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인문학 리스타트 (생각이 열리고 입이 트이는)
독서클럽 개인 감상문
독서time조
2191191 김지수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는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서 인문학을 통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목적으로 쓰인 책이라고 접했다. 그래서 나는 뭔가 고민해 보고 사고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역사, 경제, 정치, 종교 이 네 가지의 개념적인 부분들만 줄줄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게 뭐지?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게 맞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조원들과 각 장을 읽어보고 토론을 진행할 때마다 나만 어려웠던 게 아니었던 걸 알게 되었다. 얻어 가는 게 없을 것 같았는데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뭔가 얻어지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진짜 다르구나를 느꼈던 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지나간 부분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이 많았다는 것, 그리고 반대로 내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을 오히려 다른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거를 조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느꼈다.
1장부터 4장 중에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4장이다. 나머지 1장부터 3장은 내가 스스로 생각해 보기보다는 그냥 내용을 읽는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4장은 읽으면서 수긍이 되는 부분들도 많았고, 엥? 싶은 부분도 많아서 되게 내용을 곱씹어 보면서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전자는 육구연의 심학이 그랬고 후자는 마르크스의 마르크시즘이 그랬다.
이 책은 역사, 경제, 정치, 종교에 대한 내용을 각각 옛날부터 지금까지 시간 순서대로 내용을 설명해 주는데, 한 번에 설명을 해주다 보니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기에도 벅찼지만, 한 번에 주르륵 훑어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도 당연히 공부와 별개로 지혜로운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교육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아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지금보다 덜 발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내용에서 지금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을 대처하지 못해 대공황 같은 재앙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요즘 책을 읽더라도 이렇게 책 내용을 곱씹어 보고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보는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생각을 하며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머리에 집어넣는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독서클럽 활동을 통해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경험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흡수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읽어보고 내가 여기서 뭘 말해볼 수 있을까, 어떤 부분에서 내 생각을 해볼 수 있지 고민하며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봤다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매우 뿌듯하고 유익한 활동이었다.
인문학 리스타트 (생각이 열리고 입이 트이는)
콰이어트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이 책은 내향인에 관한 책이지만, 또 모두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재밌었던 건 왜 이렇게 mbti가 유행이고, 인기가 식지 않는건지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인격문화에서 성격문화로 전환된 문화의 역사를 따라가는 게 흥미로웠다. 또한 주변에서 흔히 봤던 내향인과 외향인의 갈등을 책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서 재밌었다. 더 나아가 그런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외향인과 내향인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준다. 점점 일과 삶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대에, 나의 내향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발휘 시킬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한다. 내향적 개인이 사회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마음 (에디터스 컬렉션 9)
의타적 믿음
최정현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현대에는 이런 말들이 영화에 쓰이고 수필집이 유행을 탄다. 과연 100년전 시대는 누군가의 마음과 감정이 중요했을까? 이 책은 당시 봉건적 질서, 관습이 당연했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믿는다면, 나라를 믿고, 종교를 믿고, 국왕을 믿고, 선배(선생님)를 믿고, 의타성에 갇힌 시대정신이 난무했다. 나 자신만을 믿으며 누군가에게 배반당하지 않으려 애썼던 선생님은 고결한 엘리트로 묘사된다. 하지만 나 자신을 믿던 선생님은 결국 죄의식에 갇히고 만다. 즉, 선생님의 배신 당한 마음이 아닌 배신한 마음에 더 큰 초점을 두는 장면을 통해 ‘죄의식’에 방점이 찍힌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급변하는 세계관 속에서 무기력했던 엘리트의식과 죄의식이 혼재된 채로 살아가는 지식인의 일상세계를 나타냈다고 본다. 엄격한 윤리의식, 에고이즘만을 이야기해야 했다면 마음이라는 책에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선생님은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할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나 자신 조차도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며, 우리 인간은 의타적인 존재라는 점을 인지하고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누구를 믿었던 걸까?
K를 믿었다고 본다. K라는 인물은 결코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비관하여 죽는 인물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존귀한 인물로 K를 대한다. K 역시 선생님을 존귀하게 대했다. 어쩌면 K에 대한 믿음이 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 의지할 사람은 몇 없었고 선생님과 K는 부모와 나라로부터 신경 쇠약만을 얻을 뿐이었다. 그들의 유대감은 점차 쌓여 서로 없으면 안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나’에게 동성에 대한 호기심과 마음이 후에는 이성에 대한 마음이 될 것이라는 요상한 선생님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누구에게 의존하는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지고 그것이 이성인지, 동성인지, 국가인지, 종교인지는 각기 다르다. 이 점에서 선생님의 마음이 온전히 K에게 어느새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죄의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죄의식이 없었다면 선생님에게 자신이 그토록 의지했던 K를 그릴 방도가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타성이라는 본성이 죄의식이란 감정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으며 살아야 할까?
노기대장, 천황의 죽음으로 메이지 시대가 끝났듯이, 선생님의 죽음으로 아내를 향한 고결한 사랑이 유지되고 친구를 향한 고결한 우정이 유지된 채 선생님의 믿음이 아름답게 마무리 된다. 만일 죽음, 희생 따위가 없었다면, 믿음의 의타성이란 마음, 즉 본성이 인간의 배반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으로만 서술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예수의 죽음을 굉장히 모티브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성경에서 예수가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마음, 배반하고 싶지도, 배반 당하고 싶지도 않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선생님 역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마음을 더이상 비관하기보다는 죽음을 통해 끝냈다. 작가는 오랫동안 온갖 잔병과 신경 쇠약, 일본문화에 의해 자살이란 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죽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저 죽을 때가 된 것처럼 말이다. 35년을 참은 노기대장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역시 죽음이란 것을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믿음을 가지고 의타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나쓰메 소세키는 이 책을 마음을 다스리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권한다고 한다.
소년이 온다 (한강 장편소설)
마음 (에디터스 컬렉션 9)
아버지의 병세 악화던, 선생님의 옛사람과 관련된 발언이던. 나에게는 그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옛 시절에 있던 사람들이 다음 세대로 발을 딛지 못하는 어려움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내게 유독 공감을 샀던 대목은 선생님의 예전 이야기. 소설을 읽으며 그에게 들러 쌓여 보이는 베일이 무엇인지가 궁금했었다. 그 이야기는 선생님의 말투와 편지 속 서두처럼 담담하게 전해지는 것 만큼의 보통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마 그 속에 있는 ‘자살‘이라는 무겁고 어두운 키워드가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담하고 있는 마지막 파트를 두껍게 깔고 있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죽음을 문 앞까지 두고 연명했다. 끝끝내 삶을 살며 자신이 살며 도움을 받았던, 도움을 줬던 사람들에게 정신이 들 때 고마움을 남겼다. 잘 키워온 자식들에게 보살핌을 받아가며 편안하게 예정 되어 있던 죽음을 언제라도 맞이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그런 것에 비해 선생님은 자신이 감사함을 느꼈던 그 누구에게도 웃는 얼굴로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그에게만 예견 되어 있던 것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선택 할 수 있었던 마지막이었다.
주인공은 그런 선생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자신이 존경하고 선망하던 누군가의 죽음이란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서 주인공은 기차에 몸을 싣고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간다. 소설은 그렇게 끝나지만 주인공이 선생님의 사연을 모두 접한 뒤에는 어떤 마음였을지 궁금했다. 기차에 내리며 선생님의 생가에 방문하였을까 아니면 다시 간다고 한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끝 없는 추궁과 눈물만 보일 사모님만 있는 생가를 뒤로 한 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보필하려 바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까.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주인공과 선생님은 어느정도 닮아 있는 구석이 있었다. 형으로부터 느끼는 열등감, 죽음을 가까이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있는 시간의 기회를 뒤로 한 채 편지 상으로는 이미 죽음을 확정하고 맞이한 선생님에게 가는 무모함.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성의 감정으로도 자신을 낮게 보며 모순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소설이라고 하여 단편적인 사건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이해하지만 꽤나 입체적인 선생님의 성격을 한 쪽으로 치우치게 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곧 인간이 대표하고 있는 ‘모순’이라는 성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람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남을 욕할 처지도 아닌 것이 공인의 단편적인 실수를 보고 대중과 섞여 욕하고 그를 폄하하고 마음대로 용서하는 과정들이 나에게 있어선 극히 모순적이었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고 하면서도 그렇지 못하는 같은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본디 인간은 하나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행동들을 일치하게 하지 못하고 다른 관점에서도 끊임없이 바라보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생님은 죽은 k로부터 얻은 전리품인 자신의 아내와 살아옴과 동시에 그 사실을 끝까지 함구하였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가도 숨겼고 잘못된 행동임을 앎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은 작은아버지에게 배신 당한 그 시점부터 모든 책임을 작은아버지에게 맡기며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심함과 동시에 ‘여자‘라는 대표적인 인물인 지금의 아내만 신처럼 여기며 믿었다.
주인공은 이러한 선생님의 모순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고백을 감사히 생각 할 수 있을까. 선생님의 죽음은 그와 친해지는 마지막 단계가 되었으니 말이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 (사연 있는 책을 찾아드립니다. 수수료는 당신 삶의 이야기!)
최초의 질문 (기술 선진국의 조건)
최초의 질문은 우리나라가 기술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현재 모방으로 빠르게 성진국에 올랐지만 더이상은 모방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화이트 스페이스라는 더이상 누군가 개척하지 않아 미지의 상태인 곳에 다다른 대한민국은 화이트 스페이스에 직접 나아가고 그곳에 미래를 그려야만 한다. 그런 상태에서 작가는 최초의 질문이 그곳을 헤쳐나갈 방법이라 제시하고 있다. 최초의 질문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반적인 개념에서 벗어난 새로운 질문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질문은 누가 보기엔 터무니 없어 보이겠지만 지금까지 세상을 바꾼건 이런 터무니 없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질문이 중요하다 하였으나 한국은 최초의 질문이 나오기에 매우 불리한 환경 속에 있다. 한국은 새로운 것을 개척하기보다는 단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며 실패를 거듭하기엔 실패자로 낙인 찍히고 더이상의 도전할 기회마저 얻기 힘들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의 혁신을 주도할 자들이 절망하고 있다.
작가는 축적을 통해 창조적 파괴가 일어나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것은 축적이 아니라 퇴적이 될 뿐이다. 시장 전체 포트폴리오가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도 일본의 갈라파고스 증후군처럼 좁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결국 작가가 끊임없이 이야기 하는 것은 최초의 질문을 통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계속 도전하여 끊임없는 실패와 도전을 반복하면 그 경험이 축적될 것이고 이는 창조적 파괴를 이끌어 혁신을 주도한다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왜 이 과정으로 진행되기가 어려울까? 나는 이러한 문제의 가장 주된 문제는 정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전반적인 문제이기에 개인이 바꾸기보다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할 문제이다. 정부의 지원과 환경의 변화가 있어야 혁신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 정부는 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한다. 스케일업을 할 수 있는 인프라를 조성한다면 기술혁신을 일어날 것이다. 정부의 노력과 더불어 기업들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 내부적으로 기업은 새로운 기업문화를 조성하여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 매출 증가에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미래를 주도하고 먼저 선도하는 기업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기업의 리더는 황당한 질문을 하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그 질문으로부터 새로운 혁신을 이끌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뭐든지 빨리빨리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지칭하듯 빨리빨리 민족이라는 별명도 있다. 빨리 일을 해결하는 것이 매우 좋을 수 있다. 하지만 혁신에서는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시련의 시간을 아까워 한다면 결코 기술혁신을 이끌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자하여야 비로소 화이트 스페이스를 이끌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냥 기업이 성과가 나지 않는 것에 투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정부의 역할은 더욱 강조된다. 정부는 그들이 인내 자본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미래로 도전해 나가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미래지향적 패러다임을 심어 준 것’이라는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책을 쭉 읽으며 많은 시행착오가 중요하고 도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 자신도 사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에 도전하라고 하면 많이 망설여진다. 과연 그것이 내 현재를 지키고 안위하는 것보다 나을까?라는 고민에 빠져있다. 나아가는 미래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지만 그것이 더 가치있다는 미래지향적 패러다임은 기술혁신 외에도 삶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지녔을 때,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또한 나를 위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최초의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하며, 대한민국도 이런 환경이 잘 조성되어 화이트 스페이스를 가장 먼저 나아가 세계를 주도하는 미래를 그려보는 국가가 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