 이 책을 발간 후 결국 애인과 투신자살을 하였지만 책 내용 중 요조도 애인과 동반 자살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록 여성만 사망하고 요조는 살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주인공 요조는 어렸을 때부터 성적인 측면에서 원치 않게 노출이 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요조가 분명 다시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이때 기회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학교에 다시 보내진다면 돈 지원은 아버지가 다 해주실 거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았어야 했다.. 알았다면 요조의 남은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려서부터 인격장애를 지니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요조가 불쌍하고 죽기 전까지 평생을 가면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 같다. 
[느낌]
사실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꼭 읽어보라고 한 책이었지만, 나는 재미있기는커녕 내 마음이 함께 동요되는 기분이라 많이 찜찜하고 암울했다. 요조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무너진 상태였는지 글을 통해 상상이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에게 또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면 이 작가에 관한 생애 부분에 적힌 말이다. ‘인간실격’이라는 책이 다자이 오사무의 최대 업적이라는 것. 충분히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는 작가였지만 많이 아쉽고 마음이 착잡했다. 

아가미

어딘가 잘못된 사랑 속에서도 올곧게 살아가고자 하는 ‘곤’에게 그가 옳다고 말해주고 싶었던 책이었다. 
일그러진 애정과 그 안에 숨겨진 진심 모두 곤에게는 온전한 전부였음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곤에게 새겨진 상처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가 물에 흡수되지 않음으로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삶을 이어갈 명분이 되었다.
목 뒤에 새겨진 상처보다 내면의 상처가 더 깊게 아려올 때도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그것을 기억하고 사랑했다.
대가없는 도움, 사랑,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곤’은 그 누구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궁금해지고 사랑하고 싶은 아가미 소년을 직접 만난다면 어떨지 궁금하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구조주의 시대’라고 불리며 해석하면 ‘구조주의 이후의 시대’라는 뜻이다. 이것은 구조주의의 사고방식이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 속에 아주 깊이 침투해 있고 책을 읽거나 이론 공부를 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 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자명한 것’, ‘자연적인 것’, ‘상식’으로 수용될 만한 사고방식이나 감수성의 모습이 어떻게 성장해온 것인지 밝혀내는 것이기에 ‘자명한 일’을 더욱 거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선 911 테러의 발생과 베트남 전쟁을 구체적인 예시로 들어 ‘상식’에 관하여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 다른 나라의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고, 같은 나라 속에서도 지역과 세대가 바뀌면서 동일한 현상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상식이라고 간주했지만 그 상식에 관해 의심해 볼 여지가 있는 상황은 없을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 자체가 ‘구조주의적’이며 구조주의적 견해를 이용하지 않고는 구조주의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는, 출구 없는 무한 고리 속에 갇힌다. ‘어떤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라는 뜻이며 이는 구조주의 특유의 용어(시스템, 차이, 기호, 효과 등)를 말한다. 이를 ‘마르크스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하며 인간 주체가 자기가 누구인가를 ‘생산=노동’의 관계망 속 ‘행동’을 통해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로이트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하며 ‘억압’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인간 주체가 ‘자기는 무언가를 의식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화할 수 없다는 견해를 주장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른 시각화로 바라보니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않고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라는 구절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이는 어떤 시대와 지역, 사회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또한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에 부딪히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제가 될 일도 없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하지만 한정적인 문화를 지녔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만 있다면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주체가 되어 자율적인 판단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편견일 수 있으며 제한된 사고 속에서의 언행은 수용성에 대해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치부한다.

최재천의 공부 (어떻게 배우며 살 것인가)

최재천 교수님은 이 책의 시작을 한국교육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작하십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터무니없는 입시 공부를 해야만 했을 때 느꼈던 생각들과 같은 내용입니다. 현재 입시가 끝나고 어떻게든 대학교에 진학하여 한국교육에 대한 불만은 사실 많이 사라진 상태이지만,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한국교육에 대한 불안이 가득했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교육이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라지기 너무나 힘든 징병제처럼 한국에 너무나도 깊이 자리 잡아버린 현재 한국의 입시 시스템, 그리고 교육방식은 제가 할머니가 될 때쯤에야 겨우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학창 시절, 공부를 정말 싫어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등살에 떠밀려 강제적으로 공부해야만 했고, 공부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성적은 잘 나오는 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에 흥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고,  고등학교 내신을 준비하며,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라는 의구심이 머릿속에 차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들 다 하는데 왜 너만 그래”라는 시선을 보내왔고,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학생의 본분에 맞게 살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공부`를 정말 싫어했지만, `배움`은 좋아했습니다. 교육은 시험을 위해 나의 흥미와 관심을 모두 제쳐두고 공부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목표를 위해 배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제가 공부를 싫어하고, 공부에 노력을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공부와 전공을 배우고 자율적으로 학습을 하다 보니 제가 싫었던 것은 시험과 점수만이 목표인 상황에서 하기 싫은 강제적 공부이었습니다. 교육이란 참 중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은 숨쉬기 그리고 배우기 이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현재 한국에서 한창 자신의 희망과 꿈을 펼칠 학생들이 강제적인 시험위주 교육을 받는 것이 맞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최재천 교수님을 처음 유튜브로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증을 가져 봤을 법한 이야기들로 영상을 구성하시기에 매력적인 채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교수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운이 좋아 좋은 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고, 미국 주립대를 거쳐 하버드에서 교수 생활을 하실 수 있으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교수님이 어떻게 시간 관리를 하시는지 말씀해주신 부분에서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 관리`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24시간을 10시간으로 쪼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시간으로 쪼개는 사람이 있고, 1분으로 쪼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에 1분이 쌓이고 쌓이면 1시간이 되고, 그 1시간이 하루, 하루가 한 달한 달이 일 년이라는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꼭 실천해보고 싶은 시간 관리법이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을 일주일 전에 끝내는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실천하기엔 수능 만점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재천 교수님은 글을 3~4일 전에 송고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글을 말도 없이 고쳤다간 “네가 뭔데 내 들을 고쳐”라는 생각으로 정말 싸우신다고 합니다. 이것을 정말로 자신의 글에 자신이 있고, 엄청난 노력을 들여 글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재천 교수님이 글을 잘 작성하시는 이유는 마감 며칠 전에 일을 마무리하기 때문이고, 이는 바로 시간 관리 습관 덕분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주일 전에 글을 마무리해야지 일주일 정도의 퇴고 시간이 생기고, 실제 마감일 전까지 수정을 반복하여 잘 다듬어진 글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항상 과제를 일주일 전까지 하려고 마음먹곤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매번 마감 1시간을 놔두고 제출합니다. 이렇게 되면 과제의 퀄리티가 현저히 떨어지고, 과제에 대한 애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최재천 교수님의 시간 관리법을 생각하며 모든 과제와 공부를 일주일 전에 끝낸다는 생각으로 임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천 개의 파랑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천 개의 파랑’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함께 천천히 달리는 방법에 대해 배운다. 천천히 달리는 법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보경과 은혜, 연재의 세 명으로 이루어진 이 가족은 관계가 단절된 지 오래다. 각자 자신의 페이스대로 달리기에 급급한 것이다. 그들에게 여유를 쥐어준 것이 소방관과 투데이며 콜리와 지수이고, 가족들 서로이다. 인생은 혼자 달리며 살아갈 수는 없음을 ‘천 개의 파랑’을 읽는 내내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천천히 달리는 것이 꼭 하나의 인생이 될 터다.

사라진 후작

  표지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에서 뭔가 에놀라 홈즈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에놀라 홈즈는 이 책을 읽기 몇 년 전에 이미 시청한 영화였다. 물론 이 책에 대해 알지도 못 했다. 이 책 초반에 ‘에놀라 홈즈’가 주인공의 이름이란 게 나왔을 때, 이 책이 그 영화의 원작임을 알았다. 나름 영화 장면을 떠올리기도 하면서 재밌게 읽었다.
  에놀라 홈즈는 예전 셜록 홈즈 드라마에 등장한 셜록 홈즈의 여동생과는 정반대의 모습과 행동을 보여준다. 굉장히 인간미가 넘치면서도 현명하고 따스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가족을 애정하는 모습이, 특히 엄마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에놀라는 굉장히 사랑스러운 아이임을 알았다. 그럼에도 엄마가 자신의 곁을 떠나버리는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물론 에놀라는 성인이 아니었고 가정의 애정에 매달릴 수 있는 나이지만 독립심이 길러지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결국 엄마와 대면하지는 못하지만 엄마와 신문 광고를 통해 애너그램으로 대화하면서 에놀라의 성장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굉장히 그 점이 흥미로웠다. 셜록 홈즈가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게,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자신을 기숙사 학교에 보내지 못하도록 도망다니면서도 엄마를 쫓으며 턱스베리 경 사건을 홀로 해결한다. 엄마 없이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생각하던 에놀라는 결국 모든 일을 혼자 해낸다. 정말 멋있는 아이이다.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완독할 정도로 재밌는 책이었다. 영화는 각색되어 튜크스베리 경이 나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원작을 읽으면서 튜크스베리가 어떻게 표현될지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원작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에놀라 홈즈를 봤거나 볼 계획이라면 한 번씩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얼빈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을 읽기 전에 영화 ‘영웅’을 봤다. ‘하얼빈’과 ‘영웅’은 모두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 당하는 역사적 흐름을 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두 작품을 보면 그려내는 안중근과 그 주변 인물들, 심지어는 이토 히로부미까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한 작품만 보아도 물론 재미있고 잘 만들어진 역사 재구성물이지만, 두 작품을 모두 보고 비교하면서 읽으니 더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작품을 넘어 인물의 일생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고 싶다면 단연 ‘하얼빈’이 우위에 있다. ‘영웅’은 역사적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영화로 만든 작품이니 만큼 몇 차례의 각색이 걸쳐 있다. 그러나 ‘하얼빈’은 어느 정도의 각색과 작가의 상상이 들어가 있다고는 하나 조금 더 실제 역사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하얼빈 (김훈 장편소설)

  후기를 쓰기에 앞서, 이 책은 소설의 내용 부분 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작품의 후기와 작가의 말까지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는 (혹은 읽으려는) 99.9%의 한국인들이라면 제목만 봐도 이 책이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소재로 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역사적인 순간과 사건에만 집중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아는 거사(擧事) 부분을 소설의 정 가운데에 두고 그 앞에는 안중근 의사와 이토 모두 하얼빈에 도착하여 대면할 때 까지 각자의 여정을,  그 뒤에는 사살에 대한 일본과 조선의 반응, 안중근 의사의 심문과 재판 과정 등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책에는, 특히 1909년 10월 26일 이후 부분에서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천주교를 믿지 않는 독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운(사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후기와 작가의 말까지 전부 읽어보았을 때, 앞서 말했던 이 책의 이야기 구조와 작품 속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후기에는, “여기서부터는 소설이 아니고 안중근의 거사 이후 그의 직계가족과 문중의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와 시련과 굴욕, 유랑과 이상과 사별에 관한 이야기” 라고 적혀 있다. 후기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이 80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에 의해 용납되지 않았다는 것, 안중근 의사의 자식들이 조선 총독부의 ‘박문사 화해극’에 동원되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 속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알리고자 하지만 재판정과 일본 언론이 단순 무지에서 비롯된 일로 몰아가는 것은 물론이요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뮈텔 주교도 그의 행위를 죄악으로만 여기며 빌렘 신부의 면회 및 고해성사 요청을 거절했다. 이토를 죽임으로서 이토가 “더 이상 작동하는 것”을 멈출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이토를 지우고 세상을 이토로부터 온전히 풀어놓는 것”(본문 89p)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토는 죽었지만 이토가 만든 세상은 계속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교회가 영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이토가 만든 세상의 땅 위에 세워진 것”(본문 222p)에 의해 그의 뜻이 당시의 종교적인(영적인) 부분에도 쉽게 전달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토가 세운 세계에서,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이 전달되지 않았던 안타까운 과거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라고 한다. 이러한 작가의 말은 상술한 후기와 함께 소설의 거사 전 부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준다. 이 소설에서는 하얼빈으로 가는 안중근 의사의 여정 속에서, 이토 살해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안중근 의사의 마음과 생각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 묘사가 어떤 ‘대의’처럼 느껴지지 않게 서술하고 있다. 이것과 앞서 설명한 후기의 내용을 함께 보면, <하얼빈>은 이후 수난을 당하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전해지지 않는 결과를 낳을지라도, 이토의 사살을 위해 하얼빈으로 가던 젊은 안중근의 날것 그대로의 생각과 심정, 용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얼빈 (김훈 장편소설)

 책 표지를 보고 첫 장을 넘겼을때, 쓰라린 일제의 폭거에 대한 아픔이 가득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첫 장, 둘 쨋장 넘기다 보니 최대한 중립적으로 쓴 소설이라는 게 느껴졌다.
어찌 보면 이토도 안중근도 국가를 우선으로 해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살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도 일본의 부흥을 위해서, 안중근은 대한제국의 부흥을 위해서 달렸을 뿐이다.
그 과정 속에 일어났던 살인은 사실 상대방의 관점으로 보았을땐 
서로 이해하지 못할 벽이지 않을까? 
우리 사회도 그런 환경 속에서 사는 게 아닐까 싶다.
누가 던진 돌에 맞아도 자신의 아픔과 상처에만 관심을 가질 뿐
던진 사람은 왜 던졌는지 어떻게 됐는지는 중요하지않다.
세상은 변하고 정보는 바다라 불릴 정도로 넘쳐난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는 것 같다.
산업혁명과 기술의 폐해인가? 아니면 인권 의식의 발전이 일으킨 부작용인가?
둘다 일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은 변화하면서 주식 차트 처럼 과거보다 훨씬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다.
부자와 거지 일 수도 있고, 슬픈 사람과 행복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하얼빈이라는 이 소설은 물론 안중근의 삶과 일본의 지배를 이겨내고자하는 
대한 제국의 항일 운동가들의 삶을 보여주긴 한다.
하지만, 세상에 나쁜놈은 없다. 그걸 알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
나쁜놈은 없지만 이기적인 놈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이기적인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좁아진 시야와 급격한 변동 속에 
한 사람의 배려는 오히려 ‘호구’라며 이용하기 바쁘다. 우리 모두가 배려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 너무 착한 호구를 욕하는 사회이기 보다. 이용자를 처벌하고 나쁘다는 걸 
당연히 인식하는 사회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
아니어도 좋다. 그것도 그 나름대로의 삶이니 그저 내 바램이다. 하얼빈은 오랜만에 내 생각을 꺠워준 것 같다.
김훈 작가에게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