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접했다. 퍼즐을 맞추다가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소설, 혹은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고 했다. 아마도 피프티 피플이라는 책이 탄생하게 된 첫걸음이었을 것이다. ‘피프티 피플’의 이름으로 쓰인 이 책의 목차를 넘겨 보다가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과연 이 사람들 속에 단 한 명이라도 ‘나’를 닮은 사람은 없을지. 아마도 찾고 싶어졌던 것 같다. (설령 없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작가의 바람대로 약 쉰 명의 인물이 저마다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등장한다. 그 짧은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내 눈에 밟혔던 인물은 ‘승희’라는 인물로, 목차에는 없지만 이기윤 에피소드에서는 그의 환자로, 조양선 에피소드에서는 그의 딸로, 배윤나 에피소드에서는 귀여운 알바생으로, 권나은 에피소드에서는 소중한 친구로 등장한다.
‘승희’는 병원 근처 베이글 가게에서 주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는 열여덟 고등학생이었다. 승희의 엄마 ‘조양선’은 승희 나이 때 오빠의 친구 ‘성식’과 승희를 가졌다. 처음에는 그럴 듯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성식은 도박에 빠졌고 여자들이 생겼다. 승희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결국 서류상 이혼을 했지만 ‘진짜’ 이혼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녀는 각자의 지긋지긋함을 폭발시키지 않는 법을 배우며 살아갔다. 그런데 하루는, 배달 기사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준 승희를 전 남자 친구가 떠밀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혼을 하고 오겠다며 고함을 지르더니, 이내 주방을 뒤져 쇠로 된 빵칼을 찾았다. 양선이 막아 보려고 했지만, 그는 더 빠르게 승희의 목을 깊이 베었다. 승희는 그렇게 죽었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1년차인 ‘기윤’은 톱니 같은 것으로 목이 깊게 베여 실려 온 여자의 갈비뼈가 부러질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이미 사망한 뒤였다. ‘윤나’는 좋아하는 베이글 가게에 갈 때마다 잘 웃지는 않았지만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아르바이트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됐다. 잘 버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공황 발작이 찾아왔다. 승희와 절친마냥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아끼고 좋아했던 ‘나은’은 기사화되지도 않은 승희의 죽음에 분노했다. 승희가 좋아할 것 같은 옷이나 양말을 사는 것으로 애도했다.
요 며칠 사이에 전 남자 친구나 남편에 의해 죽거나 다친 여성들의 기사를 최소 세 번은 본 것 같다. ‘승희’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승희’의 이야기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게임에서 만난 여자가 만나 주지 않자 집 주소를 찾아내 일가족을 살해하고, 여자 친구가 자신에게 말대답을 했다고 피가 떡이 되도록 때리고, 헤어지자고 했다고 찾아가 죽이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지만 지금도 뉴스에는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것들은 아주 잠깐 동안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가, 곧 다른 화제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더 정확히는, 그들이 눈을 돌려 버리고 만다. 나조차도 가끔은 이런 이슈에 무감해질 때가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외면해 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 에피소드 외에도 정세랑 작가는 이 책에 가정 폭력, 화물차 이슈, 가습기 이슈, 동성애자, 학과 통폐합, 비리와 부실 공사, 외모지상주의, 데이트 폭력, 아동 학대, 직업 차별 등 과거와 현재에 해결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온갖 사회 문제들을 소재로 담아 냈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극장으로 모았는데, 화재로 무너지고 있는 극장에서 이 사람들이 한 명도 다치지 않고 구조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사람들은 모두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것이지만, 이 사실을 기억하고 알아주는 것은 단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뿐이다. 아마 그것이 정세랑 작가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딘가에서 수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내가 알 수 없었던 일들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의 안정된 일상이 언제까지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마지막 ‘소현재’ 에피소드에서 어두운 현실과 그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소현재에게 이호 교수가 해 준 말이 인상 깊다. “우리가 하는 일이 멀리 돌을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을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끔찍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 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또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이 말을 듣고 소현재가 조금은 안도한 것처럼, 나 또한 위로받을 수 있었다. 분명 내가 당장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계속해서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돌을 던지다 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도착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해 나가면 된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병원이라는 건물이 있고, 모두가 촘촘히 짜여진 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병원은 단순히 아픈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치유받기’ 위한, 더 나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으로 집약된 우리의 세상. 수많은 폭력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면서도, 결국에는 언뜻 언뜻 희망이 보인다는 점이 좋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었다고 순간 몸을 비스듬히 하면 결국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기둥이 되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