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1000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가 말하는)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다양한 상상을 한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석산이 흐드러지게 피어진 꽃밭을 지나 고통의강을 지나면 모든것에 해탈한 피안의 세계에 도달할 수도 있고, 동전 한푼을 뱃삯으로 받는 뱃사공을 따라 스틱스 강을 건너 갈 수도 있다. 그대의 심장은 깃털 하나보다 무겁기에 암무트에게 영원토록 먹히는 형벌을 받을수도 있을 것이며 , 윤회의 수레바퀴로 다시 한번 생을 이어갈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마다 각각 자신들만의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에 기인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아니 인류 뿐만이 아닌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본능적으로 두려워 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이 죽음이건만 아무리 세계가 발전한다 할지라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죽음에 순응하고 체념하게 된다. 거스를 수 없는 공평한 죽음이란 짧게 불타오르는 불꽃놀이와 같아 화려하게 피고 지는 불꽃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일생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작가는 호스피스로서 자신이 직접 본 죽음에 대한 형태를 기록했다. 공평한 죽음이지만 그 누구든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모든 사람이 다르기에 그것은 다양한 사연으로 나타난다. 죽음이란 마법과도 같아 죽기 직전이라면 그 누구도 솔직해 진다.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다. 그러하나 모습을 작가는 25가지로 기록했다. 병에걸린뒤 하는 뒤늦은 후회라던가, 죽은 뒤의 유산, 자신이 잊고 살아왔던 꿈이라던가, 식욕과도 같은 원초적욕구, 사랑과 결혼, 그리고 자신을 기억해줄 아이라던지. 사람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후회를 남긴다. 죽음 이후가 무섭기에 그들은 후회한다. 후회하고 발버둥 치지만 죽음은 다가온다. 피할수 없기에 그들은 체념을 한다. 
 
 인류사에 있어서 종교의 필요 이유는 오로지 사후세계에 대한 긍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든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공포심을 가질수 밖에 없으며 종교는 사후세계라는 믿음을 통해 그 죽음에 대한 극복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운명의 곁에는 언제나 죽음이 같이 있으며 그것을 외면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앞서 말한 종교적 믿음이거나 자신의 철학적 사유, 아니면 고된 일상을 통해 잊는 다거나. 물론 죽음이라는 것은 잊는 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삶을 살기에 죽기 전 후회를 남기겠지만 그 유한한 삶을 살기에 우리는 화려하게 타들어가는 불꽃같은 생애를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 죽기 전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후회만이 남는 삶을 살지 않았기를 빈다.

현남 오빠에게 (페미니즘 소설)

 요즘 뜨거운 논쟁거리인 페미니즘. 여성주의라는 의미로서 여성의 권익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수 많은 사회기득권자들이 옹호하며 이를 피로한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여성으로서 억압받았다고. 여성이기에 불평등했으며 여성이었기에 차별받았다고. 이제 여성이 일어나 여성의 권익을 스스로 챙길 떄가 되었다고.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태어나서 부터 어쩔수 없이 짊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선택으로 짊어지는 것 일수도 있다. 성별이라는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짊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고를수도 없으며 그들을 서로 이해할 수 도 없다. 최근 혜화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몰카 규탄시위라고 한다. 이 시위의 발단이 된 계기가 조금 어이가 없더라. 몰카를 찍은 가해자는 여성이었고 피해자는 남성이었다. 그리고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가해여성을 일찍 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시위에서 외친다. 남성과 여성이 사법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고. 옳은 말이다. 실제 여성과 남성은 형벌에 있어서 큰 차별을 받고 있다. 다만 그치들이 생각하는 대로 여성이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닌 남성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 남자로서 살아오면서 항상 나는 남성이기 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육체적 고난이나 정서적 차별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군대가 정점이었다. 나는 남성이기에 군대를 갔다. 그리고 여성들이 소위 말하는 ‘집지키는 개’로서 2년을 복무 했으며 ‘살인기계’가 되어서 나왔다. 자긍심을 가져야 할 군 복무는 여성들의 눈에는 천박하고 야만스럽기 짝이없는 일이 되었다. 
 
 이 책은 제목부터 부정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현남이라는 의미는 대한민국 페미니스트 들이 쓰는 ‘한남’이라는 단어에서 따왔으며 그 의미 또한 한남충, 한국 남자 벌레라는 의미로 쓰여지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 작품에서 자신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며 여러 여성의 차별을 받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우선 가부장제에 대해서 집고 넘어가고 싶다. 그녀들은 항상 말한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인격을 파탄내는 부조리한 일이며 우리 여성들은 피해자 라고. 그들은 그 당시 시대의 남자들을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사람이라 욕하며 한물간 시대의 퇴물이라 욕한다. 축하한다. 당신들은 당신들을 지키기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싸워온 아버지를 병신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회생활 이라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현대화가 된 지금 시대에도 온갖 위험과 고생이 산적해 있는데 그 당시 시대에는 어떻겠는가. 가부장. 집안의 기둥이라는 의미이다. 한 가족의 경제권자로서 그들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상사의 구둣바닥을 핥으면서 버텨왔다. 자기 자식의 미소를 보기 위해 땀을 흘렸으며 자신이 책임 져야할 아내를 위해 모든 것을 버텨왔다. 남성이 버텨오는 동안 여성은 무엇을 하는가. 집안일이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기본이다. 흔히들 페미니스트 들은 말한다. 남성이 여성의 사회진출을 억압하고 여성을 짐승처럼 다뤄 왔다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그들은 한순간에 포주가 노예를 지키기 위해 부리는 꼬장으로 바꾼다.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과연 알량한 페미니스트 들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싸워온 위대한 아버지들을 한남충으로 몰아 넣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이 소설은 진행 되면서 남성은 폭력적이고 독선적인 인물이라고 세뇌를 시킨다. 여성 참정권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에서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전쟁만이 남성들이 알아듣는 유일한 언어라고. 그 누구도 피와 살이 찢겨나가는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 누구도 폭력에 의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이 전쟁터에 참전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딸자식을 위해서 그들은 원치않은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섰다. 페미니스트 들은 말한다. 인류 역사상 여성은 항상 억압받아 왔다고. 그러나 그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 흘려왔던 수많은 피는 보지 않는다. 애써 외면한다. 인류 역사상 항상 여성은 지켜지는 존재 였다. 비 바람에서든 가난에서든 어두운 밤의 으슥한 범죄에서든. 물론 현대에 와서는 그러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존재로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지킬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지켜졌다는 것을 잊는 것 같다. 여성의 탄압만을 바라보지 말고 여성들을 지키기 위해 흘려왔던 피를 생각해 봤으면 한다.

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螢.納屋を燒く.その他の短編)

 최근 개봉된 영화 중 ‘버닝’이라는 영화가 있다. 칸 영화제에서 벌칸상을 수상한 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영화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재해석해 만들었다. 영화를 흥미롭게 봤던 나는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원작인 ‘헛간을 태우다’보다 ‘반딧불이’라는 단편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이 책은 6가지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이다. 그리고 ‘영화의 원작은 당연히 장편이어야 돼’라는 내 생각을 정면에서 부순 책이기도 하다. 6개의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반딧불이’라는 소설이다. 사실 살아가다 보면 자신을 사회에 맞추고,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라는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무기력하고 평범한, 무엇 하나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인물. 그러나 주인공의 친구가 자살하면서 그는 친구의 여자친구와 가까워지게 된다. 자신이 친구의 대용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그녀에게 팔을 빌려주고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때까지 그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특별한 생각이 없었다.                                                                 
  잃어봐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는 말이 있다. 남자친구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계속 안으로 쌓아왔던 그녀를 공감하지 못하고 위로하던 그는 결국 그녀가 그를 떠난 뒤에야 허망함을 느낀다. 대학생활 동안 전공과 진로 등에 대해 숱한 고민을 치르지 않았던 그가 사실은 그녀를 만나는 동안 외로움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소설의 끝부분에 그의 룸메이트가 그에게 인스턴트커피 병에 넣은 반딧불이를 건네준다. 기억 속의 반딧불이와 다르게 희미하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빛을 보며 그는 병뚜껑을 열었다. 반딧불이는 재빠르게 호를 그리며 아까보다 밝은 빛의 선을 어둠 속에 그려내었다. 날아가는 반딧불이를 보며 그는 손을 뻗어보았으나,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이 책은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양과 이별의 다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결국 병 속의 반딧불이는 붙잡을 수 없는 친구의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잡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마음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는 책인 것 같다.

일상 속  ‘새삼스러움’  찾기

김기택 시인의 

    

 

   시인 김기택의 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거들떠 보지 않는 것들을 관찰한다그와 눈이 마주쳤다에서는 길고양이를삼겹살에서는 삼겹살을 먹고 온몸에 남겨진 삼겹살의 흔적을, 심지어 절하다에서는 좌판에서 팔리고 있는 전기 통닭구이까지 관찰한다. 시인은 익숙한 것들을 관찰함으로써 그 사물에 대한 생경함을 느끼게 한다. 너무나도 세세한 관찰이라 그 대상에 대해 어라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을 아주 세세하게 관찰하는 김기택 시인과 달리 나는 익숙한 것에 쉽게 질려버린다. 익숙함이 마냥 반갑지는 않은 것이다. 버릇처럼 가는 식당은 또 이 메뉴냐며 투덜대면서 들어가기 일쑤다. 오래 돼 어느 사이에 느려져버린 노트북도 달갑지 않다. 그렇다고 무조건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또 아니다. 매사가 조심스러운 나는 신입생 환영회, 아르바이트 첫날 같은 것들은 말만 들어도 고역이다. 스마트 폰 등 전자기기도  새로 적응하는 게 귀찮아 잘 바꾸지 않는다.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서툴기 때문에 불편하다. 그래서 김기택 시인이 익숙한 것들 속에서 찾아내는  ‘새삼스러움’ 은 익숙함과 새로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나에게 큰 메시지가 된다. 새삼스러움이란 우리의 일상에 익숙하게 있는 것들을 갑작스레 낯설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을 예로 들자면, 나는 일상 속에서 껌을 수없이 봐 왔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껌을 자세하게 살펴 본 경험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 씹다가 버린 껌은 더더욱 그렇다. 그도 그럴게 단돈 500원에 사 단물이 빠진 뒤 뱉어 버리면 그만인 것이 껌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김기택 시인은 누군가 씹다 버린 껌을 집요할 정도로 관찰한다. 우리는 김기택 시인처럼 씹다 버린 껌에서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모습을 찾거나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것이라는 감상을 느끼지는 못한다. 지나치게 익숙하며 어디에든 널려 있는 껌은 그 누구도 깊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기택 시인의 집요한 관찰은 껌이라는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끔 한다. 껌이 낯설어 지는 것이다. 그저 우리에게 씹히는  음식물에 지나지 않았던 껌이 잇자국이 남겨지는 대상, 이가 먼저 지쳐 뱉어지는 대상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진다.

 

 

   익숙한 것에서 생경함을 찾는 것은 비단 사물에만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주변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존재해 있던 것들 사물이나 사람, 환경 같은 일상 모든 것들에서 생경함을 찾을 수 있다면 껌이 그랬듯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새롭지만 익숙하기 때문에 서툴지 않게 말이다. 어떤 큰 사건보다 반복되는 일상이 더 지치고 고민될 때가 많다. 그럴 땐 너무 익숙해져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진 않은지 김기택 시인이 세상을 관찰하듯 주변의 것들을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일상 속에서 ‘새삼스러움’ 찾기 위해서 말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별것 없는 하루가 모여 일상이 되고, 별것 없는 일상은 우리의 인생을 이룬다. 별것 없는 것들의 소중함은 멈춰 서 자세히 바라보다 생경함을 찾았을 때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한때 소중했던 것들 (이기주 산문집)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이런 말이 있다. ‘추억은 아무런 힘이 없다. 발버둥 쳐봐도 단지 추억일 뿐…’ 정말 그러했다. 이별 후에 사무치는 감정과 단어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휩쓸려 가라앉을 뿐이었다. 돌이켜 당시의 기억들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갈 무렵, 한 움큼 떨어져나가 생겨난 공허에 작은 알갱이들이 쌓여 상처를 메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책의 서문에서 작가는 무릇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먼 곳으로 떠나간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결말이 정해진 가운데 부단히 읽고 헤아려야 한다.

 책을 읽으며 많은 문장을 노트에 적어 수집했다. 어떤 문장은 위로로, 어떤 문장은 선택으로, 어떤 문장은 상처로, 어떤 문장은 후회로 적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적는 것으로 이별이 익숙해질 거란 생각은 않는다.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이별들은 또다시 상처로 남아 나를 침잠(沈潛)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 언젠가 새살이 돋을 것을 안다. 오래토록 그리워함으로, 소리 없는 울음으로 새살이 돋을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흉터진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가끔 이 책을 꺼내어 읽으며, 수집한 문장들을 되새김질하며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추억할 그 날을 기다려본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에세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지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거목(巨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오고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 고집 때문에 어김없이 실패한 사랑에 끝자락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학기의 성적표 앞에서, 자잘한 일에 쉽게 화를 내고 좌절하는 모습들 속에서, 여전히 어린 아이 같을 뿐이었다. 조금도 자라지 못했다.

 책의 저자는 기분부전장애불안장애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같은 증상을 겪고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점이 꽤 많았다. 극단적이라는 점, 그래서 중간이 없는 것, 작은 실수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점(나에게나, 남에게나)이 그러했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하루, 한 주, 한 달의 기분이 좌우되기도 하는 점이 그러했으며, 사람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며 이상적인 내 모습을 그려내기 바빴던 점이 그러했다.


 책을 읽으며 정신과 전문의와 저자의 상담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나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비슷한 사람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 합리화해도 괜찮다는 말이(물론 과도해지면 문제가 된다고는 했지만) 위로가 되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조금씩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라는 말이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용기가 되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베스트앨범은 사지 않아등 많은 시와 자기계발서와 노랫말들이 우리의 상처를 긍정하고, 그늘을 긍정한다. 또한 청춘은 아픈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힘을 내서 이겨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어떤 때는 위로보단 상처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할퀸다.

 이제 나는 확실하게 위로가 되는 말을 안다. 앞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을 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괜찮아, 떡볶이 먹으러 갈까?”

 

나목.도둑맞은 가난

 나는 자존감이 상당히 낮다. 지내온 환경이 나쁘다거나 학대를 받았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어느 시점부터 나는 나 자신이 비참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고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 가건만 나는 지나간 시간을 쳐다보며 후회하는 일생을 보낼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졌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보낼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나일지라도 자기 애 한줌 정도는 가지고 있다. 자존이 낮지만 나는 나를 사랑한다. 비참하고 음험하고 성격 나쁜 나를 좋아한다. 낮은 자존이기에 가질 수 있는 이기적인 사랑이다.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 생각 하지만 나만은 나 자신을 사랑한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무리 하찮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 즉 낮은 밑바닥의 사람 일지라도 그 밑바닥을 결국 받아 들이고 인지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히에라르키 최저편에 위치한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이 저열한 감정은 너무도 물러 쉽게 부셔지고 고장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일생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남은 생명선을 자른다면 그는 어떻게 되는 것 인가.
 
  소설 속 ‘나’는 가난한 여인이다. 가지고 있는 건 한푼 없는 사회 밑바닥의 일생. 그러나 그녀는 밑바닥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난하기에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이다. 모든 걸 가지지 못한, 사회에 버려진 불쌍한 여인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남은 자존의 조각. 그녀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지켜간다. 남들이 보기에는 더럽기만 한 쓰레기 일지라도 나에게는 보물이라고, 자기 자신에게 수십번 되새기며 살아 간다. 그런 그녀 앞에 어느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자신과 동류의 인간이지만 너무 허술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가지고 있는 보물을 뽐낸다. 시간이 지나며 그녀는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점점 가깝게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사라진다. 그녀는 걱정을 하지만 생계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한다. 그리고 다시 그의 등장. 그는 자신이 부잣집 자식이며 가난을 경험하기 위해 속였다고 고백한다. 자신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강제로 부여된 원죄이건만 그는 그것을 가벼운 유희처럼 다룬다. 그것이 태어나서부터 가지게된 원죄 일지라도 그녀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남은 보물이며 자긍심이었다. 그녀는 그를 화내며 쫒아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본다. 일생을 보물이라 생각해왔던 가난은, 그의 가벼운 유희로 인해 모래알 처럼 부셔져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 단칸방 한켠 망가진 가재도구들 불과 방금 전 까지만해도 자긍심이었던 모든 것들이 더러운 것들이 되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남은 자긍심, 자존의 조각까지 남김 없이 훔쳐간 것이다. 소설은 여기서 끝이 난다. 그녀의 일생이 어떻게 진행 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글쌔 행복한 일생을 보내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흔히들 인간은 삶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 나고 싶어서 태어 나는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타의에 의해 태어나 일생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탄생을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이 종교적 윤회의 개념이든 내세의 탄생의 개념이든 우리는 목적이 없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태어나자마자 수많은 외적인 조건들이 달라 붙는다. 부모님의 재력, 받는 교육, 부모님의 애정 등등. 이것은 내가 무슨 수를 쓰던 바꿀 수 없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삶의 목적을 가져야 된다니. 결국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지만 삶의 목적을 정하는 순간에도 자기자신이 아닌 수많은 외적 요소들에 흔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 모든 것이 나의 선택 외의 결과물 이었건만 사람들은 이것을 나의 선택이라 한다. 무엇하나 골라본적 없는 멍청한 나는 그것에 수긍하게 되고  주경야독, 개천에서 용이난다라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에 속아 항상 위를 바라보며 갈망하게 된다.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그러나 멍청한 나이기에, 낮은 자존을 가지고 있는 나를 사랑한다. 부자들에게 저열한 감정을 품는 나를, 부족하게 태어나 노력하며 발버둥 치는 그들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병신같은 나를 사랑한다. 이는 소설에 나오는 가난을 보물처럼 여긴 주인공과 같은 감정이다. 남들이 보면 그런 저열한 자존, 쓰레기로밖에 생각하지 못할지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생의 유일한 보물일 수도 있다. 오늘도 나는 남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신포도로 여기며 자신이 가진 자존을 보물처럼 닦는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는 원래 세계 일주를 목표로 하는 자유로운 여행자였으나 월드비전에 합류하면서 긴급구호요원으로 활동을 합니다. 사실 세계 여행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현재 이루어 놓은 것을 다 포기하고 떠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비야는 그것을 넘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구조하는 일까지 합니다.

한비야는 구조의 세상은 우리가 아는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무한경쟁의 세상이지만, 구조의 장을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서로가 경쟁의 대상이 아닌 사랑해야할 대상, 가진 것을 나누는 대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으로 가기 전 경쟁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한비야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느꼈습니다. 한비야는 경쟁의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구조의 세상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학생은 한비야에게 재미있는 세계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조를 하세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한비야는 이에 구조하는 일이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한비야는 자신 스스로에게 항상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가벼운 바람에도 성난 불꽃처럼 타오르는 내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진하고 소진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기꺼이 쏟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한비야는 그것이 긴급구호라고 확신했기에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긴급구호는 아주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한비야가 처음 긴급구호를 나간 아프가니스탄은 갑자기 총격전이 벌어질 수도, 폭탄이 떨어질 수도, 지뢰가 있을 수도 있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험들을 이겨내고 죽음 문턱에 있는 아이들을 살려내는 일은 한비야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아이가 살아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보면 그동안 힘든 일들이 싹 잊혀지고, 행복만이 가슴속에 차올랐다고 합니다. 남을 돕는다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글을 읽기만 해도 전해졌습니다.

비록 우리는 한비야처럼 긴급 구호 팀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지만, 세상 속 소외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고, 도움을 준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

이 책은 타우누스 시리즈의 첫번쨰 소설이다.
산자와 죽은 자를 읽고 시리즈를 처음부터 읽고 싶어져서 중고서점에 가서 사왔다.

 

이 책도 등장인물이 매우 많아서 적으면서 읽었던 기억이난다.

책의 시작은 두명의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검사와 이자벨이라는 여자이다. 읽다보면 이 두 살인사건이 연관된 것임을 알게된다.

등장인물중에 누가 사건의 범인인지 유추하기가 쉽지않아 흥미진진하다.

결과적으로 사건의 범인은 제목과 연관되어있다.

사랑받지 못한여자가 사랑받고싶어서 저지른 사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돈만 원하고 사랑은 주지 않았던 남편에 대한 복수이다.

 

 

사랑받지 못한 여자의 마음이란 상상도 하지못할 만큼 비참할 것이다.

 

여자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분노는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너무 친한 친구들

이 책은 타우누스 시리즈 중 두번째 책이다.

 

타우누스 시리즈의 특징은 등장인물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또한 이름이 독일 이름이어서 읽다보면 누가 누구였는지 헷갈리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메모장으로 인물을 적으면서 읽었다.

 

이 책은 살인사건으로 시작한다. 초반부터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또한 많은 등장인물중 누가 살인사건의 범인인지 유추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사건의 원인은 제목과 연관이 있는것 같다.

친구 넷이서  더블라이프라는 회사를 차려 공동사장으로 있고,

이 살인 사건은 그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나 생긴 것이다.

 

추리소설이라 교훈이 남는 책은 아니지만 심심할 때 읽기 좋은책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