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의 여덟번째 이야기 ‘월곡후야’에서는 김희찬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작가가 꿈이였지만 위조와 날조하여 작성하여 책을 내지만 얼마가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이 후에 공무원이 되고자하지만 뒷거래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관촌 부락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농사를 짓고 과수원을 운영하지만 농약으로 인하여 과수원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과수원은 곧 사람들의 마실터가 되어 여러 이야기가 오고가는 시골마을의 정보교환 역할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이라는 아이가 겁탈을 당하고 임신을 하여 낙태를 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순이는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않아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의심을 받게 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다 심순경이 조사를 위해 과수원에 들러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듣다가 순이와 마주치게 된다. 심순경은 순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진실이 점차적으로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공식적인 제재를 선택하기 보다 비공식적인 제재를 선택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을 추구한다.
순이의 사건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월곡후야’의 주된 이야기이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 그러나 어긋난 방식으로 살아가다 꿈을 포기한다. 당시 세태를 보여주는듯 공무원 시험조차 뒷거래가 팽배한다. 김희찬은 또 다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한다. 그리고 시골에서 순이에게 일어난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사실 내가 보기에는 해결이라는 단어보다 단지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순이 친구의 아버지인 범인 김선영, 그 김선영은 순이 어머니와 흥정하여 돈과 밭 문서를 주고 사건을 무마하고, 청년들은 이 마을을 떠나라고 김선영을 협박을 한다. 그리고 그들의 리더격인 수찬이는 다음날 정체모를 큼직한 가방을 가지고 떠난다. 이야기의 모든 것들이 당대 사회에 만연한 불편함을 보여주는듯 하다.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굳이 사회와 같은 거창한 단어가 아니더라도 단지 작은 마을의 시스템에
사람들이 그저 맞추어서 흘러가는듯한 관촌수필의 ‘월곡후야’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수십년이 지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나에게 ‘너도 사실은 시스템 안에서 그저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윤동주 시 중에서도 자화상을 감명깊게 보았다. ‘우물’을 자아 성찰의 매개체로 보고 끊임없이 자신 삶을 돌아본 것에 대해 감명깊게 보았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자아성찰을 했다는 것을 시로 표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도 윤동주처럼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수필이나 시나 그림으로 나를 쉽게 표현할 수 있으면하는 목표가 생기게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만 하나씩 보던 윤동주 시인의 글들을 한데 묶어서 읽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무엇보다 윤동주 시인의 그 시절 가졌던 고국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어쩔 수 없이 창씨 개명을 택했던 자신에 대한 끝없는 반성과 그리움의 마음이 직접적으로 와닿았던 것 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그러면서 내가 윤동주였다면 그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문뜩 생각해보았다. 누군가는 윤동주를 보고 말한다. 그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은채 그저 일본을 따랐던 친일파라고. 하지만 나는 말한다. 그는 칼과 총 대신 펜을 들어 일제의 탄압에 맞서싸운 정의롭고도 한점 부끄럼 없이 살다간 독립운동가였다고. 나라면 윤동주처럼 펜도 들지 못하였을 것이다. 글 하나 잘못써서 받는 형벌이 두려워 난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친일파라는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 시대에는 행동하나를 할때도 목숨을 걸고 행해야 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것도 타지에서 고국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은채 하늘을 통해, 바람을 통해, 별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고국을 위로하고 조선인을 격려하던 그가 그냥 멋있었다. 또한 책을 읽으면서 실행을 앞두고 있는 윤동주를 주제로 한 문학기행에 대해 더 기대감을 품을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되어 직접만나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지만 윤동주 문학관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대화를 나누며 그가 살아온 삶을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해방을 반년 앞두고 차디찬 형무소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그에게 윤동주, 그가 만들어 놓은 지금의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보여주고 싶다. 이제는 그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다.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이를 읽다 보면 비록 세대는 다르지만 나와 같은 청춘을 살던 윤동주 그에게 감정이 이입되기 일쑤였다. 물론 내가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았다면 어땠을까, 나 또한 그처럼 시대를 표현해낼 수 있었을까. 하며 책을 읽는 내내 그를 그려넣었다.
그는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며, 그리움을 달래왔다. 우리는 시를 읽으며 그 시절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것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정서와 시대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역사를 비교적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잊고 지내던 역사에 관해 다시끔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별 헤는 밤 시 중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쓸쓸함과 별 하나의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이 구절은 어느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역사를 모티브로 노래를 제작했을 당시의 후렴 구절로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노래는 윤동주 그를 기억하는 데 있어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 나 또한 이번 문학기행을 기회로 삼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그를 다시 한 번 꺼내보고 싶어졌다.
저는 관촌수필이라는 책을 읽고 이에대한 줄거리와 리뷰에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저는 관촌수필 중에서도 화무십일 파트를 읽어보았습니다. 여기에는 나, 어머니, 윤 영감일가가 등장하게됩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들른 ‘나’는 관촌 이발소 앞에서 우연히 지나가는 소반 장수의 뒷모습에서 엉겁결의 착각으로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린 윤 영감을 떠올립니다. 그해에 있은 일들은 아주 끔찍한 일들이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부황(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 안 난 집이 드물고 채독(날 채소를 먹음으로써 위장을 해하는 독기)들지 않은 사람이 귀하던 시절이였습니다. 윤 영감네 일가가 관촌부락을 떠들어온 것도, 그렇게 죽지 못해 삼동을 몰리고 해가 원수같이 길어지기 시작한 여름, 육순이 바라뵈는 귀밑머리 허연 늙은이 가 턱밑이 안 보이게 등이 굽어 노파를 앞세우고 들어왔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전쟁통에 집안의 어른들을 모두 여의어서 남자라고는 어린 아들밖에 없는 집안을 이끌어 갑니다. 당시 집안은 난리가 나던 해에 농작물을 치안대에 의해 모조리 압수당한 여파로 매우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사 정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피난민들에게 서슴없이 빈방을 내주곤 하였습니다. 윤 영감은 아무 일이나 며칠 간만 부려 주어 며느리와 젖먹이 어린 것까지 네 식구 굶지만 않게 해달라며 한끼에 밤 두 그릇씩만 모자라는 만큼은 며느리를 내보내어 보태서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장리쌀로 연명해 나가던 형편이지만 이듬해 농사를 위해서는 선머슴이라도 두어야 했으므로 어머니는 영감네 식구들을 받아들입니다. 전쟁통에 피난을 다니던 윤 영감 일가가 솔이 엄마를 며느리로 맞게 된 것은 임진강을 건넌 직후입니다. 부모를 따라 강을 건넜지만 포격이 한 차례 거쳐간 뒤 고아가 되어, 두고 보기가 딱해 처녀의 부모 시체를 묻어 주고 동행하게 되 는데, 두 늙은이는 보리죽을 먹고 초야를 치른 학로 내외를 상전 받들 듯 살았습니다. 그 뒤, 허우대만 그럴싸하면 덮어놓고 잡아다가 군인을 만들던 판이라 하나밖에 없 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던 윤 영감은 그 아들을 낮에는 늘 가마니 속에 담아두고 밤으로만 걸어다니면서 피 난살이를 합니다. 부득이 대낮에 이동해야만 할 때에는 가마니에 담은 아들을 지게로 져 날라야 했습니다. 그러던 윤 영감 일가가 결정적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은 며느리가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읍내의 여관에 일을 다니면서부터입니다. 솔이 엄마의 외박이 잦아지면서 가정 불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에 바쁘다 보면 통금에 걸려 못 들어온다는 그녀의 변명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학로는 의처증에 시달렸습니다. 학로가 여관으로 찾아가 솔이 엄마 머리채를 끌어와 머리를 깎아 들어앉히고 그 대신 학로가 돈벌이를 하러 발벗고 나서면서 한동안 윤 영감네는 평안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학로 가 다시 열패감에 젖어 가정 분란이 재연되고, 어머니는 밤마다 문간방에서 일어나는 폭력 행위를 말리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솔이 엄마가 여관에 머물던 서울 사내와 눈이 맞아 급기야는 유일한 혈육인 솔이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버렸습니다. 이후 아내의 가출로 충격을 받은 학로마저 뒷산 밤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림으로써 윤 영감 일가는 결딴이 나 버리고 맙니다. 결국 둘만 남게 된 윤영감 내외는 며느리보다는 집안의 대를 이을 손주 를 찾을 겸하여 소반 장수의 길을 정처 없이 나서게 됩니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윤 영감일가가 몰락하는 모습을 보며 전쟁으로인한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 수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는 ‘나’의 어머니가 오갈데없는 윤 영감 일가를 자신의 형편도 좋지 못하고 심지어 풍비박산할 지경인데 거두어들이고 또 윤 영감의 환갑 상차림 까지 차려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 작품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의 어머니를 보면서 한국 농촌의 전통적인 공동체적 모습을 볼 수있었습니다. 저는 ‘나’의 어머니가 정말 대단하고, 따뜻하고, 순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농민들의 모습으로 전쟁중인 현대 사회 속에서 과거 사회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복원하여 더욱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촌수필은 이문구 작가가 쓴 작품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각의 스토리는 유기성을 띄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소외되는 소시민들의 애환에 주목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은 제7편 [여요주서]이다. 주인공의 학교 친구가 아버지의 약값을 벌기 위해 꿩을 잡고 시장에 팔려다가 자연 보호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갖가지 수모를 겪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인상깊었던 이유는 공권력의 나약함과 횡포를 날카롭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독제자들은 자신의 권력이 약화되고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그렇게 되면 권위를 되찾기 위해 남은 권력을 마구 휘두른다. 촛불은 꺼지기 직전 제일 밝게 타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쳅터가 쓰인 시기가 1976년도임을 고려하면 유신 정권 말이라는 것이다. 이때 시민들에 대한 공권력의 횡포가 만연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작가는 권력에 휘둘리는 소시민들에게는 애환의 눈빛을 보내고, 공권력에는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의 그림자’를 읽고
1871365 신종현
처음에 ‘백의 그림자’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그림자가 무슨 존재인지, 이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하며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수시로 그림자라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따라가다 서서히 죽어갔으며 등장인물들은 늘 주인공인 ‘은교’에게 그 그림자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책을 읽다보면 그 패턴이 나타나는데, 사실 이 책의 인물들이 어떠한 고난이나 어려움을 겪는다고 느끼면 그림자가 스스로 자신에게서 분리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 그림자를 자신의 어려움도 잠시 잊어둔 채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은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그림자는 그저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저승사자일지, 그저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의지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 그림자의 존재가 그저 이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표현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작 이 소설은 그림자보다는 낡은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두고 있었다. 오래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줄어드는 전자상가에서 삶의 고난을 느끼며 걱정을 가진 사람들. 빚이 점점 쌓이고 쌓이는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지낸 터전이 어느 순간에 사라져버리게 된 이야기.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백색’보다는 짙은 ‘회색’의 느낌을 주는, 그야말로 그림자 같은 이야기라고 느꼈다.
이 소설에선 주인공인 ‘은교’와 ‘무재’는 이 암울한 분위기의 현실 속에서 연애를 하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잔잔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를 위로해주고 다가가게 된다. 사실 이 둘을 보면 재밌는 점을 느끼게 되는데, 이 둘은 그림자에 대해 별 감흥이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남들은 자신, 또는 남의 그림자가 일어서면 놀라서 따라가지 마라는 충고를 하기도 하거나 두려워하기 마련이었지만 이 둘은 그림자에 연연하는 일이 없었다. 소설 처음에서 ‘은교’가 그림자를 따라가며 시작되면서도 소설 안에서 그림자에게 가지는 감정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무재는 덤덤히 그저 따라가지 않으면 어떤 일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에서 회색의 삶 속에서도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지금 우리의, 청춘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소설의 마지막을 보면 바다 쪽으로 여행간 두 명의 차가 고장나고 곧 어둠(그림자)에 휩싸이지만, 이 둘은 자신들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기를 바라며 소설이 마무리가 된다. 이는 곧 서로를 의지하며 그림자를 이겨내기를 바라는 작가가 청춘들에게 전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소설은 결국 현대인의 삶을 투영하고 있는 소설이다. 누구나 그림자를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두려워하고, 누구나 도망치기도하며 서로 의지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볼 수도 있지만 볼 수 없기도 하며, 자신의 그림자가 어느 순간에 자신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모르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그림자는 어떤 의미를 가진 걸까 다시 곱씹으며 나도 모르는 그림자가 어딘가에는 존재하는 걸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작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이와 같은 현대인의 감수성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