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인문학 그리고 통찰 1 (확장 편,예술은 우리에게 열려 있다)

평소에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던 책 이었다. 작가와 친구와 대화로 다양한 분야에서의 예술에 대해 의견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분야를 전공하는 학생으로 예술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일으키는 책이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예술을 작가는 우리의 일상과 연결시켜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형식으로 예술에 대한 의견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그 의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에 이끌려 노르웨이의 숲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사실 읽기 전까지는 좋아하지 않는 책이었다. 주변 지인들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편견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날이 선 시선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작가의 필력과 책에 묘사된 6-70년대 일본의 풍경은 그 시절을 전혀 느끼지 못한 나 마저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우려했던 것 보다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용이었고, 오히려 책의 향기에 취한채로 며칠을 보냈다.

 

상실의 시대‘.

현재를 살아가기에 그 이름을 현재에 끼워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을 수도 있으나 전염병의 만연으로 이전과 크게 다른 생활을 하게 된 이상,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은 우리 각자에게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적어도 나는 통신 회선을 통한 소통이 내가 구축한 인간관계와 그에 대한 나의 정의에 작은 실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는 사람이나 집단과의 관계에 있어 초연하다고 여겼으나, 크게 도는 전염병으로 방에 있는 시간은 확실히 많아졌고 사람인지라 여러 문제에 대해 헤아리게 되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사람이나 다른 무언가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은 끊어지거나 사라지게 될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의식하고 있지 않았을 뿐 지금까지 굉장히 많은 인연이 오고 갔다. 그리고 그중 대개는 소멸되듯 사그라졌고, 전염병은 그것을 다그쳤다. 물론 그 만남들이 절대 헛것은 아니리라. 내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간에 아주 미세한 작용은 끊임없이 일어나 나를 조금씩 바꾸었겠지. 그럼에도 현재 나는 관계에 대해 작지만 어느 정도 상실감을 느낀다.

분명 전염병이 끝난 후 아무렇지 않은 듯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인연들과 만나며 즐거운 듯 지낼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두고 있지 않을 뿐, 상실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다. 아마 나는 관계에 초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앞에 두어 깊게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읽는이에 따라 우울하고 눅눅한 느낌이 들 수 있는 책이지만 글을 통해(그것이 어떤 종류건 간에) 타인을 특정 감정에 빠지게 하는 것은 대단하다. 그러한 글 중 하나가 상실의 시대가 아닐까.

 

 

 

이방인 (세계문학전집 266)

“이방인”이라는 책에 대해서 들어본 지는 아주 오래됐지만 한 번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우연히(여러 제안들 중에서 사다리타기로 주제 도서를 정했으므로 정말 우연이 맞다) “이방인”이 2020학년도 2학기 주제 도서로 선정되어서 읽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참 쓸쓸한 내용이었다. 마냥 허무했냐 하면 그건 아니고, 공허한 듯 보이는 속에는 사실 주변인으로서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고 생각했다. 짧은 소설이라 읽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실존주의 문학이다 보니 철학적인 메시지가 짙게 담겨 있어서 생각하고 음미하는 데는 조금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사람들의 독후감이나 서평을 찾아 읽고, 또 독서클럽 회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읽다 보니 서서히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실존주의 문학은 읽는 것 자체가 특이한 경험인 것 같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정보 습득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인터넷으로 손쉽게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뇌가 퇴화되고 있으며, 사고력 향상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신이 찾고자 하는 정보를  도서관에 가서 책으로 습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웬만한 정보들은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글쓴이와 정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다.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이 정보 습득에 있어서 생각하는 시간이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축된 시간만큼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단순히 정보 습득의 양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요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보면 카드뉴스나 짧막한 영상으로 국내 / 해외 뉴스에 대한 정리가 잘 되어있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오히려 나는 융합적인 사고방식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예시를 들자면, 디자인 분야 전공이 아닌 사람이 포토샵이나 영상편집 프로그램을 취미로 학습하려고 한다. 유튜브에 포토샵이나 영상편집 프로그램을 검색하면 많은 전문가들이 프로그램 설치부터 심화까지 다루는 학습 콘텐츠 영상들이 많이 있다. 굳이 비싼 비용을 들이며 학원 다닐 이유가 없어지면서 접근성도 매우 좋아졌다. 또한, 책으로 학습하는 것보다 전문가들이 프로그램 실행하는 영상을 직접보며 따라할 수 있기 때문에 학습능력도 향상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터넷의 발달이 단순히 정보의 습득량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얻으면서 융합적인 사고방식이 가능해지고, 추가적인 학습도 가능해짐에 따라 자기개발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앞으로 기술은 더욱 발전할테고 이로 인해 정보 습득은 더욱 간단해질 것이다. 막연히 현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것보다 이를 더 잘 활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면 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2020년 2학기 독서클럽을 계기로 김초엽 작가님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었다.  책에 대한 정보 없이 책의 표지만을 받았을 때는 제목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단어가 과학적이고 사차원으로 떠나는
내용을 암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책의 작자 또한 공대생 출신인 것이 공상적인 내용의 어려운 내용을 암시하는 듯 했다.
이 책은 나온지 1년밖에 안 되었지만 꽤나 이름이 알려진 책이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어려운 용어가 뒤섞인 그런 학술적인 책이 아니었다.
인문학적 요소에 공상적인  배경을 넣어 어쩌면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일들도 곳곳에 숨겨 놓았다.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다양한 줄거리를 구성하였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SF 소설이라는 장르에 어려움을 느끼지 말고 이 책을 한 번쯤 도전해보았으면 한다.
#독서클럽,  #2020년 2학기,  #마일리지,  #권준혁

이방인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읽는 독자들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책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읽고 있을 때 제일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그리고 책을 끝까지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일반적인 감정으로 전개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읽히다가 갑자기 어떤 사건이 펑하고 터져서 책을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부분이 꽤나 곳곳에 있었다. 예를 들어, 뫼르소가 태양 때문이라는 이유로 아랍인을 죽이는 장면에서 그런 부분을 느꼈고 뫼르소가 살인죄로 법정에 섰을 때 법정이 구성되는 내용들이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였다는 부분보다는 죽이기 전에 뫼르소가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보였던 무관심한 태도 같은 평소의 도덕성에 대한 부분으로 재판이 이루어진 부분에서 의아함을 느꼈다.

 

이 이방인이라는 책 안에서 뫼르소는 이방인이다. 자신이 피고로써 있는 법정 안에서도, 평소의 자신의 생활에서도, 심지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이방인이라는 것은 이 사람의 인생은 무관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관심이기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죽은 다음날 자신의 애인과 데이트를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뫼르소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뫼르소는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될 수 있다.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의 생활에서도 자신의 감정에 거짓말 없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사회에 어울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 마주보면서 살아간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우리가 생각하는 생각이나 이념과 다르면 이방인으로 취급한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이 맞지 않다면 서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려고 하거나 인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로 이끄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우리는 이방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 이방인도 나름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책의 내용 자체는 끝까지 못 읽을 정도의 어려움은 아니다하지만 읽고 나서 여러 가지 깊은 철학적인 생각을 해봐야지 이 책의 진면목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평소에 한국적인 사랑과 정이 요구되는 감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좋아하던 SF장르를 한국에서?라는 생각과 이질감을 느끼며 책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편견과는 다르게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에서 겪거나 생각했을 감정들을 흥미로운 소재들로 풀어내서 전혀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의 모든 에피소드에는 사랑과 정이라는 감정이 잔잔하게 깔려있다. 그 감정들을 강하게 또는 억지로 감동을 이끌어내는 상황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내가 현실에서 겪는 문제와 상황, 감정들을 SF로 풀어내어 다시 한번 현실에 의문을 제기 할 수 밖에 없었던 책이다. 
인상깊었던 에피소드를 적어보았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릴리의 얼룩이 특별한 정보값을 갖지 않는 하나의 특성일 뿐이었지만 지구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릴리를 마음껏 멸시하고 혐오할 수 있는 하나의 낙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하나의 특성이었던것들을 지구의 사람들은 ‘결점’이라고 부르며 혐오하고 결점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며 공간조차 분리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서 자라온 올리브는 당연하게도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았고, 다시 지구로 돌아와 분리주의에 맞서는 삶을 살았다. 릴리는 올리브의 행복을 위해 마을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렇게 자라난 마을 사람들이 비개조인들을 위해,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구를 그렇게 바꿔주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스펙트럼
현대사회에서도 그러한 어떤 ‘도구’ 없이는 대부분 소통하지 않는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혹은 어떠한 목적이 있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과 소통을 가지지 않는다. 
강제적으로 그런 도구들에서 떨어져 도구들 없이 순수한 관계를 맺어가는 희진과 루이가 가볍고 일시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한편으로는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어릴 적에 휴대폰도 없이 그저 놀이터에서 만나던 친구들과 순수한 마음으로 감정을 교감하던 순간들이 떠올랐지만,
희진이 그 행성을 다시 찾지 않고 행성에 대한 정보를 넘기지 않은 것은, 마치 내가 어릴적 친구들을 수소문해 찾아도 지금의 도구들을 버릴 수 없는 나와 친구들은 과거만큼이나 서로를 순수한 마음으로는 만날 수 없을 것이고, 과거를 재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관계뿐만 아니라 지금의 새로운 관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기술들 사이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어떠한 목적 없이 순수한 마음만으로는 만나기 힘든 현실이 조금은 씁쓸했다.
감정의 물성

“물론 모르겠지, 정하야. 너는 이 속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내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보현은 자신의 우울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하에게 말했다. 정하는 보현을 위로하려 노력하지만, 마지막에서야  위로할 수 있는 어던 언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부터 우울과 함께하게 되었다. 우울의 원인은 그 당시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의 우울의 원인은 나 또한 명확하게 정의 할 수 없다. 누군가 원인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겠다는 말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슬픔에 가득 차 있고, 어느 날은 공허함에 가득 차 있고, 또 다른 날에는 행복해하기도 하다. 보현의 생각에서 반대로 보자면, 우울에는 명확한 해결책이 없으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해나 배려를 원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우울’이라는 감정에 중독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보현의 저 말이 가장 인상깊었던 점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우울을 정의 할 수도 없고, 통제 할 수도 없다. 보현은 어쩌면 영켜있는 현실을 뒤로하고 우울체의 공허를 통해 조금은 우울을 통제한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놓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재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사람들은 재경을 닮은 다른 약한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래서 결함이 있는 존재를 중요한 자리에 올리면 안 된다고. 표준인간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비난들은 분명 재경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재경은 우주비행사로 선정된 이후 대중들이 말하는 약한 집단의 대표가 되었다. 재경의 업적과 그가 연구원이었던 사실을 뒤로 한 채 여자, 동양인, 미혼모와 같은 어쩌면 선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조건들까지 여러 프레임이 씌워져 화제가 되었고 관심과 비난을 받았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재경은 그 누군가들의 대표가 되고싶어했을까? 그저 한 사람이 그저 우주비행사가 되려고 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재경을 개인으로 바라보고 싶다. 현실에서 또한 단순히 여성, 남성 혹은 인종으로 만으로도 프레임을 씌우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의 업적이나 그 사람의 본질은 뒤로 한 채 그러한 프레임으로 많은 것들이 판단되고, 다른 내용은 흐려진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프레임들에 갖혀 상대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소설)

 단편 소설은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채 하기도 전에 소설이 끝날 듯했다. 그런 내게 <내게 무해한 사람>은 첫 단편 소설집이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짧은 시간동안 주인공에게 완전히 몰입하였다. 장르가 판타지나 액션이었다면 절대 불가능할 일이다. 최은영 작가는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상을 이 책에 담았다. 남녀 간의 데이트 폭력과 가정폭력, 성소수자 차별, 학교 폭력 등 미디어에서 다루지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지만 내 지인이 겪는 일임을 알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존재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기적으로 보이는 인물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의 생각과 행동이 정당화된다. 나의 관점에서는 이기적인 행동일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게 되었을 때 애인에게 이별을 고할 것 인가 말 것인가, 바람을 필 것인가 마음을 접을 것인가. 한 상황에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존재한다. 어떤 선택도 비난할 수 없다. 누구나 가치간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잔인하다는 표현도 어울리는 것 같다. 아들에겐 한없이 관대하지만 딸에게는 여자가 조신해야 한다며 큰소리도 마음껏 못 내고 대들지 못하게 끝없이 억압하는 엄마. 못된 엄마처럼 보이지만 그가 자라온 환경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알고 이를 답습했음을 알게 되면 쉽게 비난할 수 없게 된다. 그에게는 자식은 반항해서는 안 되고,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지만 아들은 예외인 것이 당연하다. ‘여자가 목소리가 너무 크면 안 된다’ ‘여자가 어딜 함부로 대드냐’ ‘딸내미가 애비 밥 상 차려야지’ 주변에서 건네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인 그를 누가 쉽사리 비난할 수 있겠는가. 최은영 작가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인 상황을 잘 녹여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니,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니 그건 비정상이야. 세상이 이렇게 말해서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여자친구가 잘해야 남자친구 기가 사는 것 아니겠어? 남자친구가 사랑하니까 집착도 하는 것이지. 세상이 그렇게 몰아가는데 아니라고 용기내어 소리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제목과 맞지 않게 소설 속에는 ‘무해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다. 무해한 줄 알았던 사람은 나의 무지에서 나온 착각이었고 그에게 나는 오히려 ‘유해한 사람’이었다. 친구를 위해 용기를 낸 주영이 효진에게 과연 무해한 존재였을까. 이런 사람들의 속마음을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풀어내며 이들에게 더욱 공감하게 만든다. 잔잔한 분위기와 그렇지 않은 주제를 담은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수이는 자신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오래 바라볼 수도 있구나. 모든 표정을 거두고 이렇게 가만히 쳐다볼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경은 자신 또한 그런 식으로 수이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

  사춘기부터 나는 줄곧 운명의 사람을 꿈꿔왔다. 영원한 운명의 사랑, 운명의 친구. 나는 그런 것들이 반드시 인생에 한번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의 기억과 감정을 교류하며 인생을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운명’을 찾기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거나, 사랑하는 이에게 투자하거나하며 지냈었던 것 같다.

  2020년에 코로나의 시대가 도래하고, 나는 일본에서 살고있는 남자친구를 1년간 만나지못하게 됐다. 올해까지도 남자친구가 유학생이었다면 학교를 휴학하거나, 학기 등록 후 학교에 가지않더라도 출석 인정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는 올해부터 회사원이었다. 언제쯤이면 나아지겠지, 하던 시간들이 막연히 흘러 남자친구를 마지막으로 봤던 계절인 겨울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남자친구와 그 전에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남자친구를 내 운명의 사랑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아주 의지했었다. 그는 성품이 원채 너그럽고 자상한 성격이었고 그런 나를 잘 받아줬다. 또, 유학생 시절에는 ‘학생’이라는 어떤 여유가 있었기때문에 그 너그러움이 배 였었다. 올 해 봄. 취업 후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에게는 시간과 여유가 줄어들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예전처럼 마냥 매달릴 수 없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상실을 가지고 있었다. 물질적인 상실보다는 소중한 이의 부재, 빼앗긴 관계, 애정 결핍 등 비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미도리의 상실, 나오코의 상실, 나가사와의 상실 등이 마치 길을 걸어가다 돌부리에 발이 걸리듯 책의 진행에 산산히 널부러져 있었다. 그 돌부리에 발을 걸려 잠깐 멈춰서서 등장인물들의 기억을 듣는 것이 이책의 진행방식이라면, 나는 나가사와의 돌부리에서 가장 오랜시간을 보냈었다. 나가사와의 이야기 초반 부, 나는 나가사와가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다. 첫번째 토론시간에 나가사와가 여자들이랑 자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와타나베가 몇명정도냐고 물었을 때 70명은 넘는다고 말했던 부분에 대해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그러면 신경쓰고 있는거 아니냐고 말하며 웃었다. 나가사와는 이야기의 진행에서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를 감정에 대한 서술이나 쏠림없이 줄줄히 늘어놓는 식의 등장이 많았고, 나는 그것이 예술작품 특성상 어떤 사건이나 등장인물, 배경에 대한 서술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등장하는 설명으로 인식했다. 
  나가사와의 유학 전 하쓰미와 와타나베, 나가사와 셋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나가사와는 하쓰미에 대해 의연한 듯 보이고, 하쓰미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들을 꽤나 길게 늘어놓는다. 역시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이다. 여기서 나는 나가사와의 행동에 이상함과 의문을 느꼈다. 정말 괜찮다면, 나가사와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을까. 

  “하쓰미의 죽음으로 뭔가가 사라져버렸고, 그건 참을 수 없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어. 이런 나에게조차.”

  하쓰미의 자살 후 나가사와의 상실을 보며 나가사와에 대한 진행방식은 작가의 의도였다고 생각했다. 나가사와는 사실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학업에 대해서, 아무 여자들을 만나 잠자리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은 일과인듯 설명했지만 그런 것들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람으로 보이게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어떤 관계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아무렇지않다는 자기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그런 나가사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하쓰미를 잃고나서야 그는 자신을 마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는 나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믿었고, 나가사와는 믿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와 나가사와 모두 결국 사람은 본질적으로 ‘나’의 곁엔 자신 외엔 아무도 영원할 수 없다는 상실을 겪었다.

  나와 남자친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가장 아래에는 남자친구와 나 각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남자친구를 믿고 그에게 나로부터의 여유를 주기로 했다. 나 또한 남자친구로부터의 여유를 얻었고, 다른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더 좋은 관계가 됐다고 생각하며 서로의 성숙에도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씩 내가 영원히 혼자라는 사실에 공허함을 느낀다. 영원한 사랑은 몰라도 영원한 사람은 없으니.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이는 나 자신 뿐. 우주의 팽창 가운데 점점 멀어지며 각자의 고독함을 중력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상실의 시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이 책은 인터넷을 통한 독서에 너무 익숙해진 사람들의 달라진 독서 능력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작가는 극도로 변해버린 자신의 독서 능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극단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비판하며 우리는 기억력 향상을 위해 앞으로 단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는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고 인터넷을 통한 독서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원래의 독서패턴(책을 통한 독서)를 되돌리려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저자가 너무 과하게 모든 것을 비판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처음부터 쭉 읽어서 원하는 내용을 찾는 것이 아닌,  띄어 읽기가 익숙해졌다 하면서 이는 우리가 책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고 말한다. 반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은 발전했고 더 이상은 책에서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닌 인터넷 속에서 제대로 된 자료를 찾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게 되었다. 즉, 우리의 읽기 패턴의 변화는 우리는 퇴화가 아닌 발전이다. 물론 인터넷 속에 있는 수많은 블로그 속 자료들이 모두 믿을만한 것은 아니지만, 의견이 뚜렷하게 드러난 책 역시 주관적인 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내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책의 저자는 컴퓨터가 막 생길 당시부터 살아왔던 사람이고, 나는 컴퓨터가 이미 상용화된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변화와 이 사람이 생각하는 독서의 변화의 편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를 불러오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올해 10월에 개정판이 출시되었는데, 나는 그 이전 버전을 읽게 되었다. 사실 이 책 자체가 너무 현재 사회의 변화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개정판은 더 비판적이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어떤 변화를 가지고 출판이 되었는지 궁금해지기는 하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힌 만큼 기대를 했지만, 나의 견해와는 맞지 않는 책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쁜 책이라는 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책을 읽으며 흥미롭게 읽지는 못했지만 나의 관점을 다잡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어떠한 면에서 내가 차이를 느끼는 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중에 시간과 체력이 된다면 개정판을 읽고 작가의 변화나, 나의 관점의 변화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