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있음]
사랑은 지워질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이고, ‘감정’은 상황의 느낌이자 기억이니까.
그렇다. 사랑은 사실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억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아픔을 준다.
주인공은 자신의 앞자리에 있는 다른 학생을 왕따로부터 구해주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맞서다, 패거리들에게 제안을 받았다. 특별반(장애인특수반을 지칭하는 것 같다.)에 있는 ‘히노’에게 고백을 하고오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주인공은 직접 고백하러갔고, 패거리들은 의외로 순순히 약속을 지키며 시작하는 이야기.
히노가 당연히 거절할줄 알았으나 고백을 받았다.
남자는 히노와 사귀는 대신 조건을 제시받는다. 조건은 그랬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말을 걸지 않는다.”
“연락은 짧게한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지 말아야한다.”
어째서인지 남자도 그 말에 응했다. 히노에게는 와타야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자연스레 셋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남자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히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깨닫고, 조건을 생각하며 히노에게 좋아해도 되는지 물어본다.
히노는 선행성 기억장애를 앓고있음을 털어놓는다. 말그대로 기억이 하루단위로 사라져 기억이 나질 않는 것. 히노의 기억은, 남들이 나아갈 때 자신은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었다. 히노가 남자의 고백을 받아준 것은 그런 일상에 대한 발버둥이었다.
진실을 알게됨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진심을 고백하고 그녀의 곁에 남는다. 장애를 자신이 감당하며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일기를 채워주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인해 기억력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알려준다. 이 때문에 그녀는 크로키를 시작했다.
순조롭게 일본 청춘소설처럼,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마지막 챕터 제목인 ‘마음은 너를 그려’를 보고 나는 결말을 직감했다. 실제로 여러 책들을 읽어보며 접해온 그 ‘촉’이 솟아올랐다.
남자의 그녀를 향한 마지막 부탁은 자신을 잊는 것이었다. 더이상은 기억하지 말아달라는 것. 남자는 심장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공허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기억이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한 그제서야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가 결여되어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가 알려준 ‘크로키’, 그것이 그려진 공책을 찾아보다 그려진 누군가를 보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차올라 넘쳐흐르는 그 기분은 그를 기억해내는 트리거가 되었다.
모두가 그를 잊어갈 때, 그녀만큼은 그를 기억에서 되짚어낸다.
사실 이 이야기를 다 읽어가며 떠오른 소설은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였다. 행복한 청춘을 보낸 남녀의 둘 중 한명은 어딘가 아프고, 그 결말은 비극이지만 승화해낸다는 것. 엔조이식, 분위기식이 아닌, 이런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그런 로맨스 소설의 느낌은 일본특유의 소설에서 이따금씩 실감이 된다. 실제 장애의 우울감을 그렇지 않게 그려냈다는 점. 보는 이로 하여금, 다시금 따듯한 우울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