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미술관 2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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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이 지배한다는 착각 (수학으로 밝혀낸 빅데이터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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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세계문학선 2)
<멋진 신세계>는 내가 좋아하는 SF 요소가 들어간 소설이라 읽기 전부터 기대가 됐다. 나의 생각보다 어둡고 극단적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흠 없는, 완벽한 인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계급을 나누는 설정을 보며 영화 ‘가타카’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후에 가타카와 연관지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우리의 삶과 행복, 과학기술과 인간 문명, 어떤 것이 살기 좋은 사회, 행복한 사회인가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완전한 행복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고, 완전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행복의 기준을 세우고, 행복을 바라고만 있으면 평생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행복이란 나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 인생의 흠결을 받아들이고, 불편해도 좋으니 내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과정도 필요하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멋진 신세계에서 살지 않아도 좋다. 그 대신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존중이 닿기를 바란다. 책 속의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존’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첫 장부터 정해진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는 행복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이러한 결말로써 확고히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보고있는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인 듯했다. 나는 그 마음을 받들어 끊임없는 경쟁사회에서 살더라도 내 안의 행복과 가치를 잊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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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멋진 신세계 도서 감상문
책을 읽기 전에는 단순히 과학문명이 발전한 미래사회를 담은 SF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심오하고 암울한 세계관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앞부분을 읽었을 때는 이런 의문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책에서 나오는 세계관처럼 모든 것이 통제된 사회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
무섭고 끔찍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누어져있는 계층 중에 알파가 아닌 낮은 노동의 계층으로 살아가는 것도 싫었지만 책 속에 나오는 흔한 등장인물처럼 이 세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며 세계에 물드는 나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 한 부분인 노동계급인 델타 아이들이 노동만을 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싫어하게 만들기 위해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상황을 만들고 전기충격을 주고 책을 싫어하도록 만드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온 아이들은 성인되어 다른 계급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델타는 전기충격을 받게 되며 책을 읽어야 하는 상위층 계급을 불행하게 여겼고 반대로 알파는 매력이 떨어지고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하위층 계급을 불행하게 여겼다. 이런 상황들은 내게 매우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과학문명이 발전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존중받고 편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왔는데 자신이 통제된 삶을 살아가며 우매하게 살아가는 것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다수의 독자들은 불행을 느끼지 않으며 책임 없는 삶이 행복할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나는 무척이나 강압적이고 통제된 사회라고 느꼈는데 왜 행복한 사회인지 의문이 들었다. 계속해서 책을 읽으며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는 이 세계가 자유로운 것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사회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는 책임감 없이 살아갈 수 있었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소마라는 약을 섭취할 수 있었다. 사람과의 이타심과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잃어도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고 늙지도 병들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스럽지 않는 삶을 원할 것이다. 나 또한 고통스러운 삶보다는 행복한 삶이 더 좋다. 그리고 단편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불행 없이 행복을 얻는 것이 더 좋다.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책임 없는 자유와 욕구가 결국은 통제된 사회, ‘멋진 신세계’에서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 없이 얻는 것이 반복되면 사람은 나태해지고 우울감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치킨을 좋아하는데 치킨을 그냥 먹는 것과 할 일을 끝내고 먹는 상황이 있다. 둘 다 먹었지만 할 일을 끝내고 먹는 치킨이 더 맛있고 좋았다. 처음에는 치킨을 그냥 먹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치킨을 먹는 상황이 지속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치킨이 맛있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더 자극적이고 더 편한 상황을 찾게 되었다. 이런 점이 반복되었을 때 내 자신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우리 사회가 맛있는 치킨을 먹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행복, 기쁨 등 긍정적인 감정만이 축복인 것은 아니다. 슬픔, 분노와 같이 부정적인 감정도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존의 어머니인 린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애도하지 않았고 슬픔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과 다른 환경에 살아왔던 존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에게 불행해질 권리를 달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나는 많은 감정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나도 우울할 때 울고 털어내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았고 슬픔이나 분노 등을 부정적인 감정이라고만 생각하며 나쁜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존이 자신에게 불행해질 권리를 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 중 불필요한 감정은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으로 나는 행복이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행복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책 속은 행복한 사회라고 나온다. 하지만 주요 등장인물들은 불행했다. 린다는 문명사회를 동경하며 인정받길 원했지만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소마를 과섭취하여 사망했다. 존은 꿈에 그리던 문명사회에 왔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이상과 달라 고통스럽게 자살했다. 레니나는 살아왔던 문화가 달라 자신이 사랑하는 존과 이어질 수 없었다. 이처럼 린다의 관점에서 보면 문명사회에서 사는 삶이 행복하지만 존에게는 불행한 삶인 것처럼 행복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나도 아직까지 행복이라는 의미를 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정한다면 그 정의에 내가 갇힐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내가 조금 다른 것처럼 나의 행복의 가치는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에 대해 한 가지를 말해보자면 나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큰 행복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우울할 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중한 사람들로 인해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지나가는 사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행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미래의 사회는 인간이 소외된 미래로 그려진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옆 집 사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고독사와 관련된 기사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지하철 속 사람들은 이어폰을 끼고 각자의 삶에만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떤가. 그렇다면 조금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