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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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아는 인류의 끈덕진 동반자로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인류 문명이 19세기 이후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눈부시게 향상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아 문제는 여전히 인류를 괴롭히고 있다. 그동안 나는 기아는 그저 다른 나라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 문제, 원인은 인구 증가와 환경 문제일 뿐으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부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네이버 블로그를 쓰며 얻은 기부콩과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모은 돈으로 작게나마 기부를 하곤 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나처럼 기부를 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하며, 연예인들은 큰 돈을 기부하곤 하는데 대체 왜 인류의 기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지 의문이 생겨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쓰레기’, 누군가에게는 생명

 유엔인구기금에서는 2019년 기준 세계 총인구는 771,500만명이라고 하였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서는 1984년을 기준으로 지구는 120억명의 인구를 거뜬히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업의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40년 전이 지난 현재, 전세계 인구가 80억명도 되지 않는데 기아 문제는 왜 해결되지 않고 있을까?

 전 세계에서 수확되고 있는 옥수수의 4분의 1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으면서 자라고 있다. 또한 그들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 등의 영양과잉으로 인해 성인병과 같은 질병에 걸려 사망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들은 식량을 대량으로 폐기하기도 하고, 생산자들에게 최저가격을 보장해주기 위해 법률 등의 조치로 농산물의 생산을 제한하기도 한다.

 그들은 이렇게 식량을 대량생산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그것들은 인위적으로 보조금을 더해 값싼 가격에 수출한다. 이것을 투기’, 혹은 덤핑 정책이라고 한다. 이러한 덤핑 정책의 결과는 치명적이다. 아프리카 각국의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 생산된 채소와 과일을 아프리카 농산물의 절반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시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아프리카 농가에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하루 15시간 이상씩 악착 같이 일하는데도 이러한 덤핑 정책 때문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 생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게 농산물과 식량은 생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넘어서 질병의 원인과 쓰레기로 처분되고 있다.

 외에도 기아 문제는 전쟁과 환경 면화, 삼림파괴 등으로 인해 증가하고 있다. 전쟁의 대표적인 예로는 아프리카 대륙 내전을 들 수 있다. 인종 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금이나 석유 같은 토착 자원을 독점하고자 하는 선진국들의 욕망으로 인한 전쟁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1991년 기준 지구 전체 육지의 4분의 1 정도인 36억 헥타르의 땅이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경작 가능한 건조지대의 약 70%에 해당한다. 즉 식량을 지배하기는커녕 물도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엔환경계획에서는 2011, 세계적으로 육지면적의 3분의 1에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사막화의 가장 큰 원인은 지구의 허파, 아마존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은 약 60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199816,833 제곱킬로미터, 즉 벨기에 국토면적의 절반 정도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냉장고 안 부패한 음식들

 책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는 인구의 18%, 아프리카에서는 35%,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약 14%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고 하였다. 신기한 점은 그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4분의 3은 농촌 지역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굉장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일까?

 원인은 바로 식민지 정책이 남긴 상흔때문이다. 20세기 전 유럽 각국이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서 강제로 유럽의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작물을 경작하도록 하였다. 예시로 프랑스의 직물 공장에서 면화를 재배한 차드, 영국의 초콜릿 공장을 위해서 카카오 농사를 짓는 가나를 들 수 있다. 그들은 1960년대에 독립했지만 그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땅콩 농사를 대신한 세네갈에 경우 단일경작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아직까지도 집중 재배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식민지 정책에서 벗어나 식량을 자급자족할 능력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식량을 수입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먹는 음식을 생각해보았다.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대량 생산된 음식들 전부 부정부패한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좌절된 토마스 상카라의 개혁

 이러한 기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실행했던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다.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토마스 상카라는 군인이었는데 동료들과 구데타를 일으킨 뒤 그 나라의 국정을 맡고 있었다. 그가 국정을 맡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의 부패가 심해서 정부가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는 외국의 원조를 구걸해야 할 정도였다. 그는 한 나라가 자급자족을 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능력이 있어도 사회 정의가 이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근본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자주 관리 정책으로 국내 30개 행정구를 자치체로 변경하고 주민들이 직접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관리도 직접 뽑고, 도로 건설이나 수도 사업 등 공공서비스를 직접 실시하였던 것이다. 개혁은 4년도 지나지 않아 농업 생산량을 크게 늘렸고 국가지출은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부르키나파소는 4년 만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다민족의 복잡한 사회 구성은 한층 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정치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이웃나라 코트디부아르, 가봉, 토고 등에 큰 영향을 미쳤고, 권력자들은 이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카라의 동지이자 참모였던 콩파오레는 그를 살해하였고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전에 나라로 돌아갔다. 이렇게 부정부패한 권력자들은 또다시 그들을 굶겼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의 인구론

 토머스 맬서스는 18세기 말 영국국교회 성직자로 인구론이라는 논문 한 편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 내용은 성직자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잔인했다. 이 논문에서 맬서스는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약자인 빈민층이 빈곤으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인구 증가를 고려했을 때 산술적으로 식량은 부족해질 것으로 빈곤층에 대한 자원을 끊어야한다. 식량난은 자연스럽게 인구를 억제하는 자연적인 작용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인구 감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굶어죽는 것이 당연하고, 우리는 굶지 않아도 되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들을 도울 필요가 없는 것인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운이 없는 거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잘 생각해보면 강대국과 대기업의 보이지 않는 횡포와 장악에서 우리들도 자유롭지 않다. 다만 우리는 기아들과 다르게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차이일 뿐이다. 현재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횡포로 인해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산림벌채 등 사회구조 문제들로 인해 빚어지는 피해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희망은 어디에?

 장 자크 루소는 약자와 강자를 한곳에 모아두고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부추긴다면, 그것은 폭력이다. 약자와 강자 사이에는 자유보다는 규제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과연 법칙이 사회 정의를 보장해줄까? 법 역시 권력자들의 부정부패, 힘에 의하여 쉽게 무너질 것이 분명하다. 법이 정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사회 정의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천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수억 명이

만성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는 그 주범이 살인적이고

불합리한 세계경제질서라는 사실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 p.22

 

 희망은 서서히 변하는 공공의식, 즉 우리의 인식 변화에 있다. 사람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사회의 구조악을 위해 또다시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한 지금, 우리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후원도 좋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들을 또다시 이 사회로 가두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3세계의 나라들이 독립, 자립할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변화는 아주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런 작은 인식의 변화가 세계 여론에 영향을 주고, 경제 지배자들의 각성과 연대의식을 형성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모든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다. 내일은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나의 모습, 독서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과자를 먹는 나의 모습.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이 책은 새로운 의지를 갖게 해주었다. 선입견은 버리고 지금부터 추악한 자본주의의 진실을 항상 마음에 되새기며 올바른 소비 활동을 하도록 하자.

지금 이 순간 (L’instant present,기욤 뮈소 장편소설)

 기욤 뮈소의 책 들중 두 번째로 남기게 되는 글. ‘지금 이 순간’ 이다. 가장 먼저 떠 오른건 뮤지컬 ‘지금 이 순간’ 이다. 하지만, 기욤 뮈소가 작가인걸보니 그런 생각은 사그라 들었다.
 대부분의 글에 ‘사랑’ 이란 요소를 꼭 넣어두는 작가의 특성이 있었는데 글의 초반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관리하던 등대, 그 밑의 지하실. 공간에는 수수께끼가 잠들어 있었고, 그걸 풀어야한다고는 하지만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다. 모순이지만 주인공인 아서는 묘하게 끌린다. 30년동안 풀어지지 않았던 수수께끼에.
 스토리전개상 당연히 나는 지하실로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라틴어로 적힌 글귀를 본다. “24방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 글을 무시하고 지하실 내부로 진입하자 오렌지향을 맡았다는 것을 기억한 뒤, 아서는 쓰러져버린다.
 글을 읽으면서 머지 않아 깨달은 것은. 타임슬립물이란 것. 주인공은 등대에게 당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찾아 자신이 왜 시간여행을 한건지, 그에 대한 까닭을 묻는다. 24방위의 바람, 주인공 아서는 일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 하루를 24년동안 살아야한다는 것. 즉, 아서는 하룻밤자고 일어나면 1년이 지나가버리게 된다. 등대의 글귀 중 뒷부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렇게 24일을 보내고 24년이 지난 뒤에는 자신의 흔적이 사라진다.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저주다.
 할아버지는 이미 시간여행을 하며 모든걸 잃어버렸지만, 아서는 그렇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간여행에서 만난 여인, 리자와 사랑에 빠지고 24일동안 일어난 일을 그려내는 내용이다.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스토리상 잊혀지는 저주를 피해내진 못했는데 그 끝에 숨은 반전이 있었다.
 작 중에서 ‘나’는 ‘나’를 스스로 평가하는 말 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사라지는 남자’이다. 아서는 소설집필에 빠진 나머지 가족들에게 소홀한 생활을 보냈고, 그 소설의 내용이 ‘지금 이 순간’이었던 것. 소설을 쓰던 아서는 그 원고를 멀리 날려버린채 마무리된다.
 여러모로, 아니 확실하게 좀 아쉬웠다. ‘시간’을 타이틀로 써먹는 책은 솔직히 널리고 널렸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헤치고 엮어내는지가 글의 몰입도를 이끌어낸다. 물론, 기욤 뮈소가 유명작가인 만큼 글의 흡입력자체는 충분했으나, 문제는 등대의 저주에 빠져 하루를 악착같이 보낸 아서의 노고와 관점을 마무리하는 데 있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시간을 뛰어넘지 못할 뿐더러 더욱이 미래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판타지적 요소의 개입의 서술은 좋았지만 판타지를 갑작스레 현실로 끄집어내어 날려보내 끝맺음하는 것이 약간 성급한 결말이라고 여겨졌다. 책의 내용99가 시간의 역경속에서도 사랑을 갈구하고, 자신의 흔적을 그려내보이겠다고 발악한 아서였다면, 마지막1은 그 아서를 죽여놓았다는 것.
 지금 이 순간, 이 말을 어디에 접목시킬지 애매해져버렸다. 굳이 잇자면 하루를 소중히 여겨야한다, 일까. 이 책을 마지막까지 흥미있게 읽어본 독자들도 분명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결말이 아쉽다고 소설의 소설 속 인물의 투쟁 이야기를 비하할 순 없으니 말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1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현현하는 이데아)

 일본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2016년~2017년에 출간한 장편소설이다. 1권은 현현하는 이데아. 2권은 전이하는 메타포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작품이 1권,2권으로 나누어져 있다고해서, 각각 글쓰기를 진행할 생각은 없음을 밝힌다.
 주인공은 나.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며, 작 중에선 과거회상이 주를 이룬다.
 ‘나’는 미술대학교를 졸업했고, 정계에 있는 거물들의 의뢰가 올 정도로 어느정도 명성이 쌓여져있는 초상화 화가로 묘사된다. 그런 그는 아내의 이혼통보를 받고, 별 무리없이 받아들이는 것 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 공허함을 쉽사리 이겨내지 못했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아마다 마사히코. 마사히코의 아버지, 아마다 도모히코는 스토리상에서 매우 유명한 화가였고, 그가 예전에 거주했던 어느 산 속의 집을 받기로한다. 겸사겸사 그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선생님 일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날 ‘나’는 집의 천장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한 그림을 발견한다. 그 그림은 ‘기사단장 죽이기’, 도모히코가 자신의 화집에 실어놓지 않은 미공개 작품이었다.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등장인물인 한 여인과 젊은 청년, 그 청년의 검에 가슴팍이 꿰뚫린 늙은 기사, 그림의 구석에 어울리지 않는 바닥에서 뚜껑을 비집고 고개를 내민 의문의 생명체.
 단순 기사단장을 죽이는 이 그림을 본 이후,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주하는 멘시키 와타루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대가로 엄청난 돈을 제시해온다. 또한, 새벽에 잠을 뒤척이다 방울소리를 듣게된 ‘나’는 결국 그 방울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가는데, 돌무더기 밑에서 들려오는 것을 확인했다. 멘시키는 글에서 나이는 있지만, 미남에 부자로 묘사된다. 그런 멘시키의 도움을 받아 공사장비를 투입해 돌무더기를 파헤쳐 내려간 곳은 자그마한 원형 석실, 석실이 열리자 ‘나’의 눈앞에는 그림의 기사단장이 나타난다.
 
 기사단장이 나타난 이후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이 책의 핵심이다. 멘시키가 ‘나’에게 그림을 요청한 이유. ‘나’가 가르치는 교실에서 아키가와 마리에라는 13살의 여자 중학생, 그의 고모인 쇼코. 그들의 사이에 얽힌 이야기, 번외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수상해지는 멘시키의 정보를 캐내주는 작중 ‘여자친구’, 아내와의 이혼 후 방황하는 삶에서, 그리고 그 뒤에도 왜인지 마주치는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차)를 타고다니는 남성. 별거아닌 인물에도 그 뜻이 담겨있다.
 책의 중후반에 기사단장은 주인공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한다. 기사단장은 ‘이데아’ 였다. 이데아의 죽음 뒤에는 ‘기사단장 죽이기’그림의 구석에 있던 생명체가 나타나 주인공을 이공간으로 데려가준다. 그것은 ‘메타포’였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아마다 도모히코 또한 메타포를 보았다. 그리고, 기사단장(이데아)를 보았다. 이데아는 사람들의 눈에 모두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도모히코는 이데아를 기사단장으로 목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과연 무엇으로 보였을까, 생각해보면 좋겠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마리에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이공간으로 떠난 주인공은 폐쇄공포증이 있음에도 원형석실로 되돌아와 미쳐가기 직전에 멘시키에게 구해졌다. 이후 흰색 포레스터의 남자를 그린 그림(그에게는 공포감을 부여하는 존재였다)과 기사단장 죽이기를 모두 포장해서 쳐박아둔다. 그렇게 아마다 도모히코는 숨을 거두고, 멘시키와 마리에의 고모인 쇼코는 연인이 되며 나는 초상화의 일에 복직한다.
 작품의 초반에 헤어졌던 아내 유즈와 재결합을 한다. 그 사이 생긴 ‘무로’라는 이름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혼 후 방랑생활 중 꿈으로 유즈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인데 그것이 너무 생생했다는 것. 실제로 유즈또한 이혼 후 피임을 꾸준히 했으며, 임신과 출산 시기가 ‘나’의 꿈 시기와 너무 맞아떨어진다. 사실상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하루키의 글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곳에 쓰나미가 닥치며 마을이 부서지고 ‘나’의 봉인된 그림들, 기사단장 죽이기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는 소실된다.

 이 책의 매력은 에필로그와 그 끝이다. 에필로그에서는 얼굴 없는 남자가 찾아온다. 정말 말그대로 눈,코,입이 있어야할 자리에 흑백만이 존재하는 그런 남자가. 그 남자는 책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장치는 아닌 것이다. 상당히 이중적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보통 책을 다 읽어서 여운이 남으면 끝 부분을 조금더 다시 읽어보는데 이 책은 처음을 한 번 더 읽어주게 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꽤 언급된다. 대놓고 표현되진 않았지만 이따금씩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만 같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책이 길다보니 내용이 길어졌는데, 나를 포함한 요즘 젊은 세대들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남들이 시켜서, 혹은 무언가를 성취하기위한 목적으로만 책을 읽곤 한다. 그것을 비판할 생각은 결코없다. 하지만, 정말 가끔식, 한 달에 한 번쯤은 문학소설을 읽어보면 어떨까하는 바램이다. 종이는 종이대로 자신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CHANGE 9(체인지 나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

 Z세대, 알파세대가 창조하는 새로운 대륙, 메타버스는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와 가공,추상을 의미하는 메타를 더한 합성어로, 3차원 가상세계를 뜻한다. 강의에서 최재붕 작가님은 메타버스는 미래 산업의 가능성을 품은 신대륙이라며 그런 내용에 대해 강의를 해주셨다. ‘디지털 문명에서 팬덤을 만들어라!’에 대해 우리나라 K콘텐트가 글로벌 팬덤 파워가 엄청나다며 웹툰시장 세계 1위인 카카오와 네이버를 예로 들어주셨고, 재밌게 강의를 들었다. 매우 유익한 강의였던 것 같다.

CHANGE 9(체인지 나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

문명의 발전 속도가 과거 2,3차 산업혁명을 넘어선 현재와 우리들에게 코로나19라는 위기를 통해, 이 역동의 시대를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 강의를 들으며, 우리는 앞으로의 미래에서 무엇이 진화하며, 무엇이 도태되는지 알아야 하며 그것을 선택하는 방법이 현재의 우리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가르킨다.

CHANGE 9(체인지 나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

첫번째로 메타인지라는 주제는 저를 정의하고 있는기주느 제가 알고있는 것에 대한 정의부터 달라진다, 검색하면 모든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저를 다른 존재로 정의하게 되고
두번째 이매지네이션은 내가 하는 모든일은 메타인지에서 출발하며 상상력도 크게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휴머니티는 저의 대인관계망도 크게 바꾼거같습니다. 현재사회는 휴머니티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한 덕목이 됬습니다.
네번째 다양성은 대중매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매일매일 제가 선택한 플렛포에 모여 공유하며 생각을 나눌 수 있어 다양한 생각을 갖게하자라고 느꼈고
다섯번째 디지털 트렌스포메이션은 인류 기본 생활 공간이 디지털 플렛폼으로 옮겨가며 생활이 바뀐것이 디지털 트렌스포메이션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섯째 회복탄력성은 인류의 표준이 바뀌면 실패 후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역량도 달라질것이라고 배웠고
일곱째 실력은 포노 사피엔스 시대에 가장 필요한것은학벌 혈연 지연도 아닌 실력이라고 했습니다. 
여덟째 팬덤은 이시대 소비자들이 스스로 만드는 자발적 팬덤은 막강한 권력이 된다고 배웠고
마지막으로 진정성은 포노 사피엔스 문명에서 가장 크게 바뀌는것은 모든 관계에서 진정성이 필수적이라고 배웠습니다.

CHANGE 9(체인지 나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

코로나19로 인해 많은게 바뀐 우리 일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다. 바로 ‘포노 사피엔스 코드’라는 것인데, 이것은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새로운 문명 표준이 된다. 9가지 코드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안에 담겨진 풍부하고 심도 깊은 내용을 엿볼 수 있다.

CHANGE 9(체인지 나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

현재 문명은 디지털 문명의 이동이 필수화되었고 코로나19로 인해 그 이동이 더욱 가솓화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최재붕 교수는 이 점에서 포노 사피엔스 문명으로 변화를 거부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지금처럼 살아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삶의 방식 변화에 대해서 수많은 설명과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

CHANGE 9(체인지 나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

최재붕 교수님의 강연을 처음 들으면서 ‘Change 9’ 이라는 책을 새롭게 알게 되고, 디지털 문명을 이용하는 신인류 ‘포노 사피엔스’라는 용어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로 점차 발전하면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해졌고, 정보 전달의 속도도 빨라졌으며 여러 기능들이 탑재되면서 사실상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느꼈었다. 내가 사용했었고 사용하고 있는 위키피디아, 쿠팡, 네이버, 넷플릭스 등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들이 포노 사피엔스가 창조하는 디지털 플랫폼 경제이자 확장되어가는 세계관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이제는 디지털 세계로 경제와 일자리를 모두 바꾸고 있으며 MZ세대는 디지털 세계로 확장하면서 성공을 경험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최근 들어 ‘메타버스’라는 용어가 눈에 띄게 많이 보이고, 많이 들렸었는데, 이것이 곧 Z세대와 알파세대가 창조하는 새로운 대륙이며, 이미 로블록스나 zepeto 등과 같이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 와닿았다.

CHANGE 9(체인지 나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

저자와의 만남 프로그램을 통해서 최재봉 작가님의 체인지 나인 이라는 책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였다. 특히 강연을 들으면서 포노사피엔스에도 적응이 필요할 것 같고 이후에는 더 빨리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들었다. 동시에 이후의 신인류는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