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인형 살인사건

 바늘과 실, 그리고 사람의 몸통. 핏자국이 연상시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이 관철하는 ‘정의’라는 개념은 각자 다르다.
 오늘 써내려갈 책은 다니엘 콜의 봉제인형 살인사건이다. 책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게, 유튜브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광고를 제공해주었었다. 언제쓸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약속’도 있다.
 
 책의 프롤로그에서는 칼리드라는 연쇄살인범과 그를 잡은 수사관 윌리엄 올리버 레이튼 폭스가 나온다. 수사관은 작중에서 ‘울프’라는 이름으로 줄여진다. 울프는 칼리드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배심원의 판결은 무죄였다. 울프는 참지못하고 뛰쳐나가 칼리드를 폭행했고 법정경위는 울프의 손목을 부수어 제압했다. 결국, 칼리드는 그 뒤에 어린 여학생을 죽이다 검거되었다.
 살아가면서 직접 겪어보기는 힘들겠지만 한 번쯤은 볼 법한 레파토리다. 죄를 지어 마땅히 벌을 받아야할 인간이 그렇지 않고 넘어가는 것. 혹은 그 대가를 완벽히 받지 않는 것.
 이야기는 년 단위의 시간이 흘렀고, 울프가 경감 시몬스로부터 현장으로 와달라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장에선 에밀리 벡스터, 여성 경사가 맞이해준다. 빛을 내는 하나의 전구 밑으로는 사람의 알몸이 천장에 걸려있었다. 나체는 토막난 인체였는데, 피부의 색, 근육과 지방의 정도 등이 달라 괴기스럽다고 묘사된다. 자세한건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 머리는 몇 년전 무죄판결을 받은 연쇄살인범 칼리드였다. 칼리드의 머리를 단 시체는 손가락으로 울프의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살인사건의 범인은 누구인지, 희생자는 누구인지, 왜 죽었는지, 이들은 무슨 관계인지, 그 실마리를 파헤쳐 나간다.
 울프는 과거에 칼리드를 폭행한 뒤로 강등된 것도 모자라 쓸모없는 경찰이라고 낙인찍힌 채, 정신병동에 갖혀 무기력한 세월을 보냈는데 그 때 알게된건 파우스트의 전화였다. 전화의 정체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 대가로 목숨을 가져가는 것. 울프의 소원은 당시 칼리드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 여기서 좀 갑작스러운 장치라는 느낌이 들긴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울프는 진범을 찾아내 몸싸움을 벌이다 벡스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다. 내용에 은근히 묘사되는 울프와 벡스터의 관계때문인지 그녀는 울프에게 수갑을 채우는 것에 성공했음에도 도망치라며 떠나보낸다. 책의 마지막 한마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거의 대부분은, 아니 명백하게 ‘악의’로 가득찬 행위다. 일종의 유희라고 취급하는 사람도 있고, 복수라고 감정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 목적이 뭐가되었든, 여기서 살해당하는 사람이 큰 공동체가 규정하는 ‘악인’이라면 어떨까. 군중의 대부분은 마땅히 받아들이고 심지어 일부는 환호할 것이다. 
 ‘살해’라는 행위의 평가는 그것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주관에 달려있는 걸지도. 인간의 본능상, 그토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은 꺼려하면서도 마음의 심연속에선 이미 은밀하게 타인의 죽음을 바란다. 그것이 과연 ‘정의’인지, 생각해 볼 법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정의라는 개념은 원할때 가져다 쓰고, 필요없을 땐 무가치하게 버려지는 존재가 된 것인가, 하고 말이다.
 

아비투스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아비투스’란 남들과 나의 다름을 결정 짓는 ‘가치관, 선호, 취향, 행동 방식, 아우라, 습관 등 사회 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인간의 제 2의 본성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상류층의 생활 방식과 노력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돈만 있으면 상류층이 될 수 있고, 노력만 한다면 그러한 삶을 살수 있다고 너무 막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그 ‘노력’이 무엇인지 각 분야별로 알수 있게 되어 좋았다. 대학에 온 뒤, 선택할 것들이 많아졌다. 특히 매 순간마다 ‘안정적으로 머무를 것이냐’ ‘다른 사람이 도전 하듯 뛰어들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 같다. 이 책은 그 고민을 더 증폭 시켜준 책이다.
  이 책의 챕터 중에 가장 관심이 간 자본은 ‘ 지식 자본, 경제 자본, 사회 자본’이었다. 지식 자본은 어렸을 때부터 줄세우기를 끊임없이 당하는 자본이다. 또 지식 자본을 소개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부제가 덧붙여 있었다. 이 말은 지식은 직업, 또는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경제 자본은 ‘얼마나 가졌는가?’이다. 이 책은 돈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의 여유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또 사람의 자유를 결정한다고한다.  사회 자본은 ‘누구와 어울리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회 자본은 늘 새롭게 힘써야 한다고 한다. 그 만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많은 시간과 공이 필요한 자본이기도 하다. 그 밖의 자본 중 인상 깊었던 자본은 ‘문화 자본’이었다. 사실, 책을 읽기 전, ‘문화 자본도 인간의 품격을 결정할까?’라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보니 문화 자본 만큼 얻기 힘든 자본이 있을까?라고 생각 들 정도로 소유하기 어려운 자본이었다. 문화 자본은 돈이 많다고 높은 계급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품격도 있어야만 사회적 명성을 누릴 수 있음을 나타낸다. 책에서 ‘중간에 계급이 상승한 사람은 경제 자본으로 품격을 상승했을지 모르지만, 문화적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동급 계급을 따라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같은 계급에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따라가야 하며 소속감이 없는 외로운 상태를 돈이 아닌 , 문화적 취향이 만들어 낸 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책을 읽고 처음엔 불편한 마음이 컸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느낄수 없는 계급의 벽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비투스의 저자는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 당신이 만드는 모든 것, 당신이 해내는 모든 과제가 아비투스를 만든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뒤의 지금, 내 삶의 변화를 기대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려고 한다.

아비투스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아비투스(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는 일부 공감되고 이해되는 부분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꽤나 어려운 내용을 다루는 책인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품격을 결정하는 자본들이라는 주제 또한 내용을 확실히 바로 알아채기 어려운것같습니다. 
처음 이 책을 구입하고 제목을 읽었을때 저는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이라.. 분명 금전적인 자본이 있을테고, 또 뭐가 있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제가 평소 책을 취미로 읽지않아 깊이가 얕아 그럴 수 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을 읽은 현재 시점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면 괜찮을것같습니다. 세상에는 대학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무언의 의미 또한 전달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친구들에게 추천을 하는 이유는 중학생이 읽기에는 너무 심오한 내용을 다룬다고 생각되고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은 현실적으로 대학을 준비하느라 매우 급급한 상태이기 때문에 편안한 상태에서의 독서가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는 제목에 나와있듯 품격을 결정하는 자본들을 설명하지만 읽을수록 품격을 결정하는 자본들을 심오하게 풀어내어 
다른 일상생활에서도 이해와 공감을 유도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책에 대한 흥미를 유발 시키기에 좋아, 당장 이책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다른 가벼운 책들로 시작하여 나중에 다시한번 이 책을 찾을 날이 오면 좋을것같습니다. 

아비투스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아비투스? 이 책을 처음 접한 나는 ‘아비투스’ 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책의 첫 장에 ‘아비투스’의 의미가 나오는데, 아비투스란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를 뜻한다.

아비투스는 총 7가지의 자본으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다.

‘심리자본, 문화자본, 지식자본, 경제자본, 신체자본, 언어자본, 사회자본’

각 자본마다 최상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떤 심리를 가지고있고, 어떤 문화생활을 하며,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지 등 기준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최상위층에 초점이 맞춰져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떤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 에 대한 이야기며, ‘돈만 많은 부자’ 가 아닌 그것을 넘어서 ‘부자라면 이렇게 해야한다.’ 또는

‘최상위층의 부자들은 이렇게 한다.’ 라는 메세지를 담고있기 때문에 이 책을 속세에 찌든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흥미로운 책이었다.

자본을 뜻하는 말은 ‘돈’이다. 라고 단정지으며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바꿔줬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해야하는 일이 있다면, 최상위층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나도 따라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책이든 머리로만 넣으면 도움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해야만 정말 나에게 도움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사소한 것이라도 책에 나왔던 마인드셋이나 행동방식들을 따라하려 노력하는중이다.

아비투스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자본주의의 ‘자본’하면 보통 현금이나 부동산, 주식, 코인과 같은 불로소득을 떠오르기 쉽다. 
즉, 일정한 페이를 내고 서비스나 물건을 소비할 수 있는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자본’의 의미를 확장하여,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자본’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7가지를 뽑아 독자들에게 이 ‘자본’이 중요한 이유와 상류층과 중산층, 그리고 하류층이 나눠질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책을 읽으며 느낀 건 ‘사소한 하나’가 결국 계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계급 사회가 아니고, 사람들을 ‘계층’으로 나누는 것 만큼 뒤떨어진 생각은 없으나 이 책에서는 설명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계층 개념을 인용한 것 같다. 
뻔한 자기계발서가 아니고, 바로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라 개인보다는 집단 내에서 독서활동을 통해 서로의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활동을 하면서 나의 말투와 자세,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졌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아비투스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

자본주의의 ‘자본’하면 보통 현금이나 부동산, 주식, 코인과 같은 불로소득을 떠오르기 쉽다. 
즉, 일정한 페이를 내고 서비스나 물건을 소비할 수 있는 수단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자본’의 의미를 확장하여,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자본’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7가지를 뽑아 독자들에게 이 ‘자본’이 중요한 이유와 상류층과 중산층, 그리고 하류층이 나눠질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책을 읽으며 느낀 건 ‘사소한 하나’가 결국 계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계급 사회가 아니고, 사람들을 ‘계층’으로 나누는 것 만큼 뒤떨어진 생각은 없으나 이 책에서는 설명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계층 개념을 인용한 것 같다. 
뻔한 자기계발서가 아니고, 바로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라 개인보다는 집단 내에서 독서활동을 통해 서로의 인사이트를 공유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활동을 하면서 나의 말투와 자세,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졌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라플라스의 마녀 (히가시노 게이고 장편소설)

 우리 인간의 뇌 사용량은 일반적으로 10%정도라고 한다. 영화 ‘루시’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싶다. 영화 중간마다 여자 주인공의 뇌 능력 활성도가 표시되며 온갖 능력들이 추가된다. 이 영화를 언급한건 라플라스의 마녀또한 비슷한 것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인간이 뇌를 10%만 사용한다는건 틀린 이론에 가깝다는 결과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야기는 이야기로 취급하자는 주의여서 그저 책의 페이지에 몰두해서 보았다.
 주사위. 1~6까지 숫자가 적혀있고, 이를 굴려 랜덤으로 숫자가 나온다. 그러한 특성때문에 도박에 많이쓰인다. 그런 변수를 원하는대로 창출해낼 수 있다면 어떨까. 실제로, 던지는 힘과 각도 등이 모두 일치하면 주사위를 같은 수만 뽑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특정 물질의 역학적 데이터를 알고 순식간에 분석해낼 수 있는 그런 지적능력이 존재한다면 미래를 알아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라플라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다. 그가 윗 내용과 같이 얘기했다. 대충 그런 존재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부르는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곳에서 모티브를 얻었을 것이다. 옮긴이에 말에도 적혀있듯 라플라스의 마녀에서는 세계7대난제중 하나를 다룬다.
 
 보통 SF혹은 과학과 관련된 요소가 삽입된 소설이라고하면, 기본 지식이없거나 흥미가 풍부하지 않은이상 독자는 책을 바로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문학을 읽어내는 이유는, 공부를 하거나 머리에 부하를 주기위해서가 아니니까. 솔직히 이 글을 쓰면서 아쉬운 점은. 왠만하면 내가 타파해낸 줄거리와 개인적 견해들을 중간중간 섞어내는데, 이 책은 초반부,중반부,후반부 이렇게 나눌 것도없이 거의 대부분이 스포일러 이상이여서 말하기가 아쉽다. 또한 미스테리를 해결해내는 결과와 반전이 존재한다면, 결말까지 유도할 장치,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설계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지루함이 없었다.
 하나 특이한 점은 책에 나오는 대부분 인물들의 시점이 꼭 나온다는 것.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생각해본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뇌의 기능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최대치를 돌파했을 때 일어날 경우에 대해서. 역시 드물거나 참신한 소재는 아니지만, 단순 과학미스테리 장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책. 마냥 뻔하지는 않지만 당당한 주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들어준 책, 히가시노 게이고 – 라플라스의 마녀였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상상독서 베스트리뷰 선정 도서 | 대출하러가기]

 기아는 인류의 끈덕진 동반자로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인류 문명이 19세기 이후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눈부시게 향상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아 문제는 여전히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그동안 나는 기아는 그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 문제, 원인은 인구 증가와 환경 문제일 뿐으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부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네이버 블로그를 쓰며 얻은 기부콩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모은 돈으로 작게나마 기부를 하곤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나처럼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하며, 연예인들은 큰 돈을 기부하곤 하는데 대체 왜 인류의 기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지 의문이 생겨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쓰레기’, 누군가에게는 생명

 유엔인구기금에서는 2019년 기준 세계 총인구는 771,500만명이라고 하였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서는 1984년을 기준으로 지구는 120억명의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업의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40년 전이 지난 현재, 전세계 인구가 80억명도 되지 않는데 기아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고 있을까?

 전 세계에서 수확되고 있는 옥수수의 4분의 1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으면서 자라고 있다. 또한 그들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등의 영양과잉으로 인해 성인병과 같은 질병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들은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하기도 하고, 생산자들에게 최저가격을 보장해주기 위해 법률 등의 조치로 농산물의 생산을 제한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식량을 대량생산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그것들은 인위적으로 보조금을 더해 값싼 가격에 수출한다. 이것을 투기’, 혹은 덤핑 정책이라고 한다. 이러한 덤핑 정책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아프리카 각국의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 생산된 채소와 과일을 아프리카 농산물의 절반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시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아프리카 농가에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하루 15시간 이상씩 악착 같이 일하는데도 이러한 덤핑 정책 때문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 생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게 농산물과 식량은 생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넘어서 질병의 원인과 쓰레기로 처분되고 있다.

 외에도 기아 문제는 전쟁과 환경 면화, 삼림파괴 등으로 인해 증가하고 있다. 전쟁의 대표적인 예로는 아프리카 대륙 내전을 들 수 있다. 인종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금이나 석유 같은 토착 자원을 독점하고자 하는 선진국들의 욕망으로 인한 전쟁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1991년 기준 지구 전체 육지의 4분의 1 정도인 36억 헥타르의 땅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경작 가능한 건조지대의 약 70%에 해당한다. 즉 식량을 지배하기는커녕 물도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엔환경계획에서는 2011, 세계적으로 육지면적의 3분의 1에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사막화의 가장 큰 원인은 지구의 허파, 아마존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은 약 60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199816,833 제곱킬로미터, 즉 벨기에 국토면적의 절반 정도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냉장고 안 부패한 음식들

 책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인구의 18%, 아프리카에서는 35%,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약 14%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고 하였다. 신기한 점은 그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4분의 3은 농촌 지역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굉장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일까?

 원인은 바로 식민지 정책이 남긴 상흔때문이다. 20세기 전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서 강제로 유럽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작물을 경작하도록 하였다. 예시로 프랑스의 직물 공장에서 면화를 재배한 차드, 영국의 초콜릿 공장을 위해서 카카오 농사를 짓는 가나를 들 수 있다. 그들은 1960년대에 독립했지만 그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땅콩 농사를 대신한 세네갈에 경우 단일경작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아직까지도 집중 재배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식민지 정책에서 벗어나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량을 수입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먹는 음식을 생각해보았다.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대량 생산된 음식들 전부 부정부패한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좌절된 토마스 상카라의 개혁

 이러한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실행했던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다.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토마스 상카라는 군인이었는데 동료들과 구데타를 일으킨 뒤 그 나라의 국정을 맡고 있었다. 그가 국정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부패가 심해서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외국의 원조를 구걸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한 나라가 자급자족을 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능력이 있어도 사회 정의가 이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근본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자주 관리 정책으로 국내 30개 행정구를 자치체로 변경하고 주민들이 직접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관리도 직접 뽑고, 도로 건설이나 수도 사업 등 공공서비스를 직접 실시하였던 것이다. 개혁은 4년도 지나지 않아 농업 생산량을 크게 늘렸고 국가지출은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부르키나파소는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다민족의 복잡한 사회 구성은 한층 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정치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이웃나라 코트디부아르, 가봉, 토고 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권력자들은 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카라의 동지이자 참모였던 콩파오레는 그를 살해하였고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전에 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부정부패한 권력자들은 또다시 그들을 굶겼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론

 토머스 맬서스는 18세기 말 영국국교회 성직자로 인구론이라는 논문 한 편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 내용은 성직자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잔인했다. 이 논문에서 맬서스는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약자인 빈민층이 빈곤으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인구 증가를 고려했을 때 산술적으로 식량은 부족해질 것으로 빈곤층에 대한 자원을 끊어야한다. 식량난은 자연스럽게 인구를 억제하는 자연적인 작용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인구 감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굶어죽는 것이 당연하고, 우리는 굶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을 도울 필요가 없는 것인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운이 없는 거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잘 생각해보면 강대국과 대기업의 보이지 않는 횡포와 장악에서 우리들도 자유롭지 않다. 다만 우리는 기아들과 다르게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차이일 뿐이다. 현재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횡포로 인해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산림벌채 등 사회구조 문제들로 인해 빚어지는 피해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희망은 어디에?

 장 자크 루소는 약자와 강자를 한곳에 모아두고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부추긴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는 자유보다는 규제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과연 법칙이 사회 정의를 보장해줄까? 법 역시 권력자들의 부정부패, 힘에 의하여 쉽게 무너질 것이 분명하다. 법이 정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회 정의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천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수억 명이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는 그 주범이 살인적이고

불합리한 세계경제질서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 p.22

 

 희망은 서서히 변하는 공공의식, 즉 우리의 인식 변화에 있다. 사람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의 구조악을 위해 또다시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한 지금, 우리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후원도 좋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들을 또다시 이 사회로 가두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3세계의 나라들이 독립, 자립할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변화는 아주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런 작은 인식의 변화가 세계 여론에 영향을 주고, 경제 지배자들의 각성과 연대의식을 형성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모든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다. 내일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나의 모습, 독서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과자를 먹는 나의 모습.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이 책은 새로운 의지를 갖게 해주었다. 선입견은 버리고 지금부터 추악한 자본주의의 진실을 항상 마음에 되새기며 올바른 소비 활동을 하도록 하자.

지금 이 순간 (L’instant present,기욤 뮈소 장편소설)

 기욤 뮈소의 책 들중 두 번째로 남기게 되는 글. ‘지금 이 순간’ 이다. 가장 먼저 떠 오른건 뮤지컬 ‘지금 이 순간’ 이다. 하지만, 기욤 뮈소가 작가인걸보니 그런 생각은 사그라 들었다.
 대부분의 글에 ‘사랑’ 이란 요소를 꼭 넣어두는 작가의 특성이 있었는데 글의 초반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관리하던 등대, 그 밑의 지하실. 공간에는 수수께끼가 잠들어 있었고, 그걸 풀어야한다고는 하지만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다. 모순이지만 주인공인 아서는 묘하게 끌린다. 30년동안 풀어지지 않았던 수수께끼에.
 스토리전개상 당연히 나는 지하실로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라틴어로 적힌 글귀를 본다. “24방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 글을 무시하고 지하실 내부로 진입하자 오렌지향을 맡았다는 것을 기억한 뒤, 아서는 쓰러져버린다.
 글을 읽으면서 머지 않아 깨달은 것은. 타임슬립물이란 것. 주인공은 등대에게 당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 자신이 왜 시간여행을 한건지, 그에 대한 까닭을 묻는다. 24방위의 바람, 주인공 아서는 일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하루를 24년동안 살아야한다는 것. 즉, 아서는 하룻밤자고 일어나면 1년이 지나가버리게 된다. 등대의 글귀 중 뒷부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24일을 보내고 24년이 지난 뒤에는 자신의 흔적이 사라진다.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저주다.
 할아버지는 이미 시간여행을 하며 모든걸 잃어버렸지만, 아서는 그렇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간여행에서 만난 여인, 리자와 사랑에 빠지고 24일동안 일어난 일을 그려내는 내용이다.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스토리상 잊혀지는 저주를 피해내진 못했는데 그 끝에 숨은 반전이 있었다.
 작 중에서 ‘나’는 ‘나’를 스스로 평가하는 말 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사라지는 남자’이다. 아서는 소설집필에 빠진 나머지 가족들에게 소홀한 생활을 보냈고, 그 소설의 내용이 ‘지금 이 순간’이었던 것. 소설을 쓰던 아서는 그 원고를 멀리 날려버린채 마무리된다.
 여러모로, 아니 확실하게 좀 아쉬웠다. ‘시간’을 타이틀로 써먹는 책은 솔직히 널리고 널렸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헤치고 엮어내는지가 글의 몰입도를 이끌어낸다. 물론, 기욤 뮈소가 유명작가인 만큼 글의 흡입력자체는 충분했으나, 문제는 등대의 저주에 빠져 하루를 악착같이 보낸 아서의 노고와 관점을 마무리하는 데 있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시간을 뛰어넘지 못할 뿐더러 더욱이 미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판타지적 요소의 개입의 서술은 좋았지만 판타지를 갑작스레 현실로 끄집어내어 날려보내 끝맺음하는 것이 약간 성급한 결말이라고 여겨졌다. 책의 내용99가 시간의 역경속에서도 사랑을 갈구하고, 자신의 흔적을 그려내보이겠다고 발악한 아서였다면, 마지막1은 그 아서를 죽여놓았다는 것.
 지금 이 순간, 이 말을 어디에 접목시킬지 애매해져버렸다. 굳이 잇자면 하루를 소중히 여겨야한다, 일까. 이 책을 마지막까지 흥미있게 읽어본 독자들도 분명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결말이 아쉽다고 소설의 소설 속 인물의 투쟁 이야기를 비하할 순 없으니 말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1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현현하는 이데아)

 일본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2016년~2017년에 출간한 장편소설이다. 1권은 현현하는 이데아. 2권은 전이하는 메타포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작품이 1권,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고해서, 각각 글쓰기를 진행할 생각은 없음을 밝힌다.
 주인공은 나.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며, 작 중에선 과거회상이 주를 이룬다.
 ‘나’는 미술대학교를 졸업했고, 정계에 있는 거물들의 의뢰가 올 정도로 어느정도 명성이 쌓여져있는 초상화 화가로 묘사된다. 그런 그는 아내의 이혼통보를 받고, 별 무리없이 받아들이는 것 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 공허함을 쉽사리 이겨내지 못했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아마다 마사히코. 마사히코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는 스토리상에서 매우 유명한 화가였고, 그가 예전에 거주했던 어느 산 속의 집을 받기로한다. 겸사겸사 그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선생님 일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날 ‘나’는 집의 천장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한 그림을 발견한다. 그 그림은 ‘기사단장 죽이기’, 도모히코가 자신의 화집에 실어놓지 않은 미공개 작품이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등장인물인 한 여인과 젊은 청년, 그 청년의 검에 가슴팍이 꿰뚫린 늙은 기사, 그림의 구석에 어울리지 않는 바닥에서 뚜껑을 비집고 고개를 내민 의문의 생명체.
 단순 기사단장을 죽이는 이 그림을 본 이후,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주하는 멘시키 와타루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대가로 엄청난 돈을 제시해온다. 또한, 새벽에 잠을 뒤척이다 방울소리를 듣게된 ‘나’는 결국 그 방울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가는데, 돌무더기 밑에서 들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멘시키는 글에서 나이는 있지만, 미남에 부자로 묘사된다. 그런 멘시키의 도움을 받아 공사장비를 투입해 돌무더기를 파헤쳐 내려간 곳은 자그마한 원형 석실, 석실이 열리자 ‘나’의 눈앞에는 그림의 기사단장이 나타난다.
 
 기사단장이 나타난 이후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이 책의 핵심이다. 멘시키가 ‘나’에게 그림을 요청한 이유. ‘나’가 가르치는 교실에서 아키가와 마리에라는 13살의 여자 중학생, 그의 고모인 쇼코. 그들의 사이에 얽힌 이야기, 번외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수상해지는 멘시키의 정보를 캐내주는 작중 ‘여자친구’, 아내와의 이혼 후 방황하는 삶에서, 그리고 그 뒤에도 왜인지 마주치는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차)를 타고다니는 남성. 별거아닌 인물에도 그 뜻이 담겨있다.
 책의 중후반에 기사단장은 주인공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한다. 기사단장은 ‘이데아’ 였다. 이데아의 죽음 뒤에는 ‘기사단장 죽이기’그림의 구석에 있던 생명체가 나타나 주인공을 이공간으로 데려가준다. 그것은 ‘메타포’였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아마다 도모히코 또한 메타포를 보았다. 그리고, 기사단장(이데아)를 보았다. 이데아는 사람들의 눈에 모두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도모히코는 이데아를 기사단장으로 목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과연 무엇으로 보였을까, 생각해보면 좋겠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마리에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이공간으로 떠난 주인공은 폐쇄공포증이 있음에도 원형석실로 되돌아와 미쳐가기 직전에 멘시키에게 구해졌다. 이후 흰색 포레스터의 남자를 그린 그림(그에게는 공포감을 부여하는 존재였다)과 기사단장 죽이기를 모두 포장해서 쳐박아둔다. 그렇게 아마다 도모히코는 숨을 거두고, 멘시키와 마리에의 고모인 쇼코는 연인이 되며 나는 초상화의 일에 복직한다.
 작품의 초반에 헤어졌던 아내 유즈와 재결합을 한다. 그 사이 생긴 ‘무로’라는 이름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혼 후 방랑생활 중 꿈으로 유즈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인데 그것이 너무 생생했다는 것. 실제로 유즈또한 이혼 후 피임을 꾸준히 했으며, 임신과 출산 시기가 ‘나’의 꿈 시기와 너무 맞아떨어진다. 사실상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하루키의 글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 쓰나미가 닥치며 마을이 부서지고 ‘나’의 봉인된 그림들, 기사단장 죽이기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는 소실된다.

 이 책의 매력은 에필로그와 그 끝이다. 에필로그에서는 얼굴 없는 남자가 찾아온다. 정말 말그대로 눈,코,입이 있어야할 자리에 흑백만이 존재하는 그런 남자가. 그 남자는 책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장치는 아닌 것이다. 상당히 이중적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보통 책을 다 읽어서 여운이 남으면 끝 부분을 조금더 다시 읽어보는데 이 책은 처음을 한 번 더 읽어주게 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꽤 언급된다. 대놓고 표현되진 않았지만 이따금씩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만 같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책이 길다보니 내용이 길어졌는데, 나를 포함한 요즘 젊은 세대들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남들이 시켜서, 혹은 무언가를 성취하기위한 목적으로만 책을 읽곤 한다. 그것을 비판할 생각은 결코없다. 하지만, 정말 가끔식, 한 달에 한 번쯤은 문학소설을 읽어보면 어떨까하는 바램이다. 종이는 종이대로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