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감춰진 인간 정신의 숨은그림찾기)

  독서클럽활동때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선택한 것이 아닌 갑자기 어느 날 친구들과 밥 먹으면서 본인들의 꿈 얘기를 하다가 서로 감탄하고 신기해하다가 문득 꿈과 관련된 책을 독서클럽 활동때 읽을 책으로 선정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정말 의무가 아닌 서로가 흥미로워 했던 이야기에 대한 책을 읽게 되어 책을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고 생각보다 이 책은 읽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 팀은 이 책을 읽고 책에서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해석하기로 했는데 책 내용이 어려운데 내 꿈까지 해석하려니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든지 공감할만한 사례들이 있었고 굉장히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우리 신체가 받은 자극으로 인해 그 자극이 꿈의 출처가 되어 꿈을 꾼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나는 꿈속에서 양치를 하고 있었는데 진짜 현실에서 나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얼굴에 침을 뱉고 있었다. 침을 딱 뱉었을 때 잠에서 깼는데 정말로 이 경험은 아직까지도 잊지못할 부끄럽고 재미난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여러 사례에서 자주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장미의 이름 세트 (전2권)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어린 수도사인 아드소의 시선으로 교황청과 황실의 대립이 심했던 중세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당시 교회의 청빈을 주장하는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그를 반박하는 교황청 및 다른 교단들의 반목이 심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 수도원에서 각 교단이 모여 토론을 하기로 하는 것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잘 알지 못했던 서양의 중세시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독서모임이라는 특별한 활동을 이유로 책을 읽을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학기 중에는 학교에 가느라, 시험공부를 해야 하느라, 방학 때는 취미 활동을 하느라 등의 이유들을 들어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생각을 쉽게 합리화하였다. 하지만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마지막 시간에 발표를 해야하고 매주 하는 활동에 따라가려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므로 독서모임이라는 활동을 내세워서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점이 좋았다.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생 속에서 많은 도덕적 딜레마를 마주하고 있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일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이 옳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선의의 거짓말이 그렇다.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온 군인들을 숨겨준 신부는 거짓말을 해야할까? 아니면 사실대로 말을 해야만 할까. 거짓말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인 것임은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일임이 분명하지만 위와 같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현실적 해결 방안과 도덕적 옳은 행위 사이에서의 장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도덕적 딜레마를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사상가들의 견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일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항상 옳은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언명령을 따르라고 한 칸트 조차도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기준을 정의할 수는 없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명제는 완전무결하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 그것이 거짓말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철인통치를 통해 완벽한 도덕적 통치의 이데아를 꿈꾸던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천성이라는 틀에 얽매여 있다. 가장 적합한 자가 가장 적합한 일을 하는 것. 어떻게 보면 옳은 말인 듯 싶으나 또 한편으로는 당대의 노예제를 옹호하던 사상이기도 했다. 노예는 노예로 타고났다고 주장하던 그의 사상은 현대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음직하다. 이렇듯 다양한 학자들의 사상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그것이 해결책으로 정의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들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좀 더 나은 지표를 얻을 수 있는 방향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시대에는 자유시장주의가 대부분 국가에서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분배의 정의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정된 재화를 공정하고 형평성있게 나눌 수 있는지,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있다. 또한 저자는 롤스의 차등적 분배가 과연 현실에서 적용되었을때에 효용이 있는지, 실제로 그러한 가설을 현실로 끌어와 적용할 수 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과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떤 식으로 균형을 이루어야할지 늘 고민해야한다. 이 책은 그러한 철학적 질문을 무수히 많이 던지고 사고하게끔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의)’에서는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이 책은 수용소 내에서의 참혹한 현장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그리고 수많은 죽음을 연상시킨다글쓴이는 오스트리아 빈 의과대학 출신의 우울증과 자살에 관심이 많은 정신과 의사이다. 1937년에 글쓴이는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지만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해버리고 이때부터 유대인 의사들은 순수 독일민족 아리안 족의 치료를 금지했으며유대인만 치료할 수 있는 종합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우생학적 관점을 앞세워 안락사 프로그램으로 희생될 위험에 처한 수많은 유대인 환자들을 자신의 의학적 소견으로 구하기도 했다글쓴이는 1944년 10월 19~1945년 4월 27일 약 6개월간 수용소에 있었으며 수용소에서 어머니아내동생을 잃었다

 

  글쓴이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수감된 것이 아닌 체험이라 명칭하고 정신과 전문의의 시각으로 수감자들을 바라본다수감자들은 일정기간이 지나 수용소 생활에 적응을 하게 되면 옆에 누군가 감시병에 의해 때려 죽음을 당해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게 되었으며 시체를 보며 무덤덤하게 수프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무감각) 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그렇지 못하고 일반 동물과 구분되는 바 없이 자신만의 생존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생존하기만을 바라는 사람을 글쓴이는 신경정신력이 퇴색된 사람으로 보았다이를 보며 글쓴이는 가혹한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 – 121page’라고 보았다최종적으로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 가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이 선택이 크다고 글쓴이는 보았다그리하여 글쓴이는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의 한 개념을 만들어낸다. ‘로고테라피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근본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사는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정신치료법이다.

 

   “ (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19page

 

  해당 책은 단순히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관련하여 참혹함과 잔혹성만 보여주지 않는다. 수감자들의 정신적 치료에 있어서 ‘로고테라피’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법을 살펴보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존재 이유에 대해 깊게 고찰해보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다.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치료법을 알아보면서 삶을 긍정적으로 돌아보게 하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장미의 이름 세트 (전2권)

  장미의 이름은 당시 어린 수련사 아드소의 시선에서 교황청과 황실의 대립이 심했던 중세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을 주요 가닥으로 하고 있다. 또한 당시 교회의 청빈을 주장하는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그를 반박하는 교황청 및 다른 교단들의 반목이 심화되자 이를 해결키 위해 이 수도원에서 각 교단이 모여 토론을 하기로 하는 내용 또한 장미의 이름의 핵심적 내용이다. 
  본인은 가장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 전 관련 배경지식의 중요성을 느꼈다. 중세 기독교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매우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는 독서클럽 도서로 선정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독서클럽 구성원들끼리 역할을 분담해서 중세 기독교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서로에게 알려주면서 배경지식을 수월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장미의 이름은 역사적 배경지식이 거의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지만 어떤 책이든 어느정도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독서 전 활동의 중요성을 확실히 느끼게 해준 것 같다.
  다음으로 장미의 이름을 읽으면서 책의 중심 내용인 연쇄살인사건도 분명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부패해보이는 중세 기독교의 역사가 나를 더 사로잡았다. 당시의 기독교는 신앙에 엄청나게 물들어 있었고 지식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절대권력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회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한 방법은 외부세계와 분리하고 내부사회를 격리하는 것이었다. 특히 교회는 대중과 민중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할 줄 알고 대응할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불순한 이념에 오염된 소수의 광신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진리에 등돌릴 수 있는 아둔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또한 이 책에서 보이는 교회는 정치적으로는 황제에게 쩔쩔매고 민중들에게는 착취를 일삼는 모습이었다. 이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의 교리만을 기준으로 대중들을 심판하고 처벌하기도 했다. 이것을 보고 나는 자신들의 생각 또는 이념과 다르면 상대를 배척해 속히 빨갱이 라고 이름붙여버리는 ‘색깔론’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신의 교리와 다르면 저항을 두려워 하고 입을 막고 고문하고 심판했던 당시의 교회의 역사가 과연 당시만의 문제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나는 위와 같은 부분을 인상깊게 여기면서 책을 읽었지만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은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아주 다양한 재밌는 책이다. 정말 다양한 부분에서 중세와 기독교에 대한 부분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책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알 것 같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또 다른 관점들을 찾아가는 재미도 분명이 한 몫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요 줄거리인 수도원 내 살인사건과 더불어 중세 기독교의 역사, 구조, 수도사들의 직책 등 많은 정보들을 얻어가는 시간이었다. 다음에 또 장미의 이름을 읽게 된다면 나는 어떤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읽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이 책 제목만 처음 봤을 땐, 그저 단순히 허클베리(줄여서 헉)의 모험만을 열거해놓은 책이라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에는 모험담 뿐만 아니라 모험에서 드러나는 여러가지 당대 사회의 현실, 문제점 등 우리가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솔직히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역시 가장 크게 놀랐던 점은 아무래도 책의 어마무시한 크기였다!!! 무려 6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정도일줄은 상상도 못했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미국 문학의 링컨’으로 일컬어지는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이다. 내가 이 작가한테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은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책의 본문 앞에 있는 경고문이다. 
–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者)는 기소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者)는 추방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者)는 총살할 것이다.” –
  이 경고문이 마치 내게 책을 읽을꺼면 똑바로, 제대로, 집중하면서 읽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줬다고 해야되나.. 살짝 책을 읽기 전부터 주눅이 잔뜩 든 것만 같았다. 또한, 우리는 보통 책을 통해 어떠한 사건이나 인물이 주는 깨달음, 교훈 등을 얻을려고 하는 편인데, 이 작품에서는 애초에 그러한 행위들을 막아버리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만 같았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줄거리는 책의 방대한 양만큼 설명하자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간단하게 추리고 추려서 이야기 하자면, 헉이 더글라스 과부댁과 그녀의 동생인 노처녀 왓슨 아래에서 그럭저럭 자라던 중, 아버지로부터 유괴를 당한 뒤 탈출하여 우연히 도망쳐 나온 흑인 노예 짐과 미시시피 강을 따라 모험을 하게 되면서 좌초지종을 겪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유심있고 주의있게 봤던 점은 바로 ‘백인’ 헉과 ‘흑인’ 짐 둘 사이의 관계이다. 겉으로 봤을 때, 헉이 짐을 잘 챙겨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 속은 완전히 그런건 아닌 것 같았다. 짐은 노예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케이로에 다다르자, 곧 자유가 된다는 희열에 도취되어 있었다. 이러한 짐을 본 헉은 백인인 자신이 흑인 노예를 도와 도피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헉과 톰 소여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 책의 전작인 ‘톰 소여의 모험’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톰은 거친 말과 행동을 일삼으며, 능동적인 인물로서 자기 스스로 모험을 택하고 주도한다. 반면, 헉은 아버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모험에 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험하는 와중에도 수동적으로 모험에 마지못해 임하여 모험 중에 일어나는 사건에도 별 다른 흥미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헉은 적극적으로 모험에 임하는 톰 소여를 의식하고 있으며, 일종의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노인과 청년으로 구성된 두 사기꾼의 헉&짐을 대상으로 한 사기행위, 어떻게 해서든 짐을 구출해내려는 헉의 마음과 의지 등 책에서 강렬히 기억남는 장면들이 몇몇 있다. 이 책은 앞서 언급한 경고문처럼 정말 무언가 얻어갈려고 하면 혼날 것만 같은 무서운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책을 읽고 머릿 속에 많은 의문점들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된 부분이 꽤 있었고, 또 우리의 상상을 요구하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은 정말이지 미스테리한, 또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꿈의 해석 (무의식의 세계를 열어젖힌 정신분석의 보고,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8)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이 책을 읽기로 했을 때 나는 내가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지 의심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 책이 어렵다고 들었을 뿐더러 ‘꿈의 해석’이라는 제목이 너무 심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서문에서 이 책을 통해 모든 서민들이 꿈을 해석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서문을 읽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꿈을 해석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다 읽은 후, 나는 꿈을 해석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꿈은 여태까지의 내 무의식이 만들어냈고 나는 내 무의식을 의식하지 못하기에 꿈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다만 꿈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앞으로도 꿈을 해석 해봐야겠다고 느꼈다. 
 방학동안 이 책을 읽으며 내 꿈, 나의 무의식, 그 속에 상처는 무엇인지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조금 더 내적으로 성장한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이 책을 꿈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추천하진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자기 자신에 대해 깊숙히 생각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왜냐하면 책을 읽으며 나는 어땠는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이 책을 선택하자고 의견을 내게 된 곳은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긍정적인 힘 이라는 리뷰를 보고서 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각자의 비극 속에서 최악을 맛보며 산다. 하지만 그 고통은 누군가가 도와줄 수 없는것이기에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삶에서 이 책의 저자가 계속 말하는 로고테라피는 남이 도와줄 수 없는 그 고통에 정말 좋은 접근방법이라 생각했다.  처음 읽을 때는 로고테라피라는 것을 빅터프랭클이 이름을 붙였다는 것을 모르고 읽었는데 빅터 프랭클이 그저 머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직접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직접 체험 하면서 이 생각을 결론 지었다는 것에서 더 믿음이 갔다.
 빅터 프랭클의 생생한 나치정권 시기의 수용소 이야기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수용소의 감시관도 상급관리자도 나치 정권이 오래 되면 될 수록 복어독에 뇌가 중독되어가는 것 처럼 수용소 사람들의 생각이 마비되어 가는 것 처럼 보였다. 같은 수용소에 갇혀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학대를 가하는 자아 있는 가 하면 나치 정권아래에 있으면서도 수용소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사람에게는 착하거나 나쁜 것이라는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아주 좁게 생각을 해보았다.
 로고테라피 예시 중에 하나로 남들 앞에 서서 발표하면 땀이 많이 나는 사람에게 ‘난 남들에게 땀나는 걸 보여줄꺼야!!’라고 반대로 생각하라도 말해주는 방법이 있는데 그 후 그 사람은 땀을 안 흘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즉 죽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죽을꺼라고 자기 자신한테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그 알량한 사람의 밑바닥이든 그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든 로고테라피에 대해서이든 읽는 사람에게 좋은 교훈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이 책을 사람들이 읽으며 “이 책은 신의 말이나, 100%로 읽는 사람의 인생에 오직 맞는 말 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말하고 싶은 로고테라피 이외에 그냥 나 혼자 배운 것이라면 어떤 최악의 인생이든(마치 죽음만 존재하는 수용소)간에 결국에는 살아남은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거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있는 자 만이 억울함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책을 만나게 되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책 덕분에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련 영화를 다양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인데 특히 “제이콥의 거짓말”과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를 알게 해줘서 너무 고마운 책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이 책을 보고 나치는 왜 수용소를 만들었는 지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는 유대인을 모아서 죽이기 위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저자가 수용소에 처음 간날,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이 구분되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노동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강도 높은 노동을 하던 사람들을 보고 어차피 죽일꺼 최대한 착취하고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역시 틀린 생각이었다.
수감자들에게 극심한 영양실조가 걸릴 정도라고 하더라도 끼니를 주었으며, 병원도 있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도 있고 매우 적은 양이나 약도 있었으며, 환자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감자들의 수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을 수용하기 위한 수용소를 짓기 위해 넓은 면적의 토지와 건축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영양소도 거의 없고 항상 굶주릴 정도로 적은 양의 음식이라도 수감자들의 수를 생각하면 나치는 큰 비용을 치뤘을 것이다.
수용소를 만든 이유는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책 내용을 이야기 하자면, 크게 나치 수용소의 생활과 수감자들의 정신 상태, 그리고 로고테라피로 나눌 수 있다.
실제로 책은 1장부터 3장까지 나누었으나, 3장은 2장의 요약이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으며 20쪽 정도의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먼저 수용소 생활과 수감자들의 정신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동상으로 인해 발이 부어서 신발도 제대로 못신는 수감자들은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저자에 따르면, 저자를 포함한 수감자들은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 죽어도 어떤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내면으로 도피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한번은 일을 하러 가는 도중에 아내를 생각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는 수용소지만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는 수감자들이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성욕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진정한 사랑을 느꼈다.
이로보아, 사랑과 성욕은 독립된 감정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고 조금 비약적이지만, 더 확장을 하면 감정은 욕구와 독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내가 알고 있는 이론과 다른 이론이었다. 누군가 말하기를 감정을 단순화 시킨다면 불쾌와 쾌로 나뉘어지고 이 두 감정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 작용한다고 했다.
배가 부르면 쾌를 느끼고, 배가 고프면 불쾌를 느끼듯이 말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을 유추했을 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감정과 욕구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정신질환을 극복하는 치료법이다.
이 중 인상 깊은 것은 아쉽게도 로고테라피가 아니었다. 저자에 따르면, 개인의 성격과 집단의 성격은 다르다고 한다.
같은 수감자이면서도 다른 수감자들을 억압하던 카포들이 있는 가하면, 나치 대원임에도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수는 적었겠지만.
그리고 또 한가지 인상 깊은 것은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인 부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경과 달리 말이다.
그 힘든 수감 생활속에도 자신의 빵을 나누어준 수감자들도 있다고 한다. (소수지만)
따라서 환경이 아무리 행동을 유도할 수는 있어도,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여러모로 화가나고(나치에 대해) 가슴이 미어지며, 생각이 깊어지는 책이었다.

 

무정 (세계문학전집250)

  <무정>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였다. 그렇기에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 조금 지루한 책이 될 것 같다는 우려가 앞섰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교과서의 <무정>은 그저 <무정>의 일부임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교과서에 실린 마지막 부분은 ‘형식’이 계몽 사상에 눈이 먼 비판의 대상으로서 신세대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맥락을 읽고 보자면 그는 그저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은 친구인 ‘우선’과 어딘가 비슷한 느낌을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저 스쳐가는 인물인 줄만 알았던 영채도 그녀에게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녀가 겪었던 동성애적인 사건이 지금 독자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보이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충격을 안겨줬을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여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열녀를 숭배하고 중요시 하는 것, 기생을 직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그녀가 부적절한 성관계를 갖기 않기를 바라는 노골적인 ‘형식’의 이중적인 모습에서 페미니즘적인 비판의도가 있다고 읽었다.
  이광수 작가의 정확한 의도와 생각은 이제와 알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 시대 타 작가들에 비해서는 동성애와 여성관에 대한 관념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작가라는 점은 본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우리가 국어 교과서에서 읽고 이해한 작품과 그 작품의 의도가 온전히 전해진 것이 맞을 지, 이제껏 해보지 않았던 질문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