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장편소설)

며칠 전 식물세밀화가 이소영의 칼럼에서 “2019년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의 식물학 연구팀에서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소리를 낸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우리의 성대나 청각기관과는 다르지만 식물도 그들만의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관이 감지할 수 없는 영역,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숨쉰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의 관점에서 백퍼센트 탈피할 수 없고 완전한 탈피가 꼭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자연의 입장에 서서 지구의 사건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정말 의미있는 일이다. 여기 그 귀중한 시선을 심어주는 책이 있다.
<지구 끝의 온실>은 일명 더스트 시대를 맞닥뜨린 2050년대와 더스트 종식 후 그 시대를 파헤치는 2129년 식물학자 아영의 이야기로 두 시대를 번갈아 통과한다. 
2050년대, 더스트 물질이 퍼진 지구에서 내성종이 아닌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기에 생존자들은 돔 시티를 찾아헤맨다.
나오미는 강한 내성종이었지만 아마라는 더스트에 취약했다. 두 자매는 여러 돔 시티를 배회하며 영양캡슐을 챙기고 위협자들로부터 숨어 다녔다. 그러다가 호버카(자동차같은 미래의 이동수단)와 맞바꾸어 한 좌표를 얻게 되고 ‘프림 빌리지’에 도착한다.
마을과 학교가 유지되고 유리 온실 속에서는 약간의 식물이 재배 되었기에 멸종으로 치닫는 황폐한 이 땅에서 프림 빌리지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돔 안이나 밖 모두 영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식량, 불안정한 개인은 충족을 위해 싸워 와해되기 마련이기에. 
결국 프림 빌리지도 외부의 공격으로 인해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프림 빌리지의 관리자로 여겨지는 지수는 각지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더스트로부터 보호해줄 식물 모스바나 씨앗을 건넨다. 씨앗을 심어서 각자가 있는 곳에 프림 빌리지를 만들자고, 언젠가는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정말 가능한 일인지, 흩어진 사람들이 살아 남을 수는 있을지, 그렇다하더라도 모두가 같은 마음인지 알 수는 없지만.
거슬러 올라와 현재 2129년도, 더스트생태연구센터 연구원인 아영은 강원도 해월에서 유해 잡초가 이상 증식한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 식물에서 푸른 빛이 나온다는 제보를 듣고 어릴 적 이웃 할머니 이희수가 말해주었던 푸른 빛의 식물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한 아영은 나오미를 만나 더스트폴과 그 직후의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프림 빌리지에 대한 이야기, 온실을 관리하던 레이첼과 지수의 이야기, 프림 빌리지를 떠난 이후 모스바나를 심었던 이야기를 들었다. 
나오미의 증언을 토대로 모스바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희수씨가 지수와 동일인물인 것도, 프림 빌리지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모스바나를 심어서 더스트 1차 종식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됐다.
마지막까지 지수가 자신을 떠날까봐 감췄왔던 모스바나 씨앗을 내어주기까지 레이첼의 마음은 어땠을까.
소중했던 프림 빌리지를 떠나야했던 자매가 모스바나를 심고 알렸지만 차가운 비웃음을 샀던 순간마다 얼마나 허무했을까.
그러나 작은 선택과 행동이 지구를 구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스바나의 가치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스바나는 생존하고 번성했으며 환경에 맞춰 변화했다. 인간이 바라는 완벽한 기술로 행해진 처방이 아닐지라도 그만의 방식으로 지구를 지켰으며,
그 사실을 믿고 묵묵히 견뎌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지금도 그런 존재들이 지구 끝에서 지구를 받치고 있지 않을까.

어른의 문답법 (개싸움을 지적 토론의 장으로 만드는)

 우리는 자주 싸우곤한다. 아, 힘이 아니라 ‘말’ 이다. 힘으로 싸울 때는 그리 많지않지만, 대화로는 수없이 싸운다. 과거에도 싸웠고 요 며칠사이에도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말싸움을 많이한다.
 당신과 아예 다른 생각을 가진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당신과 그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고 답답하기만 하다. 이럴 때, 우린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포기와 단념? 아니면 폭언? 심하면 더 이상 아는 체하지 않는다. 요즘 말로 손절이라고 불리는 선택지를 고른다.
 그렇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그냥 말을 안하는 것이다. 싸움의 주제거리가 되기 쉬운 갈등문제를 아예 입밖으로 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대화를 삼가고 말을 피하기만 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친구들과, 직장동료들과, 심지어 연인, 배우자와도 말다툼을 하는 일이 생긴다. 이럴 때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든 상황에 간결하고 바른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다만, 좋은 대화를 하는 습관을 어느정도 지켜가며 말하는 것과 아예 무지한채로 툭툭 내뱉는 공격적인 말은 하늘과 땅차이인 법이다. 
 평소에 내가 말을 잘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있고, 이것을 개선하고 싶은,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스포있음] 
 사랑은 지워질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이고, ‘감정’은 상황의 느낌이자 기억이니까.
그렇다. 사랑은 사실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버린 기억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아픔을 준다.
 주인공은 자신의 앞자리에 있는 다른 학생을 왕따로부터 구해주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맞서다, 패거리들에게 제안을 받았다. 특별반(장애인특수반을 지칭하는 것 같다.)에 있는 ‘히노’에게 고백을 하고오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주인공은 직접 고백하러갔고, 패거리들은 의외로 순순히 약속을 지키며 시작하는 이야기.
 히노가 당연히 거절할줄 알았으나 고백을 받았다.
남자는 히노와 사귀는 대신 조건을 제시받는다. 조건은 그랬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말을 걸지 않는다.”
“연락은 짧게한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지 말아야한다.”
 어째서인지 남자도 그 말에 응했다. 히노에게는 와타야라는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자연스레 셋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남자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히노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깨닫고, 조건을 생각하며 히노에게 좋아해도 되는지 물어본다.
히노는 선행성 기억장애를 앓고있음을 털어놓는다. 말그대로 기억이 하루단위로 사라져 기억이 나질 않는 것. 히노의 기억은, 남들이 나아갈 때 자신은 제자리에 서있는 것이었다. 히노가 남자의 고백을 받아준 것은 그런 일상에 대한 발버둥이었다.
 진실을 알게됨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진심을 고백하고 그녀의 곁에 남는다. 장애를 자신이 감당하며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일기를 채워주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인해 기억력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알려준다. 이 때문에 그녀는 크로키를 시작했다.
 순조롭게 일본 청춘소설처럼,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둘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마지막 챕터 제목인 ‘마음은 너를 그려’를 보고 나는 결말을 직감했다. 실제로 여러 책들을 읽어보며 접해온 그 ‘촉’이 솟아올랐다. 
 남자의 그녀를 향한 마지막 부탁은 자신을 잊는 것이었다. 더이상은 기억하지 말아달라는 것. 남자는 심장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공허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기억이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한 그제서야 자신의 인생에서 무언가가 결여되어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가 알려준 ‘크로키’, 그것이 그려진 공책을 찾아보다 그려진 누군가를 보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차올라 넘쳐흐르는 그 기분은 그를 기억해내는 트리거가 되었다.
 
 모두가 그를 잊어갈 때, 그녀만큼은 그를 기억에서 되짚어낸다.
 사실 이 이야기를 다 읽어가며 떠오른 소설은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였다. 행복한 청춘을 보낸 남녀의 둘 중 한명은 어딘가 아프고, 그 결말은 비극이지만 승화해낸다는 것. 엔조이식, 분위기식이 아닌, 이런 사소하면서도 사소하지 않은. 그런 로맨스 소설의 느낌은 일본특유의 소설에서 이따금씩 실감이 된다. 실제 장애의 우울감을 그렇지 않게 그려냈다는 점. 보는 이로 하여금, 다시금 따듯한 우울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에세이)

 거장은 어떻게 글을 쓰며 살아갈까, 한껏 기대를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달리 별게 없었다.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샐러드를 먹고 잠에 든다. 그리고 다시 정해진 시간에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샐러드를 먹고 잠에 든다. 낭만적인 예술가의 삶을 기대했는데, 그곳엔 글쓰는 업무가 주어진 공무원 아저씨 같은 삶이 있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기록을 읽게 되면 실망할 떄가 많다. 그곳엔 언제나 성실함으로 무장하여 매일 매일 자신의 성과를 쌓아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예술이라고 다르겠는가. 예술도 그저 밥벌이, 직업이다. 매일 매일 꾸준히 하는 것, 그게 답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골든아워 1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2002~2013)

 이책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시스템 속에서, 바보인 채로 꿋꿋하게 옳다고 믿는 일을 해내온 사람의 기록이다. 
힘겹게 써 내려간 한 글자 한글자가 한국의 중증외상센터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책이 출간된지 2년 후, 결국 그도 떠났다.
필요할 때만 자신의 이름을 팔아먹는 병원에 대한 역겨움과 살리지 못한 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견뎌내며 악착같이 버티던 그가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선 여전히 옳은 일을 해내고 있는 바보들이 희생되고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대개 장편이다. 이 책도 사보면 알겠지만 두께는 장편소설과 비슷하나, 그 속은 여러 단편들이 짜집기 되어있다.
 작가가 이쯤되면 변태인건지, 그런 취향의 글을 좋아하는지, 성姓을 자주 포함하는 작문이 많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묘사의 글은 없지만 잠깐잠깐 나온다. 모든 이야기를 소개할 순 없어서 드문드문 하겠다.
1. 드라이브 마이 카
 주인공은 한 여성 운전사(기사)를 고용한다. 그녀는 말이 없다. 주인공은 대화를 시작한다. 주인공에게는 여배우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서로다른 4명의 남자와 밤을 보내다 자궁암으로 죽는다. 마지막으로 바람난 남자에게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접근해 친구가 되었다. 그 남자가 자신의 부인에게 어떻게 손을 댔을지, 어떤 밤을 보냈을지, 상상하며 자기 스스로를 고뇌에 빠뜨린다. 말이 없던 여성 운전사가 입을 연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니까 잤다. 여자한테는 그런게 있다, 고.
2. 독립기관
 성형외과 의사가 있다. 그는 매력적인 여자를 많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 이후 유희는 그저 연장선에 불과했다. 서로 책임없는, 그녀의 세컨드를 자신이 자처했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건네는 사랑이었다. 불륜을 아무렇게 저지르다 사랑에 목매어 죽었다. 그는 사랑으로 인해 발생하는 공허와 허탈감을 여태껏 느끼지 못하다 갑작스레 접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굶어 죽는 것을 택했다. 개인적으론 꼴이 좋다고 느끼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제목이다. 이 챕터의 제목이 독립기관인데는 이유가 있다. 여성의 독립기관이 무엇인지, 남자는 무엇인지는 책에서 찾아보길 바란다. 
 주인공은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는데에서 순수한 행복을 누렸다. 그래서인지 여자들이 끌렸다. 
 
단순히 잠자리에 목매는 남자들은 어지간히 식상하게 보인다.”
3. 여자 없는 남자들
 이것은 단순히 지구에서 여성이 사라진 남성을 표현하는 내용들은 아니다. 여자 없는 남자는 그랬다. 아주 단순명료했다.  한 여성을 극렬하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그 여자는 갑자기 어느순간 사라져버린다. 남자는 그녀를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여자 없는 남자가 되면 그 고독은 쉽게 지워낼 수가 없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여자 없는 남자들이 된다.
 옷에 묻은 얼룩과도 같다. 어느 얼룩인지에 따라 다소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얼룩은 닦아내고,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진다. 하지만 완전하게 100% 지워낸다함은 불가능할 때가 있다. 여자 없는 남자들의 고독이 그랬다. 우리가 단명할 때까지 마음 한 켠에 우두커니 자리를 잡고 앉아 언제든지 마음을 후벼팔 준비가 되어있다.
 
 제목이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 다소 남성향에 맞춰져 있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남자 없는 여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잃고 앓는, 지리멸렬한 세상은 참으로 텅비어있고 어딘가 외로움이 있다.
 

일인칭 단수

 하루키의 소설은 언제나 미스터리를 동력으로 전진한다. 이번 단편집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한 이 책의 주요한 테마는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때, 우리는 무엇을 할수 있을까’ 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과거의 영향 속에서  파멸하고, 무기력해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몇몇 주인공들은 덤덤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다 과거의 조각이 다시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르더라도 덤덤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태도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장사의 신이다 (일단 돈을 진짜 많이 벌어봐라 세상이 달라진다!)

 작년 겨울이었다. 유튜브에서 눈을 사로 잡는 영상썸네일이 있었다. ‘하루 매출 16,000원 살고 싶습니다.’ 라는 글과 함께 성인 남자가 주방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이미지였다. 그 영상을 시작으로 나는 은현장, 장사의 신의 팬이 되었다. 그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자신이 운영하던 치킨집을 200억에 매각하고, 유튜브를 통해서 장사가 되지 않는 곳을 찾아가서 도와주는, 현재는 유튜버이다. 
.그가 쓴 ‘나는 장사의 신이다’ 라는 책에는, 20년이 넘는 그의 장사 인생 노하우뿐만 아니라,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성장하는 과정 또한 담겨 있다. 나는 이 노하우들이 단순히 장사라는 분야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취하는 사람들의  본질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책을 읽는 기쁨은, 쉽게 찾을수 없는 좋은 멘토의 조언을 밥한끼 값으로 쉽게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데미안 (세계문학전집 44)

데미안은 상징이 많이 나온다. 꿈이 중요한 것들을 암시하며 신비주의적인 색채도 짙다.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의식적으로 금기시되는 것들에 다가가고자 하고 무의식적으로는 그것들을 통합시키고자 소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싱클레어는 소설의 개막부터 부모로부터 심적인 독립을 하고 시작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간파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가 될 수 없고 자신을 완전히 포용해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어머니 또한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보금자리를 잃은 싱클레어는 방황해야만 한다… 그러던 와중에 데미안이 나타남으로써 부모를 향했던 싱클레어의 의존이 데미안으로 옮겨진다.
신비롭고 이교도적인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무의식적 소망과 결을 같이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정신적 인도자로 자리잡게 된다. 방황하는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여러가지 자극을 줌으로써 이정표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데미안이 사라진 뒤 싱클레어는 또 다시 길을 잃는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보다 편한 것을 향해 도피한다. 후에 거리를 거닐며 이러한 자신의 과거 허물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 무리지어 놀러다니는 학생들을 향해 마음 속으로 야유하기도 한다.
도피하던 와중 또 다른 길잡이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이 사람 역시 신비주의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싱클레어가 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 싱클레어는 요령좋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힘겨운 통합의 과정으로 나아가야만한다. (싱클레어의 성장 이야기니까 그 부분이 부각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그 과정에서 주변인들이 싱클레어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소모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싱클레어가 더 이상 피스토리우스 곁에 있어봤자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피스토리우스와의 관계를 끊는다. 그 후 데미안과 재회하고 징병된 후 탄알에 맞고 쓰러진다. 싱클레어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데미안을 통해 성장한다. 내면의 고뇌는 수없이 한 것에 비해 싱클레어의 삶 자체는 꽤 안락한 편이었으니 그 부분을 탄알이 채워주었던 것 같다.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때 처음으로 생사의 위기를 겪은 것 같으니까…
인물들이 전체적으로 연극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데미안 자체가 현실적이기보다는 내면, 상징 이런 것들을 더 중요하게 다뤄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읽은 친구들의 후기를 들어보면 이런 상징적인 특징 때문에 호불호 많이 갈리는 것 같았다.

이방인

주인공인 뫼르소는 기계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과묵하고 감정표현이 적으며 욕구가 거의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뫼르소는 결정할 때도 단순하다.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런 이유들로 선택한다. 그의 결정은 무언가를 원해서라기 보다는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음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웬만한 것들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이 남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진심이 아니라면 상투적인 인삿말도 하지 않는 이런 솔직함은 어떻게 보면 통달한 도승처럼 보이지만 뒤집어서 보면 또 정반대로 보이기도 한다.
뫼르소가 살인에 대해 ‘ 햇빛이 너무 눈부셔서’ 라고 변명한 것 또한 솔직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본인도 모르는 어떤 복잡한 내면의 의지가 섞였다 한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직함을 보인 것이다. 검사는 뫼르소가 첫 발을 쏜 후 뜸을 들이고 네 발을 더 쏜 것이 확인사살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일이다. 끼워맞추고자 한다면 어디에든 욱여넣을 수 있다.
검사는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건에서부터 역행하고 있다. 과거가 먼저이고 현재가 나중인데도 검사는 이를 거꾸로 현재를 먼저, 과거가 나중이 되게 만든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부모님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든 질나쁜 친구와 사귀었든 그런 것들은 뫼르소의 살인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현재였을 순간들에 충실했을 뿐인데 살인을 저지른 순간부터 뫼르소의 모든 삶이 살인의 복선이 되어버리고, 과거가 현재의 주석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검사나 재판장처럼 뫼르소의 심리를 알기 쉽도록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만 마냥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을 엮어서 스토리텔링 해내는 것이 책 밖에서 보면 터무니 없긴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서우니까 나름 납득이 가도록 정리해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뫼르소의 솔직함이 작품 초반에서는 별로 의식하지 않는 솔직함이었다면 후반으로 갈수록 의식하는 솔직함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자신의 솔직함을 관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소신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뫼르소는 여전히 사회와 유리되어 있을지언정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멀리 있지 않다. 어찌 되었든 삶에서 도망치지 않고 충실히 살아간다… 
마지막 문장이 정말 좋았다.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이 부분인데, 종교로 도망치지도, 좌절해서 삶을 포기하지도 않고 오히려 죽기 직전까지 삶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