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막스 피카르트는 1888년 스위스 국경 지대에서 태어났다.대학병원 보조의사로 일하다가 스스로 기계화된 의학산업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의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의 맨 앞머리에서 가브리엘 마르셀은 피카르트의 발언이 ‘종말론적 의식으로부터-최후의 그것, 즉 죽음, 심판, 지옥, 천국을 깨닫는 데에서-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자세에는 허무주의적 염세주의의 기미가 없고, 이 책의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평화롭다.
“침묵의 세계”에서 말하는 침묵은 “일체의 지성을 초월하는 평화”이다.
침묵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32장 정도로 구성된 에세이로 침묵이 무엇인지 말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 이상’이다. 즉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다. 말의 중단으로부터 발생한 현상이 침묵이 아니라, 독립된 전체,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이다.
독자가 말을 경시하도록 하게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말이지만, 말은 침묵과의 관련을 잃으면 위축된다. 즉, 말을 위해서 “침묵의 세계”를 드러내야 한다. 사람들은 침묵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존재하고, 하나의 실체이다.
침묵은 존재하지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창조되지 않았지만 영속하는 존재다. 침묵은 존재할 뿐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효용성이 없다. 이는 오늘날 효용의 세계에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언어는 세계의 부속물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이다. 즉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이상의 것이 있다.
말은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이 침묵이 말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인이 인간의 본질을 ‘살아 있는 로고스’라고 한 것처럼 인간은 말을 통해 인간이 된다. 따라서 침묵은 말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말은 침묵에게서 활기를 얻고, 자신때문에 생긴 황폐를 침묵으로 정화한다.
하지만 오늘날 침묵은 더 이상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침묵은 그저 소음의 중지이고, 말은 소음에서 생겨 소음 속에서 사라진다. 오늘날에는 진정한 죽음이 없는데, 오늘날의 죽음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라기 보다는 수동적인 어떤 것(생명의 중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이 침묵과 결합하지 못하면 자신의 본질을 잃고, 공허해지고 종말로 치닫게 된다.
막스 피카르트는 현대의 소음의 세계에서 본질을 잃은 언어를 탐구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나오는데, 바로 ‘잡음어’라는 것이다. 오늘날 말은 침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의 잡음으로 생기고, 다른 잡음어 속에서 끝난다. 즉, 오늘날 말은 정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향적 잡음으로 존재한다. 잡음은 소리 나는 공허(말의 물질화)인 반면, 참된 말은 소리 나는 충만함이다. 저자는 소음과 잡음어의 차이를 말한다. 소음은 침묵과 대치해 있는 적이다. 하지만 잡음어는 침묵과 대치해있지도 않고, 침묵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게 만든다.
침묵은 수직이다. 문장의 수평적 흐름을 가로막는다. 잡음어는 가로막힘 없이 수평으로 나아간다. 마치 무엇을 의미한다기 보다 계속 증대시켜가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잡음어는 사이비 말이며 사이비 침묵이다. 이 잡음어는 끊임없이 소멸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 잡음어의 부속물인 인간은 현재 자신이 존재함을 믿지 못하게 된다.
말은 많은 악마적인 것을 인간에게서 보호한다. 하지만 잡음어는 구멍이 뚫려서 악마적인 것이 드나든다. “잡음어에 의해서 온갖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파급된다. 반유대주의, 계급투쟁, 국가사회주의, 볼셰비즘, 문학주의(문학이 유일한 가치라고 믿으면서 문학에 집착하는 주의) 등 온갖 것들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인간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잡음어가 와서 인간을 기다린다. 잡음어는 무엇보다도 불확실함을 퍼뜨린다.”-p.207
인간은 다만 잡음어가 펼쳐지는 장소, 잡음어를 위한 공간일 뿐이다. 독재자의 외침과 독재자의 슬로건이 잡음어가 기다리는 것이다. 이 독재자의 슬로건에서는 내용보다 소리 높음과 명확함이 중요할 뿐이다. 노동자는 말이 없고, 진공 상태에 있지만, 농부는 침묵한다.
라디오는 순전히 잡음어를 생산하는 기계장치이고, 침묵도 말도 없다. 만약 오늘날 매순간 전쟁에 대한 보고가 라디오(21세기로 보자면, TV, 스마트폰, 인터넷 등)에서 소란스럽게 나오지 않는다면, 침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절규가 들리고 그 전쟁의 소리가 너무 커 인간은 전쟁을 견딜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전쟁을 보고하는 잡음이 이 절규와 굉음을 보편적인 잡음으로 만든다. 따라서 인간은 라디오의 다른 잡음들처럼 전쟁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역자의 말에서 현대는 소음 대량생산의 시대라고 한다. 소음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하며, 자유로운 사고를 억압하고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한다. 즉, 저자가 하는 말은 ‘침묵이 말보다 위대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도리어 침묵으로부터 진정한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현대는 잡음어의 시대, 소음의 시대이고, 따라서 침묵도 없고 말도 없다.
전세계에 자신의 소리를 퍼뜨리려는 현대 미디어를 한번 생각해보자. 현재에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떠들썩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절규는 막스 피카르트가 말한 대로 다른 잡음어처럼 평준화되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