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이라는 책의 제목이 매우 인상 깊었고 집에서 미술관을 즐긴다는 뜻인가? 생각했다. 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좋은 기회를 통해 영상으로 작가님을 직접 뵐 수 있어서 재미있었고 매우 흥미로웠다. 또 강연만 하는 형태가 아니라 현장에 있던 학생들과 소통하며 강연을 진행하여 지루함 없이 시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중간에 퀴즈를 푸는 활동도 직접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인상 깊었고 단순히 책 소개가 아닌 작가님의 경험을 말하듯 풀어주셔서 재미있었다. 다음에는 직접 참여하여 듣고 싶다.
검은 꽃
나는 대학에 오기 전부터 역사와 문학을 좋아했지만, 철저하게 역사를 고증한 문학을 잘 찾지는 못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문학을 통해 역사를 이해하고 공부한 경험이 적어 늘 아쉬움을 느끼고는 했다. 그래서 독서클럽에서 팀원이 이 책을 추천했을 때, 이 기회를 통해 책을 읽으며 역사를 더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작가님이 생생한 묘사를 위해 직접 멕시코로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는 인터뷰가 있다. 그래서일까? 유독 이 책의 묘사는 가끔 잔인하고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질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은 문화 유적지도 어느새 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당시 역사가 얼마나 치열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책을 읽고 팀원들과 함께 역사를 공부하고 등장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해석하다 보면 어느새 한 등장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한 나를 볼 수 있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힘들었던 점은 역사 고증이 워낙 철저했기 때문인지 작품 내의 분위기가 내내 어둡고 우울하다는 것이었다. 보다가 지칠 정도는 아니지만, 워낙 어두운 시대를 반영하다 보니 책을 보며 웃음을 지을만한 가벼운 장면이 없었다. 그리고 초반에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다. 물론 끝까지 읽으면, 각각의 등장인물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일제 강점기에 해외로 건너간 우리 동포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며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끝까지 비교하며 읽으면 어느새 이 책의 배경에 나오는 짧은 역사를 이해하고 외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존감 수업 (하루에 하나, 나를 사랑하게 되는 자존감 회복 훈련)
윤홍균 작가의 자존감 수업은 ‘독서클럽’ 활동으로 인해 읽게 되었다. 심리에 관련된, 그리고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는 ‘자존감’에 관련된 도서이기에 해당 책을 독서클럽 활동 도서로 선정하게 되었다.
‘자존감이 가장 강력한 스펙’ 이라는 주제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온갖 방법과 글귀가 난무하지만 진짜 행복은 튼튼한 자존감에서 나온다. 건강한 자존감이야말로 요즘처럼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문장이 가장 인상 깊다. 이 말에 정말 공감하였으며 누군가에게 동요되지 않고 정말 정신적으로 건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굳건하게 믿는 자존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진심으로 날 사랑하고 믿어주는 자존감을 키워보고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정말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결정을 잘하기 위한 조건 세 가지를 읽고 결정을 잘했다, 못했다 나뉘는 것은 결정을 하고 난 후의 행동으로 정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당 문구를 통해 결정을 할 때 전보다 더 용감해지고,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자존감은 감정적으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는 능력이다.’ 부분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같이 읽을 책을 정하는 과정부터 함께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 과정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자존감 수업’을 읽고 친구들과 의견을 공유하는 독서클럽 활동을 통해서 ‘책을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을 읽는 방식을 새롭게 터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함께 이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의견의 포인트들을 알 수 있는 활동이었기에 다음 번에도 참여하고 싶다.
데미안 (세계문학전집 44)
보물지도 같은 도서, 데미안
책 ‘데미안’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하지만 그 시절 내가 이해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부분이 있었고, 은유적인 표현을 완벽히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이번 독서클럽을 통해 책 ‘데미안’을 다시 한번 접해보았고, 내가 느낀 의미는 상당히 변화되어 있었다.
데미안은 총 8장으로 나뉘어있으며 각 장마다 제목이 다르게 지정되어있는데, 과거의 나는 제목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독서클럽을 통해 진행되는 반복되는 질의 응답에 ‘과연 작가가 제목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단지 은유나 각 장의 내용을 함축하는 의미 뿐만 아니라, 성경이나 신화적인 내용 또한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제 3장의 제목은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인데, 혼자 독서를 할 때에는 단순히 ‘옳음’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인줄 알았다. 그렇지만, 독서클럽을 지도해주셨던 교수님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이가 성경의 내용을 은유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과거의 나는 싱클레어가 ‘알을 깨고 나온다’라는 맥락에 감동을 받았었다. 그간의 악과 선의 기로에서 방황했던 싱클레어의 이미지가 눈 앞에 그려지고, 안개 마냥 뿌옇게 드리웠던 그림자를 모두 걷어낸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데미안의 ‘존재’에 대해 포커싱을 맞춰 독서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관계성은 어떠하며, 데미안은 도대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또래 보다 성숙한지, 혹은 그저 ‘순수악’일지…… 8장에 걸쳐 독서하며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이 정의를 내릴 순 없는 존재이다. 다만 그간 읽은 내용으로 추론하자면,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이며, 자신의 힘듦과 고통을 나눠 짊어질 하나의 구세주인 것이다. 냉철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싱클레어에게 ‘해답’이 아닌, 질문으로써 빛으로 유도하는 데미안은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제자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책 ‘데미안’은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더욱 성장하는 도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상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는 책 ‘데미안’은, 혼자서 읽고 결론을 내리기엔 다소 편협한 시각으로 마무리 될 수 있다. 하지만 ‘독서클럽’과 같이, 책을 읽고 이에 대한 의견들과 질문을 서로 공유하다보면, 내가 찾지 못한 숨겨진 의미나 새로운 표현들을 속속들이 찾을 수 있는 ‘보물지도’로 느껴지기도 했다. 다채로운 색을 가진 도서, ‘데미안’. 1년 후의 나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해 행복해 할지도 모른다.
방구석 미술관 2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한국)
미술을 만나는 눈이라는 강연을 들으면서 제일 기억의 남는 말은 모나리자의 면사포를 예를 들면서 ‘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 였다. 이러한 말은 미술 강연이었지만, 미술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내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지 못해 모나리자의 면사포처럼 놓치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이 강연을 통해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것들을 하루하루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쉬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새로운 시각들에 눈뜨는 것이 좋겠다’ 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방구석 미술관 2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한국)
나는 항상 미술 작품을 보기 전 사람들의 해석이나 설명을 보고 작품을 봤기 때문에 그 해석과 설명에 따라 작품을 이해했다. 하지만, 저자님이 미술관은 지상 유일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유일한 놀이터라고 생각한다고 하셨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나도 앞으로 미술 작품들을 보며 나만의 창의력, 논리력, 통찰력 등을 동원해 작품을 해석해보고 이를 통해 나의 지적 능력도 키워내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공정을 논하기 전에, 우리 사회를 성찰해야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라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공정”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한다고 본다. 왜 우리는 허상에 불과한 형식만에 집중하고, 썩어 곪아가는 현실이라는 내용에는 집중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구조들이 무너지고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붕괴이며, 또 다른 하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붕괴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세계금융위기(대침체)와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촉발된 대봉쇄는 신자유주의와 양적완화가 자본주의라는 암덩어리가 주는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일시적인 진통을 하게 만드는 모르핀에 불과한 정책들조차, 효과도 없다는 걸 증명했으며, 대의제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들을 대표해야지만, 특정 집단과 이익만들 추종하는 정치인들의 기술관료화 덕분에, 브렉시트, 반지성주의 지도자의 탄생(트럼프, 보우소나로 등등)를 통해 무너졌다.
사회를 지탱하는 정치, 경제적 구조가 무너졌는데, 그 구조 위에서 피어날 수 있는 “공정”이라는 개념을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공정에 대해 논할려면, 그 공정이 피어날 수 있는 사회부터 재건해야할 것이다. 아마도 샌델 교수도 이 점을 책에 나지막이 “노동의 존중”이라는 단어로 나타낸다. 나도 “노동의 존중”이라는 전체적인 흐름에는 동의한다. 근데, 난 무너져가는 구조에 기반한 정책들 예컨데, “금융소득세”, “대학추첨제”같은 세부적인 줄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그건 양적완화와, 신자유주의같은 모르핀에 불과하여, 그저 단기간의 효과만 보이고, 장기적으로 근본적인 사회를 바꿀 수 없는 정책들이다. 난 그래서 근본적인 사회구조를 바꾸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가 시급하다고 느낀다.
일단,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는 불평등은 존재하나, 자유로울 것이고 그 어떤 것보다 공정할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연적인 불평등은 어쩔 수 없다. 누군가는 잘생긴 외모이던, 뛰어난 신체능력이던, 영민한 지능이든, “선천”적인 “능력”을 타고날 것이다. 그 능력을 주어진 대로 “자유”롭게 발휘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타고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능력”이라는 모호하고 완벽히 정의할 수 없는 자유보다 그것이 더욱 더 자유라는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또한, 여태까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는 가치중립적으로 완벽히 정의할 수 없는 “능력”이라는 것에 모든것을 맡겨놓아, 사회를 망치게 했다. 판단 할 수 없고 가치 중립적이지 않은 “능력”을 통해 판단할 수 있고 가치 중립적인 “가치”를 분배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감성이 이성에 앞서야 하는가? 아니다. 판단할 수 있고, 정량화 할 수 있는 “욕구(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더욱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이성이 감성보다 앞서야 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와 이성은 “올바름”을 만들 것이며, 결국 그 바름은 “절대적인 공정함”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 사회는 공정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공정”은 우리 삶과 사회의 원리가 아니다. 그저 원리에서 파생되는 곁가지 법칙이여야 한다. 우리 사회의 원리는 “이성”이 되어야 하며, 그 이성은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끊임없이 고쳐나아가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공정”해지기 전에, 우리는 “이성적” 이여야한다. 우주라는 모름이라는 어둠속에 우리는 감성이라는 운보다는 이성이라는 등불에 의지해 나아가자.
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장편소설)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질문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책을 덮기 직전 나오는 옮긴이의 말이 정말 가슴에 와닿았다. 옮긴이는 이 작품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사형은 무력하다?’, ‘사형은 무력하지 않다?’ 이 질문은 시간이 흘러도 완전한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을까?’, ‘속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들으면 언제나 ‘진정한 속죄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라는 질문들이 연이어 나오며, ‘모순’, ‘위선’ 등 여러 단어가 머릿속에 맴돈다.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면, 가해자는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을 보며 ‘공허한 십자가’만큼 이 책에 어울리는 제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속죄가 담기지 않은 십자가는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무게는 온전히 피해자들에게 돌아간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끔찍한 현실을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이 우리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생각을 하며 착잡한 기분도 들었던 책이었다.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나를 위해, 모두를 위해, 공정하다는 착각을 버릴 수 있을까?
학교를 다니면서 학년이 올라갈 수록 내가 다루는 정보의 양은 많아지고 내가 책임지고 말해야 할 사항도 많아져 갔다. 알아야 할 것에 따라가기 바쁘고 말할 책임에 급급하다 보니 ‘팩트’에 대한 집착이 커져 갔다. 여기서 문제는 ‘팩트’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이다. 뭣 모르는 중학생 뿐만 아니라 대선 후보 캠프에서도 다른 후보와 관련된 사람들의 인생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정보를 너무 많이 가지다 보니 오만한 태도를 가지게 되어서 결국 자기 인생을 나락으로 가게 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냥’ 정보는 너무 많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찾는 것은 고단한 일이고 찾은 그 정보를 ‘자기화’해서 만들어진 인식과 철학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공장의 생산 과정만큼 복잡한 일이다. 엘리트라고 해서 정보를 다루는 능력에서 절대적 우위를 가진 것은 아니고 어느 시대의 어떤 계층에서도 정보를 가지고 운 좋게 기회를 잡아 성공한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복잡한 사회 담론에 함부로 칼을 들이대도 괜찮은가?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질서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 능력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은 평등하다고 하는 주장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의 능력으로 줄을 세우는 건 당연하다고 주장, 또 사람들의 능력대로 성과를 지급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 사람들의 능력대로 불이익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 결국 능력 외 적인 요소도 반영하여 사람들을 줄을 세울 거지만 경쟁에 참여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보장한다는 주장까지 들으면서 ‘학업이나 직업에서 열심히 하고 잘 하는 것’과 ‘경쟁에서 성공하고 대우 받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 공정함이라는 가치가 모두에게 통용되는 가치가 아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능력주의를 버리기는 힘들다. 그래도 여러 사상 중에서 그나마 나은 것이 능력주의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 등 가질 수 있는 것을 능력만 되면 모두 다 가질 수 있고, 휘두르는 것도 능력만 되면 할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 때문에 말세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능력만 되면’이란 말이 실생활에서 가능한 말인가? 우연, 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생각조차 못할 수 있는 것일까? 우울한 생각대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을 막으려면 나부터 ‘공정하다는 착각’을 버리고 ‘능력주의의 폭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이기적 유전자 (40주년 기념판)
이번 독서토론에서 나는 ‘생존기계’라는 내용에 집중하여 글을 읽어나갔다. 이 책의 초반에서 우리는 이기적인 유전자로 이기적으로 태어났으며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생존기계일 뿐이다 라는 내용을 시작으로 내용을 전개해 나가며 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초반에 책의 압축적이고 전반적인 내용을 관통하는 글의 쓰임을 볼 수 있어서 앞으로 글쓴이가 어떤 느낌의 생각을 가지고 앞으로의 이 글을 전개해가는지 느낄 수 있어서 도움이 정말 많이 되었다. 또한 우리의 이기적인 본능을 다루는 내용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이타적인 행동조차 사실은 우리의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내용이 정말 나를 크게 뒤흔들었고 내가 이 책의 필자의 생각에 크게 이입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타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위도 나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게 되어 있다는 본능이 나의 유전자에 내제되어 있다는 부분에 어느정도 공감이 되었고 사실 내가 행하는 이타적인 행동또한 결국 깊게 그 본질을 생각해보면 나의 이기적인 행동이 어느정도 내재되어 있다고 나의 행동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부모의 사랑조차 유전적이고 본능적인 부분으로 생각해보면 결국은 나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이기적인 행동이며 악어새가 청소하는 새를 먹지 않는 것과 같은 상리공생적인 관계조차 서로가 자신의 이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라는 부분에서 우리의 삶과 관계조차 결국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다면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인간은 결국 이기적으로 태어났으며 끊임없이 관계를 통해 남들과 이타적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나가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결국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느낀점은 우리는 태초부터 이기적으로 태어났으며 본능적으로 이기적이게 행동하지만 항상 이기적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였다. 만약 이기적인것이 무조건적으로 좋다면 가장 이기적인 유전자가 우월했으며 이 세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기적이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모든면에서 그렇지 않게 항상 노력해야하며 이타적으로 남들과 이타적이고 협력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배려할때 우리는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겠다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