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책은 한때 sns를 뜨겁게 달구었던 화재의 책이다. 이 책을 둘러싼 많은 구설수와 말들은 아직까지 인터넷상에서 떠돌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욕으로 어떤 상황에서는 칭찬으로 쓰이는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선택했다.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에. 이갈리아의 딸은 페미니즘을 진득하게 다뤄낸 완벽한 미러링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는 불편할 것이고 기분 나쁠 것이다. 작가는 그 불편함을 의도했다, 책을 읽으며 기분이 나빴다면 작가의 의도대로 책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잘 읽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갈리아의 딸이라는 책 속 사회는 현재의 세계와는 전혀 반대된다. 남성이 여성이고 여성이 남성인 그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이질감을 불러일으키고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무엇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혼돈이 오게 되는 것이다. 이갈리아의 남성들은 치마를 입고 다니며 통통한 몸과 작은 키를 강요받는다. 이곳에서는 남성미는 작고 통통한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여성이 남성을 데리고 가주지 않는다. 라는 기본적인 믿음이 바탕이 되어있다. 우리는 책의 초반부에서부터 이질감과 불편함에 부딪힌다. 이 작은 단락부터가 현 사회의 많은 부분을 보여주고 있다. 왜 현 사회에서 뚱뚱한 여성들을 찾아보기 힘든 것인지. 이것은 위의 기본적인 믿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그렇게 알게모르게 세뇌되었던 것이고 교육 받아 왔던 것이다. 많은 미디어에서 혹은 어른들의 입에서 여성은 뚱뚱하면 안된다라는 말에 길들여져 많은 뚱뚱한 여성들이 자신을 혐오하고 구석에 숨게했는가.


이갈리아의 딸의 책 속의 남성들은 스토리가 진행 될 때 마다 점점 각성한다. 남성해방운동을 펼치며 시위를 한다. 많은 미디어에서 이것을 폭동 혹은 변태들의 소동이라고 치부하며 사회의 문제아 취급하며 기사로 다뤄낸다. 나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흐름들이 현 한국의 페미니즘이 흘러가고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차별을 느낀 여성들이 점차 각성을 했고 각자 다른 방식대로 여성운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많은 과격한 부분이 기사화되어 현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문제 덩어리 혹은 도태 여성들을 발악 쯤으로 치부해 버리고 있다. 우리는 이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권력층은 남성들이며 그들의 판단의 잣대는 항상 그들이 유리한 위치에서 작용된다.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것이든 당연하게 넘어가면 안된다.


이갈리아의 딸을 읽으며 현 사회에서 습관처럼 베어있는 여성혐오, 여성차별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현 사회의 여성혐오에 길들여져 무엇이 여성혐오인지 인지 할 수 없었던 여성들과 그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아무말 없이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에 관해 깊게 얘기할 수 있어 굉장히 뜻깊은 시간들이었다.

공무원 덕림씨 (지방행정의 달인 TED초청강연자)

처음에는 가벼운 만화로 시작해서 책을 쉽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누구보다도  지방의 체계들을 잘 알고있다. 그래서 지방의 혁신은 다른 혁신보다도 어렵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책의 저자는 어떻게 보면 폐쇄적이고 변화를 주기 힘든 곳에서 변화를 추구해 나갔다. 보통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만 집중해서 다른 것은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도 말이다. 그 덕분에 저자의 고향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각인이 될 수 있었다. 저자가 해결해나간 문제들과 방식들에서 나름의 교훈들도 얻어갈 수 있었다.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베스트셀러 작가 리안 모리아티의 장편소설,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먼저 리안 모리아티의 <정말 지독한 오후>를 재밌게 읽어서인지 보자마자 눈에 띈 책이다.
 프랜시스. 그녀는 로맨스 소설가로서 전성기를 날리고 이제는 진부한 로맨스소설을 쓰는 강제 은퇴식을 치르게 될판인 소설가이다. 두번의 이혼과 얼마전에는 연애사기를 당해서 돈과 마음의 상처를 잃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읽은 사람의 악평으로 인해서 더더군다나 힘들어 하고 있는 과정중에 지인의 추천으로 마음과 몸을 치유할수 있다는 유명한 건강 휴양리조트에 거액을 지불하고 10일간의 일정으로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곳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프랜시스는 자신과 같은 휴양을 위해서 온 아홉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휴양지에서 목표를 가지고 왔는데, 프랜시스와 함께 들어온 벤과 제시카는 하루아침에 로또에 당첨이 되어서 부자가 되어서 많아진 돈 때문에 그들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지만 돈이 많아지면 행복해 질줄 알았던 삶이 벤과 제시카에에는 상처로 남는 생활들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부생활을 위해서 휴양리조트에 신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랜시스와 리조트에 오기전 만났던 토니는 잘나가는 사업가이지만 자신의 몸의 이상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보기 위위해서 이 리조트에 신청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인, 나폴레옹와 헤더, 조이 그들은 조이의 쌍둥이오빠를 잃은 그들은 조이의 오빠 잭의 기일을 기리기 위해서 셋이 이 휴양리조트에 와서 오붓하게 잭을 기리기 위해서 오게 되었다. 리고 카멜은 네아이를 둔 이혼녀이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때문에 남편이 떠났다 생각하고 다이어트를 하기를 위해서 이 휴양 리조트네 오게 되었고, 그리고 이혼전문변호사 리스, 각기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 휴양리조트에 타의든, 자의든, 오게 되어서 그들은 이 휴양 리조트에서 시키는 과정들을 밟게 되는데 그들의 프로그램에 반감을 가지는 이들도 있지만 리조트 프로그램과정을 밟아가게 되는데 그 속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의 모습을 뒤돌아보게 되면서 자신들의 내면의 깊은 속에서 자신들도 몰랐던 아픔과 슬픔을 들춰내면서 슬퍼하기도 한다. 모든 휴대폰과 전자기기를 압수당하는 것에 반감을 가졌던 첫날이후 그들은 명상과 수련을 통해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게 되고,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 리조트의 원장 마샤가 있다. 마샤는 자신이 만들어오 놓은 프로그램을 하나씩 실행하기 위해서 그들의 반발을 일축시키고 프로그램을 시작하는데 잘 진행되리라 믿었던 프로그램에 위기가 닥쳐오게 되고, 그 아홉명은 한공간에서 그들만의 시험에 빠지게 되고, 마샤가 계획해 놓은 게임속에서 서로를 변호하며 그 게임을 하게 되고, 그리고 드디어 들어나는 그 평온의 리조트의 어두운 모습이 들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빠져 나온 아홉명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마샤의 불법적인 약물에 의해서 그들은 이용당했다 생각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그들의 모습은 그 리조트에 들어가기전과 나온후의 모습은 확연히 변화 되어 있었음음 보여준다. 

프랜시스와 그들은 과연 자신들을 어떻게 뒤돌아보고, 치유하게 되는지, 처음 부터 끝까지 놓치지 말고 읽기 바란다. 그저 평범한 소설이라 생각하지만 그 휴양리조트 안에 비밀이 담겨 있다. 그곳의 원장 마샤의 이야기와 그 직원들의 이야기까지. 재미나게 읽어내려 갈수 있을것이다. 각자 다른 아픔들을 가지고 만난 그들이 그후 어떻게 변화가 되었을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끝까지 읽어 보기를 권한다. 

방랑자들

 2018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 <방랑자들>. 소설을 가리켜 국경과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심오한 소통과 공감의 수단이라고 이야기하는 저자가 지향하는 가치가 생생하게 빛나는 이 작품은 2008년 폴란드 최고의 문학상인 니케 문학상을, 2018년도에는 맨부커 상 인터내셔널 부분을 수상했다.
 이 책은 미술로 따지자면 추상화이고 데칼코마니 형식이다.소설이 이렇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냥 무거운 소설이 아니라, 전공 서적을 읽는 느낌처럼 어려웠다. 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이어서 처음 읽어 내려갈 때에는 프랑수와 를로르의 ‘꾸뻬씨의 행복여행’ 같은 부류라 생각했다. 근데 그러기에 이 소설은 책 두께만큼이나 무겁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만해도 수 백명이나 되는 듯하고 이야기가 앞부분과 이어지고 있는건지, 지금 이 이야기를 누가 하는 것인지 헷갈렸다.마치 최수철 작가의 ‘독의 꽃’을 읽는 느낌이었다. 작중인물이 끊임없이 바뀌고 소설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계속 바뀐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백과사전식 정보 페이지도 글을 읽는데 헷갈리게 만들었다. 글 한 편 한 편의 결말이 열려있었고, 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것인가란 의구심이 들었다.하지만, 책 중간이 넘어가면서부터 마치 연관성 없던 이야기들이 미미하게 연관성을 가지면서 단편이 모인 글인데 마치 크게 보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처럼 기, 승, 전, 결의 구조를 띄면서 클라이막스 구간도 있는듯 느껴졌다. 이야기 중심부 부터 앞장으로 다시 넘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마치 책 중간을 두고 펼쳤을 때 데칼코마니 처럼 대칭되어 이어지는 느낌도 받았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은 연결성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여행서인듯 보이지만 결국 생, 로, 병, 사, 희, 로, 애, 락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마치 철학책 한 권을 읽은 느낌이고 한 번으로 끝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책을 읽다 덮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을 담고 있는 책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다.
 “이야기에는 완벽한 통제가 도저히 불가능한, 고유의 타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자신감이 없고 우유부단하며 쉽게 현혹당하는 사람들.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 _p.323

한여름 밤의 꿈

 셰익스피어의 4대 희극 중 한 편인 <한여름 밤의 꿈>은 요정의 왕 오베론과 요정의 여왕 티타니아의 숲에 발을 디딘 네 명의 남녀(허미아, 라이샌더, 드미트리우스, 헬레나)가 숲에서 하루 밤을 보내며 겪는 사랑 찾기가 주 내용이지만 단순히 웃으면서 읽을 정도로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잠자는 사람의 눈꺼풀에 팬지 꽃즙을 바르면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보는 생물(남자든, 여자든, 짐승이든)에게 미치도록 사랑을 느끼는 데, 문제는 이 꽃즙을 요정인 로빈 굿펠로, 일명 퍽이 라이샌더를 드미트리우스로 착각하면서 소동으로 발전한다. 퍽은 오베론의 명령으로 꽃즙을 요정 여왕 티타니아, 라이샌더, 드리트리우스에게 바른다. 티타니아의 경우는 오베른이 원하는 대로 당나귀 머리의 바틈을 사랑하게 되어 성공하지만, 퍽의 착각은 허미아, 라이샌더, 드미트리우스, 헬레나의 사랑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 서로 사랑하여 아테네를 떠나 결혼하려고 도망치던 허미아와 라이샌더, 허미아의 아버지가 선택한 사윗감인 드미트리우스, 드미트리우스를 사랑하는 헬레나. 이들의 관계는 엉뚱한 팬지 꽃즙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외부의 영향(오베론과 퍽이라는 타인의 개입이다.)으로 라이샌더는 허미아가 아닌 헬레나에게 열렬한 사랑을  호소하고 드미트리우스도 자신이 버린 헬레나를 얻으려고 라이샌더와 다툰다. 갑작스런 두 남자의 변심에 허미아는 충격을 받고 헬레나는 허미아와 두 남자가 자신을 놀리려고 작당했다고 의심한다.  꽃즙 때문에 그 바로 직전까지 열렬히 사랑한 허미아를 일시적으로 헌신짝처럼 버리듯 배신한 라이샌더나 헬레나를 혐오한다고 외치던 드미트리우스가 꽃즙때문에 헬레나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얼마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이들의 어처구니 없는 관계는 오베론의 개입으로 다시 원래대로 재정리된다. 라이샌더와 허미아, 드미트리우스와 헬레나 커플의 탄생이다. 
 이 극 안의 또 다른 극인 <피라무스와 디스비>이야기가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야기라고 하는데, 셰익스피어가 같은 시기에 “로미오와 줄리엣”도 창착했다고 한다. 이 또다른 극은 비극적이지만 바틈과 그의 직공일행들을 통해서 희극으로 변질된다. 꽃즙때문에 요정의 여왕인 티타니아가 일시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바틈은 사랑이나 상상력에는 일절 관심없는 인물이다. 그는 티타니아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에게는 의미없는 일이고 비극적인 이야기조차 그는 쓸떼없이 불필요한, 일상에 필요없는 귀찮은 것으로 치부한다. 진실한 사랑이란 게 어쩌면 제눈의 안경일지도 모른다는 한바탕의 폭소는 진실한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한여름의 환상과도 같을 수 있다는 묘한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희극이든 비극이든 작가나 독자에게는 그저 종이 한장의 차이인 것일까…?
 아테네의 테세우스가 하는 말이 귀에 남는 것도 그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상한 게 사실보다 더 많지요. 난 절대로 이런 옛 전설이나 요정의 장난을 못 믿겠소. 연인들과 광인들은 머리가 너무나 들끓고 너무나 조형력이 강하여 차가운 이성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감지하오, 광인과 연인과 그리고 시민은 오로지 상상으로 꽉 차 있는 자들이오 
 -중략-
 시인의 두 눈이 세련된 광기로 구르면서 하늘에서 땅, 땅에서 하늘까지 쳐다보고 상상력이 알려지지 않았던 형상들을 구체화함에 따라 시인의 펜촉은 그것들을 형체 있는 것으로 바꾸면서
 무형물들에게 거주지와 이름을 준다오 강력한 상상력은 속임수가 뛰어나서 그 어떤 기쁨을 감지만 하여도 그 기쁨의 원인이나 제공자를 떠올리오 또는 밤에 무언가가 두렵다고 상상하면 덤불은 얼마나 쉽사리 곰으로 보입니까! ‘_p.91  

모비 딕 1

 모비딕 완역본 읽기를 끝냈다. 3개월간 우리집 책 받침에 얌전히 펼쳐져 있었다. 두께가 만만치 않아 이동 하면서 읽기엔  불편해서 늘 붙박이로 있었고, 읽기는 참으로 허름하게 읽었다. 그저 마지막 까지 읽기를 끝낸 것으로 만족한다. 이 책은 곳곳에서 기억에 남는, 혹은 길이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이 많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앞장을 펼치니 딱 한 문장만이 기억에 남는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 이라고 해두자.” 로 시작 하는 이 문장. 이 책은 이슈메일 1인칭 소설이다. 주석도 어찌나 친절히 잘  정리되어 있던지 이 책 읽는데 모르는 것이 나와도 별 어려움 없다. 그 긴 내용들이 뭐였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빼앗긴 이후로 오로지 복수를 위해 흰 고래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선장 에이헤브의 기다림이  이 책을  언제 끝낼 수 있을까? 하는 내 기다림과 견줄만하다. 왜냐하면 그 고래는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마침내 나타난다.  그리고 3일간 모비딕을 추적 하지만  피쿼드호는 산산 조각이 났다. 선장을 비롯 모든 선원들은 물 속으로 사라졌고 이슈메일만이 살아 남아 그 긴 고래잡이의 여정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슈메일…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마엘에서 유래한 인물이다.  ‘세상에서 추방당한 자’ 고래잡이의 여정을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멜빌이 선택한 사람. 이 책은 그 긴 내용에도 불구하고 옮긴이의 해설을 읽으면서 완전 다른 작품이 된다. 멜빌의 시대(1819년 생)적 배경과 정치적 배경 그리고 종교적 내용까지 곁들인 번역가의 이야기는 내가 알아내지 못한 이 소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비딕은 고래잡이를 통해 인간사회를 이끌어가는 용기와 신뢰와 믿음과 잘못된 집착을 그린 책이다. 모비딕은 위험을 향해 돌진해가는 돈키호테와 같은 선장 아합을 통해 자기와 자기에 속한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무모하고 장렬한 집착을 그린 대 서사시이다. 어떻게 묘사해도 모비딕이 주는 묘한 매력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다. 이 책은 그 어느 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장대함과 섬세함과 구체성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와 인간 내면의 내밀한 그 어떤 감성까지도 다 이끌어내는 책이다. 번역의 훌륭함과 뛰어남이 한껏 발휘되어 번역서의 껄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위대한 개츠비 (세계문학전집 75)

 경쟁만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루하루를 숫자 놀음만 하며 살아가는 ‘껍데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눈에 보이는 휘황찬란한 황금을 ̫기 위해, 인간에게 있어서 어떠한 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내면의 ‘알맹이’를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위 소설을 마치면서 나 자신은 이러한 의문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위대함’을 가령,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하듯이 남들보다 막대한 부를 쌓은 사람이나, 더 높은 위치, 지위에 올라서서 그들을 호령하는 인물에게 부여한다. 하지만 개츠비라는 인물의 위대함은 이러한 사람들과 동급이라서 붙여진게 아니다. 그들을 뛰어넘는 능력으로 이 사회를 재패한 영웅인 것도 아니다. 종이 쪼가리에 모든 것을 바치는 우리들이 의식 저편으로 미뤘던 ‘낭만’이라는 보석을 끝까지 간직했기에 위대한 것이다. 
 ‘데이지’는 위대했을까? 일견 개츠비와 만난 후, 그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이성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택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위협이 닥쳤을 때, 자연스럽게 그녀는 이상을 버렸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사랑에 대한 주체가 그가 아닌 그가 지닌 상상이상의 ‘부’였고, 자신이 이전에 접해보지 못한 물질에 감탄한 평범한 ‘속물’일 뿐이었다.
 ‘뷰케넌’은 위대했을까?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전형적인 엘리트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랑꾼’과는 거리가 멀다. 데이지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한 낭만주의자이긴 커녕, 하류층의 다른 한 여인을 더 좋아했고, 이 또한 육체적인 사랑을 탐닉한 ‘비틀린’ 낭만을 행했다.
 ‘닉’은 위대했을까? 앞선 두 인물보다는 그러해 보인다. 비록, 부자는 아니지만, 항상 친구를 걱정하고, 그에게 충고와 조언을 해주는 우정을 보여준다. 또, 친구가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고, 끝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들에게 분노하고 경멸했다. 하지만 끝없는 분노보다는 그들의 태도와 현실에 순응하고 체념했다. 또 다른 관점에서, 개츠비는 자신의 많은 고민들을 그에게 털어놓았지만, 정작 닉은 자신의 속사정이나 고민거리 등을 개츠비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즉, 일방적인 관계로써, 진정한 우정으로 볼 수도 없다.
 물론, 개츠비는 자신의 틀에 갖혀서 모든 것을 바라봄으로써 죽기 전까지 그 환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방식 때문에 과연 그의 아름다운 ‘순수함’을 폄하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는 이런 낭만과 환상을 갖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하지못한 무모한 사랑을 해봤고, 변치않는 우정을 보여줬다.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잃어버렸고, 잊어버렸던 그 무언가를 품에 안고 살았던 위대한 그였다.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조남주 장편소설)

 “조심해서 들어가. 도착하면 연락해.”

 별 생각 없이 친구와 헤어질 때 주고받던 이 인사말이 여자들만의 것이었단 사실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남편은 친구와 헤어지면서 저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여자란 이유로 집에 가는 길에서조차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잘못되었음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내가 경험했던 평범한 일들이, 소설 속 김지영 씨의 삶을 통해 들여다보자 아주 이상하고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82년생 김지영>속 지영 씨는 흔한 이름처럼 흔한 인생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반장은 항상 남학생의 몫이 되는 걸 지켜보고, 학창시절 학교 앞에서 변태를 만나도 요란을 떨면 안 되고, 여자라는 이유로 취업시장에서 고배를 마시고, 회사 사람들과 식당에 가면 당연하게 자리마다 수저를 세팅하고, 결혼 전에는 된장녀라는 말을 들으며 웃고, 결혼 후 아기를 낳은 후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맘충이라는 말을 듣는다.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모두가 경험해 보았을 그런 에피소드로 지영 씨의 삶은 꽉 차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모든 경험들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이미 익숙해졌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사실, 지영 씨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희생을 강요당하고, 때로는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영 씨의 삶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많은 사람이 지영 씨의 고민과 병에 공감한다.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그녀의 인생이 보편적인 여성의 삶으로 여겨지는 모습이 씁쓸할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으면 좋겠다. 지영 씨의 삶을 통해 당신의 어머니가, 누나가, 언니가, 여동생이, 여자 친구들이 겪었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지영 씨의 평범한 삶이 사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평범한 삶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라는 작가는 절절한 사랑의 아픔과 치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상상의 자유로움 외에도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주인공에 대입시키게 만드는 요상한 재주까지도 겸비하고 있었다. 이번 작품 역시 구해줘와 같이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점에서는 맥락을 같이 하지만, 전혀 새로운 구성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구해줘의 경우에는 결론을 만드는 이가 과거로부터 등장했으나, 이번 작품에서는 현재에서 과거로 오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결국, 과거나 미래 모두 현재의 이미지로 존재하게 된다.
 실력과 인간미를 겸비한 인기있는 소아외과의사 엘리엇, 동물과의 교감을 신비롭게 이끌어내는 수의사 일리나, 그들의 절절하게 넘치는 사랑을 지켜보는 엘리엇의 친구 매튜.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30년을 훌쩍 뛰어넘고, 엘리엇은 예순의 나이가 된다. 어느날 갖게된 신비의 약으로 과거를 넘나들 수 있게 되는 엘리엇. 그의 소원은 30년전에 죽은 연인 일리나를 볼 수 있게 되는 것. 과거의 엘리엇과 현재의 엘리엇은 일리나의 사고사를 막기위한 숨막히는 사건들을 이어나가고, 결국 현재와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 낸다. 예순의 그와 서른의 그가 동일인임에도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작가의 상상력은 기발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사랑을,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된 영화같은 이 소설은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뀐다는 진리를 바탕에 두고 현존하는 모든 것을 잃지 않으면서 과거의 사랑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해답찾기로 이어진다. 엘리엇이 되어 함께 생각하며 그가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가에 대해 몰두할 즈음 절로 터져버리는 이 눈물은 간절한 그의 사랑과 우정에 대한 슬픔이다, 그리고 기쁨이기도 하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무기력해진 마음에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의욕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고, 잃어버린 삶의 의욕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글배우의 이야기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무기력해진 나에게 혼자의 시간을 잘 보내며 재충전할 수 있는 방법과 내 삶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저자가 직접 겪은 사연을 통해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잘해야 된다는 마음이 큰 사람은 항상 마음속에 불안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잘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가 많이 밉기 때문에 지나치게 잘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지나치게 배려하거나 지나치게 참거나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을 안 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희생하거나 그러다 보면 지친 하루가 지나가고 또 나를 힘들 게 하는 하루가 찾아온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다면 삶은 무기력해진다. 불안함, 공허함, 외로움, 감정 기복, 자존감 등 매년 수천 명의 고민을 마주하며 상담해온 저자는 지쳤거나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몰라 공허하고 삶에 의욕이 나지 않는다면 혼자의 시간을 갖고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책을 통해 연애뿐만 아니라 자존감과 인간관계, 직장, 도전하고 싶은 꿈 등 그동안 쌓인 걱정들의 대한 어떻게 나아가면 좋을지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열정, 희망을 전해준다. 현재에 내가 만나고 바라보면 집중되는 것들로 조금씩 삶을 채우기 위해 노력할 때, 그 과정에서 실수하고 잘하지 못하는 나를 무조건 크게 자책하여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에게 실수하고 실패할 공간을 열어주며 다독이며 내가 만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찾아갈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지나치게 밝거나,지나치게 자신에게 엄격하거나, 지나치게 잘해야 된다 생각하거나, 지나치게 눈치를 보거나, 지나치게 잘 참거나 , 지나치게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은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