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공화 정체 아래의 피렌체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 당시
사실상의 지배자는 메디치 가의 로렌초 일 마니파코였지만 피렌체는 오랫동안 공화 정체였고 로렌초 라는 뛰어난 지도자 아래서 교묘히 운영되던 시대에
마키아벨리의 정신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뒤이은 소데리니 정권이 출범하고 나서의 보다 민주적인
공화 정체가 15년 동안 마키아벨리가 활동하게 된 놀이터였던 것이다.
이런
마키아벨리가 당시의 피렌체 시민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공화 정체에 친근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군주 정체를 논한 『군주론』이 먼저 탈고된 것이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로렌초를 본받아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마처럼 회상하고 있는 체사레 보르지아를 새 군주의 모델로서 적격한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실직의 고통을 겪은 마키아벨리에게 그가 생각하고 있던 지도자에 필요한 조건, 즉 비르투(재능, 역량, 능력)와 포르투나(운, 행운) 그리고 네체시타(시대의
요구에 합치하는 것, 시대성)의 개념이 불가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마키아벨리에게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아무리 이상적
군주의 모델로서 명성이 자자하더라도, 지난 시대의 군주에 불과했던 것이다. 로렌초는 국내에서 외양은 공화 정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메디치 가가 지배하는 참주 정체였다. 그리고 국외에서는 이탈리아 열강의 세력균형정책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로렌초의
정치는 이탈리아 외부에서 전제 군주국의 대두가 약했던 시대에 완벽하게 통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군주로서 칭송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로렌초의 죽음으로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변했고 이상적 시대가 저물어 가는 상황에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지아가 저물어 가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16세기 초두에는 이탈리아의 통일이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졌던 때였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공고한 정체로 안정되고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베네치아 공화국이 통일에 가담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또한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롬바르디아 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야심도 프랑스의 군사력을 무시 못하는 이상 인정하는 추세였다. 그리고
나폴리에서 시칠리아에 이르는 남 이탈리아도 에스파냐 세력의 침투가 깊어서 조급하게 뒤집기는 어려웠다. 당시
대 군주국이었던 프랑스, 에스파냐, 터키 등에 대응할 수
있고, 이탈리아의 독립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던 국가는 중부 이탈리아 뿐이었다. 중부 이탈리아가 강력한 군주국 창설에 성공한다면 북으로 베네치아와 프랑스, 남으로부터
에스파냐를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체사레 보르지아가 이를 구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생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체사레 보르지아를 악마처럼 무서워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대중화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적인 분위기에도, 마키아벨리는
왜 본인이 취직이 힘든 지 고민했다는 것을 시오노 나나미가 서술한 것을 보면 마키아벨리는 인간성에 비관적이면서 자신에게는 낙관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