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의 도전적인 삶과 성숙한 세계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헤밍웨이가 근 이십년간 생활했던 쿠바와 낚시를 즐겼던 멕시코 만류를 배경으로 탄생했다.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못하다가 85일 되는날 만난 엄청큰 크기의 청새치를 몇 날 며칠 잡기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는 청새치를 잡았지만 상어 떼의 습격에 물고기의 살점을 거의 빼앗기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운다. 산티아고 노인은 포기를 모르고 불굴의 정신을 보여준다.
노인과 바다의 기원은 헤밍웨이가 1936년 <에스콰이어>지 4월호에 <푸른대양에서: 멕시코 만류 통신>을 기고한 내용에서, 이미 자신의 배인 필라호로 낚시를 즐기며 목격한 경험을 이야기 한 바 있다. 쿠바의 늙은 어부가 거대한 생채기를 잡았지만 상어들의 습격을 받아 청새치의 살을 대부분 뺏기고 실신 상태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불굴의 정신을 발휘한 늙은 어부의 모습에서 감동받았다고 했는데, 그 모습에서 자신이 이상으로 삼은 남자다운 거친 남성상을 보았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이러한 상을 반영하여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초같은 이미지와 고난 속에서 우아함을 잃지 않는 불굴의 인간상을 소설속 산타아고라는 노인을 통해 보여준다.
산티아고 노인은 ”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며 상어 떼와 맞선다.
소설은 그가 포기하지 않은 강임함과 그 이면의 그의 고독함을 볼 수 있다. 노인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치열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강인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나약함과 고독을 노인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볼 수 있는 인생과도 같은 소설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네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책을 읽다보면 무슨 주제를 다룬 책인지 의아하고 의문이 들정도로 심오한 책이고, 한번 읽어서는 책의 실마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토마시와 그를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그 옆에 있는 테레자, 하지만 토마시는 진지한 사랑을 부담스러워하고 계속해 다른 사람을 만난다. 토마시의 연인으로 나오는 사비나는 자신에게 얽혀있는 사회(조국)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며 그런 사비나에게 끌리는 프란츠가 나온다.
책을 읽고나서 저자를 찾아볼 수 밖에 없었다.
저자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을 통해서 무엇을 투영하고 싶은 것은지 확인한 후 소설을 읽으면 해석에 도움이 되었다.
쿤데라는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다.”, “즉 필연과 우연도 마찬가지이다.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사건과 직면하여, 과연 그래야 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사건은 전부 단 한 번뿐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개인의 삶과 한 국가, 나아가 세계의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 진다.” 라고 해석했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일회성과 우연을 통해 가벼움이 무거워지는 순간을 보게 된다.
토마시는 그의 조국의 삶,역사와 평생선을 이루는데, 체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통감할 것을 ‘철회’의 요구와 그는 계속 추락한다.
테레자는 토마시는 우연이 아닌 필연이였으며, 그녀가 항상 갖고다니는 ‘안나 카레니나’ 책은 그녀에게 상징적이며, 그녀는 삶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필연의 법칙을 따르며, 그녀에겐 가벼움은 고통이다. 그래서 그녀는 토마시의 가벼움을 참지못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의 기준은 돈이 많은 기준일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부유한 국가는 금이나 화폐가 금고가 많이 쌓여 있는 나라가 아니라, 재화를 많이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역략이 풍부한 나라’가 부유한 나라라고 말한다.
애덤스미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28세에 글래스고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는 도덕철학의 강의를 맡아 ‘도덕감정론’이라는 저서를 냈으며, 1776년에 국부론을 발표했다.
당시 국부론은 윤리학 논문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아직 경제학이 없었기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애덤스미스를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국부론’ 경제적개념보다 우리의 저녁식사가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고찰이 나온다
식탁에 음식이 오르기 전까지의 과정은 정육점과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기 이익을 중시하기 위해 이루어진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음식을 만들고 신선한 고기를 파는 것은 누군가를 위해서(자비심)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심으로 결과적으로 우리의 식탁이 풍요로워진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바로본 인간은 이기적이고 사리만을 추구하고 이윤동기만을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런 표현만 보았을 때는 좋은 사회구성원이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이들의 이기심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며, 최종적으로 국가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시장이 자유로운 경쟁이 가능할 때의 이야기이다. 자유방임사상과 정부의 개입최소화가 전제되어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지금은 나라마다 다양한 경제 체제를 다루고 있고 시대마다도 매번 경제체제는 바뀐다. 즉, 아직 완벽한 시장경제체제는 없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이 인정받아 온 이유는 경제학이 없었던 시기에 국부의 원천과 시장과 분업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보여주며, 그의 이론이 지금 시장경제의 일부로 작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조국 아테네가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와의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인해 몰락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국가론은 플라톤의 대화편의 약 1/5를 차지할 만큼 많은 분량과 함께 국가 뿐만아니라 철학, 정치, 경제, 교육, 문학 등 인류의 문화의 원형이 담겨져 있다.
플라톤은 국가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역사적, 철학적 고찰에서의 현실주의자였다. 플라톤의 국가관은 국가를 유기체로 그리고 개인을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로 바라보는 ‘구가주의적’ 국가관이다. 기술의 발달로 산업이 발전하고 화폐가 널리 유통되면서 영리적, 군사적, 지배적인 여러 계급들이 점차 국가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매우 명백하게 제시한다.
‘국가’에서 나오는 플라톤의 주장은 지금 보기에 몇가지 당혹스러운점이 있다. 이를 대담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플라톤은 시인 추방론을 주장했다. 시인은 덕과 기타의 형상을 흉내낼 뿐이며 경험세계만을 겉핥기를 하는 시의 교육적 가치를 부정한다.
부인 공유제는 지배계급에 강요한 것으로서, 부인을 공유함으로써 상속의 동기를 상실하게 된다고 보았다.
사주덕론은 플라톤이 다룬 4가지 주된 덕으로 정의, 지혜, 용기, 절제를 통해 사람은 머리는 지혜롭고 가슴은 용기가 있으며 정욕은 절제될 때 정의로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철인통지는 국가는 정의는 토대로 할 때에만 좋은 국가가 될 수 있고 앎에 기초한 통지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무엇보다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사는 것인지를 주제로 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열린구조로 향후 논의내용과 전개방향은 언제든지 달라질수 있다.
개개인에 따라 생각과 추구하는 전개 방향이 다른 것처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의미를 찾아갈 것인지에 따라 ‘국가’의 진정한 의미 또한 열려있을 것이다.
‘국화와칼’은 일본을 다룬 가장 객관적인 책으로 손꼽히는 고전이다. 아마 일본어학과 학생들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책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가 쓴 일본연구서로서, 평균적인 일본인의 행동과 사고 패턴을 탐구하였다
서양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의 인류학적 내용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접어든 1944~1946년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전이 인류학분야와 일본문학에서 많이 읽히고 있다.
국화는 일본의 황실을 상징한다. 일본인들은 나라꽃인 벚꽃보다도 국화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꽃들은 피지 않는 차가운 가을에 홀로 피는 국화는 깨끗하고 청결하고 조용하고 엄숙하고 고귀하다고 생각해서이다.
제목에서의 ‘국화’와 ‘칼’은 일본의 이중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손에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국화를 들고 있지만 허리에는 칼을 찬 일본인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일본 사람들 스스로도 자신들은 앞에 내세우는 얼굴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책에서 일본인의 외면적인 행동의 묘사와, 행동, 사고방식, 문화의 패턴을 분석하며, 그들은 어떠한 생활의 변화에도 좀 처럼 변화하지 않는다는 인류학적신념으로 일관되어있다.
놀라운 점은 저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고 썼다는 점이다.
어떻게 대상을 직접 보고 관찰하지 않고 분석할 수 있었는지 놀랍고, 그것이 가능했다는 걸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되었다.
저자 미셸푸코는 1926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22세에 프랑스 엘리트 교육의 산실인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심리학, 정신병리학 등을 공부하며 임상을 연구하고 26세에 교수자격 시험에 합격한 뒤 알튀세의 추천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36세에 ‘광기의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감시와 처벌은’ 1975년에는 부르주아 권력과 형벌제도의 관계를 파헤친 내용으로 출간되었다.
책에서 감옥이나 정신병원, 성 같은 변방의 익숙지 않은 주제와 특정계층이나 소수자 집단에 관한 사회적 담론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설명하였다. 형벌제도의 변화를 통해 각 시대의 권력이 어떻게 개인을 통제하고 예속시켜 왔으며, 개인이 권력의 작용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18세기까지 절대왕정시대의 형벌은 잔혹한 공개처벌이였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점으로 18세기에서 19세기에는 감금형과 강제노동이 도입되었다. 권력을 과시하던 형태에서 잔혹성을 숨기고 교묘하고 효율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감옥은 감시권력과 감시당하는 자가 명확히 대비되는 ‘보이지 않은 규율 권력’이 행사되는 전형적이 예였으며, 근대 계몽주의 시대 이후 합리하를 중시하는 이성적 근대권력은 처벌과 억압보다 지식과 담론을 만들어내어 방식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처벌의 변화는 인권의 진보나 인류의 보편애로 인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좀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말한다.
권력의 ‘눈’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으며, 감옥, 정신병동,군대, 학교, 노동자의 기숙사, 어디에서든 푸코는 감옥체제야말로 근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감옥은 다만 선명한 축소판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책은 고등학교 때 읽은 책이다. 사탐과목 중 윤리와 사상을 선택했었는데, 그 과목 안에 담긴 개념이 잘 옮겨졌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총 서른 일곱 명의 철학자가 열 다섯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적게는 두 명에서 많게는 여섯 명 까지, 두 개의 관점에서 최대한 네 개의 관점까지 동서양과 그들이 존재했던 시대를 막론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신의 존재, 자유와 쾌락의 의미에서부터 마지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주제에 오늘날 뜨겁게 거론되는 소년법, 인간 안락사 등의 사건들과 적절히 어우러져 책 속의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교과서로 사용되어도 손색없다는 생각이다. 흥미롭고 잘 읽힌다. 내가 책을 빠르게 읽는 타입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읽었다. 주제가 현실 우리의 고민과도 잘 매치되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면서도 내가 윤사시간에 배운, 보고 들은 개념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부연설명 역시도 너무 어렵지 않게 잘 되어있었다. 또한 질문의 형식으로 그들의 논리를 펼쳐나가다보니 굉장히 많은 내용이 들어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인물이 구체적인 그림으로 묘사되어 기억에 더 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주 나오는 철학자에 비해 잘 나오지 않은 철학자가 있어서 조금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구조상의 문제일 뿐 내용상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이 안에 있는 질문들만으로 만족하고 스스로 더 찾아볼만한 의지를 가지려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점이 있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중에서 인간은 각자 자신의 목표를 찾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산다고 하는 부분이 가장 공감되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는 목표를 찾지 못하거나 이루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절망하게 되는 경우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총 세 부분 정도, 깊이 생각해볼 부분이 있었어서 그 부분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은 첫 번째 챕터 ‘불멸의 존재를 불러내다’중이다.
그리스의 신들은 사실, 너무나 인간적이다. 완전무결하게 선한 존재라고는 절대 볼 수가 없다. 바람도 피우고, 질투도 하고, 부모님께 징징거리기도 하며 감정적인 벌들을 내리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서 전쟁에 뛰어들었으면서 크게 입은 상처가 아파 온 하늘이 떠내려가도록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들이 신인 이유는 딱 하나다. 영생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지금까지, 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든 문화의 창조자는 우리 인간이다. 우리는 신을 믿고 숭배하지만 그 믿음을 만드는 것 역시 우리 인간임을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 부분은 두 번째 챕터, ‘상징의 세계에 들어가다’ 부분이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소설을 쓸 때도 하나의 ‘상징’을 사용하고는 한다. 모 웹사이트에서 연재하던 작품 중 ‘어린왕자’를 인용해 상징을 아주 잘 활용한 예가 있었다. 주인공 소녀에게 자신 스스로는 어린왕자의 장미였다. 장미는 가면, 자신감, 방패였다.
이처럼 하나의 상징물이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는데, 신들에게는 상징물, 상징 식물, 상징 동물 등 여러가지 존잭 신들의 영향력을 상징한다. 제우스의 독수리는 권력, 아테나의 올리브는 지혜, 포세이돈의 삼지창은 창으로 물고기를 잡는 그리스인들의 문화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에게 상징처럼 부여된 것이다. 어떠한 신의 상징이 되며 아무런 의미가 없던 것들은 또의미를 가진다. 이는 꽃말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은 일곱 번째 챕터, ‘인간의 비극적 문명을 슬퍼하다’부분이다.
인간은 죽는다. 신과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다. 대체로 인간의 탄생에 대한 신화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흙으로 빚어진다(물과 섞여 물이 피가 된다는 말도 있다). 이는 어떠한 존재 자체에서 ‘태어난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인간은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죽음을 향해 가기에 신을 공경해야 하며 ‘수치심’과 ‘정의’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없어지면 신이 벌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인간의 기초소양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꼭 필요한 저 두 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