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한길그레이트북스 81)
2021년 동계방중 독서클럽을 계기로 접하게 된 책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저인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독서클럽 활동을 위해 책을 선택할 때, 책을 통해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올바른 사회적 인식을 형성해 볼 수 있는 활동을 진행하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현대 사회의 사회적 인식의 문제점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선정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우리 사회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범죄자의 성향이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혹은 “관상이 범죄자 상이다”라고 말하는 경향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는 범죄를 일으킨 자들에 대한 공통점을 만들어 이들을 “원래부터 그러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정말 예외인 상황도 있겠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이전에는 평범한 삶을 살던, 너무나도 평범한 존재였던 사례인 경우도 많다. 이러한 경우들을 보면서 악이 정말 독특한 배경을 가진 이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일까와 악을 “평범한”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섣불리 치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사회에서 사람들이 범죄와 범죄자를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점을 느꼈다. 이러한 문제와 관려해서 우리에게 배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찾고자 했고, 악은 평범한 곳에서부터 나올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읽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이히만이 이스라엘로부터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되어 예루살렘 법정에 서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나치 집권 당시 독일의 상황과 그 시기 유대인을 향한 차별 정책부터 이후 강제 추방, 수용, 학살로 이루어지는 역사적 흐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유대인 학살에 도움을 주었던 유대인 장로 등 유대인 고위층의 폐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친위대로서의 일대기와 이후 예루살렘에서의 재판 과정을 통해 이 책의 핵심 내용인 “악의 평범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초반부터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의 위험성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한다. 여기서 말하는 무사유는 ‘스스로 사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을 뜻한다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초반에는 명확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이 표현이 아이히만의 일대기를 보면 볼수록 무사유의 의미와 위험성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이러한 무사유는 아이히만으로부터 악의 평범성이 나오게끔 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한 요인으로써 ‘악의 평범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이다. 이러한 무사유라는 표현을 계속 언급하는 것을 보아서 한나 아렌트가 독자들에게 무사유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나치 집권 당시 유대인 관련 문제에 대한 독일의 모습과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의 특성은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먼저, 나치 집권 당시에 독일 내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감이 만연했던 것처럼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특정 인물에 대해 혐오하는 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자신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은 집단 등에 대해 혐오성 악플을 달거나 ‘충(蟲)’이라는 표현을 이용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유대인 학살을 ‘최종 해결책’으로 바꿔 썼던 것처럼 아직도 현대 사회에서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대체하는 언어 규칙을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를 해고할 때(물론 해고가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인 행위라고 볼 수는 없으나), 해고가 아닌 경영 합리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현대 한국 사회에 책에 나타난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내용과 책 안에서 지적하는 문제점과 한국 사회를 비교하여 바라볼 때,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형식이라 할 수 있는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나치의 사례와 아이히만의 사례는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와 완벽한 궤를 이룬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치 집권 당시 독일의 상황과 아이히만의 사례와 유사한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를 통해 제2의 아이히만이 나타날 수 있는 출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혐오문화나 언어규칙 문화 등을 당연시 여기거나 이를 통해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행동의 그릇됨과 위험성을 알고 이러한 문제들에 휘말리지 않도록 올바른 관점을 형성할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나아가 무엇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아이히만과 같은 무사유의 상태를 사전에 방지해야 제2의 아이히만과 같은 악의 평범성의 사례가 또 다시 나타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고 본다.
레버리지 (자본주의 속에 숨겨진 부의 비밀)
상아의 문으로 (구병모 장편소설)
레버리지 (자본주의 속에 숨겨진 부의 비밀)
멋진 신세계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100쇄 기념 스페셜 에디션,주제 사라마구 장편소설,Blindness)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익명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을 통해 인물들 각각의 본질적인 모습들을 더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렇기에 독자의 입장에서는 스토리가 진행됨에 있어서 더욱 집중하며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책 초반에 눈이 먼 사람들은 감염병 환자로 분류되어 정부의 조치에 따라 정신병원에 격리된다. 이 격리는 상당히 처참한 모습으로 이뤄졌는데, 공공을 위한 조치이더라도 그 방식의 적절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실명 증상의 확산세가 감염병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판단 아래 환자들에게 격리를 행한 것은 분명 옳은 조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개인의 인권을 중시하는 시대이지만, 그 인권 또한 공공의 안전을 비롯한 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져야 보장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작중에서는 다소 소량의 식량 배급을 제외하고는 복지와 치안 등을 포함한 어떤 것의 제공도 이루어지지 않아 격리 시설 내에서 많은 갈등과 사고가 생겨난다. 이는 개개인의 인권을 논하기 전에 공공의 안전에서부터 어긋나버린 방식의 조치가 아니었나 싶다. 격리시설 속에서 일어나는 폭행 및 성추행을 비롯한 갈등과 부상자에 대한 연민 등 여러 사건과 감정들을 보며 시력을 잃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욕망과 사회의 모습 자체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본질은 변하지 않음을 느꼈다. 또한, 이를 통해 작가는 인간의 본질이 사회의 모습 내지는 성격을 규정한다는 뜻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낸 것 같았다.
작중 안과 의사는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진료했는데,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정확한 병을 진단할 수 없었기에 집에서 서적들을 찾아보다가 눈이 멀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거울에 마주선 장면에서 “그의 비친 모습은 그를 볼 수 있는데, 그는 그의 비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물론 살아가면서 노후와 가정을 비롯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가기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음은 분명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를 위한 삶과 시간을 잃는다면, 의사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그동안 해왔던 노력과 최선은 아무 의미가 없어짐을 가르쳐주고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했고, 인상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정신병원에 격리되고 나서 처음에 모인 인원끼리 대화를 나눌 때, 사팔뜨기 소년은 자신의 눈에 대한 결함을 밝히는 것을 꺼려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결함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그런 신체적 결함이라는 것은, 잘 알아보지 못하다가도 이야기를 듣고 나면 눈에 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람들은 신체적 결함보다 내면적 결함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판단할 때에 외적인 것을 꽤나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되면 본인들 조차도 타인에게 쉽게 보여지는 외적인 것에 대해 신경을 더욱 쓰게 되고, 내면의 발달은 점점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눈’의 방향성을 새로이 잡아야 함을 일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는 검은 안대의 노인을 필두로 ‘눈이 머는 순간에 보았던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딱히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중요하게 작용하지도 않는데, 유독 나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 부분을 읽으며 갑자기 침대에 눕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 유튜브에 가장 마지막으로 검색한 것, 어제 가장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 등을 되짚어 보는 나를 발견했다. 현재 우리 가까이에 있고 익숙해져 있는 것들이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느끼게 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 장면이었다.
격리시설 속 깡패 무리는 식량을 무력으로 차지하고 다른 병동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데, 식량에 대한 여성들의 성 상납까지 요구하기에 이른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가 자신의 아내는 절대 못 간다고 선포하자, 의사는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윤리에 따라 행동하는 거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는 대사를 한다. 작중 작가의 말처럼 존엄성이란 값으로 매길 수 없으며, 양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인생이 모든 의미를 잃을 수 있다. 또한, 아내의 성 상납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 남편의 당연한 도리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의사의 모습에 놀랐고, 어쩌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임에 읽으면서도 절망적으로 다가온 장면이었다.
물론 이러한 비인륜적 행위를 통해 식량을 독차지하는 깡패 무리를 보며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다만 더 큰 갈등을 빚는 살인을 저지른 아내의 행위는 복수심에 지나친 행동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에게 검은 안대의 노인의 대사는 소위 말해서 한 방 먹였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 굴로 들어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 존엄을 바탕으로 한 수치심에 따른 행동이 우리의 배를 불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말의 수치심이 남아있다면 우리의 권리는 주장할 수 있어야 함을 느끼게 해준 가장 인상깊은 부분 중 하나였다.
작중에서는 눈먼 이들이 떠나고 남은 노파를 보여주는데, 사람들이 떠남으로써 식량을 자신이 독차지할 수 있음에도 아무도 없다고 느껴지는 고요 속에서 노파는 눈물을 흘린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 이는 식량을 포함한 물자는 확보했지만, 홀로 남음으로써 살아갈 이유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앞선 이야기에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인간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상호작용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담은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막바지에서 사람들의 시력이 돌아오고,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의사의 아내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라는 말을 한다. 인간에게는 선한 면이 있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악한 면도 존재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러한 알고 있어도 보고싶지 않은 악의 면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만일 갑작스레 실명 상태가 된다면 책의 인물들처럼 본능에 충실히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눈’이 있음으로써 교육을 통해 사회적 안정과 욕구의 절제가 유지되고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