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쿠스틱 라이프 11

 언젠가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을 때, 한 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붙자고 하던 말이 기억이 난다. 
 “엄마, 비둘기는 좋겠다. 학원에 안가도 되니까.”
하루의 시간이 정말이지 천천히 가는 어린이에게 한 곳에 가만히 앉아 공부를 해야하는 학원은 얼마나 지루한 곳일까?
사람이란 참 신기한 동물이다.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동물은 사람을 따라올 수 없다고 여길 정도로.
유치원생부터 시작해 직장인, 부모님까지. 각자의 고민 한 가지씩은 가지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그것은 공부, 입시, 취업으로 시작해 각자 삶의 가치까지 이어지며 우리의 마음을 폭풍우치는 바다와 같이 만든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남자 학우에 해당하지만) 군에 입대. 그 이후 복학까지. 혹은 대학교 입학을 하게되어 자유라 생각했지만 막상 이어지는 4년간의 학업.
우리의 삶은 언제나 고민을 하게하는 순간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저절로 우리가 내뱉는 말이 있다면,
“인생 참 힘들다.”와 같은 부류의 말이 아닐까 한다. 

좋았던 기억들 중 특정한 장면이 머릿속에 각인되어서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한 컷의 이미지로 남은 기억들.

 
하지만 힘들다라고 느끼는 와중에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영화처럼 밀려들어오는 기억들이 있다. 
입시때문에 좌절하던 도중 핸드폰에 도착한 합격알림 문자를 보던 그 순간.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가서 서로 비슷한 행복감을 공유하던 순간. 
퍽퍽하고 거친 질감의 빵을 씹는 중간에 간혹 느껴지는 단 맛이 있듯이 내가 느끼는 삶은 그런 빛이 나는 순간이 있다고 본다.
비록 내 삶뿐만 아니라 모두의 삶이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인생은 짧은데 슬픈 걸 느낄 새가 어딨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어딘가에도,그 사람의 힘든 부분은 내재가 되어 있으리라 여겨진다.
다만 그 힘듬을 잊고 이겨내기 위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다. 
그런 내게 누군가 “왜 그렇게 열심히 무언가를 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저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한 개, 두 개씩 무언가 프로그램 혹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참여하는 나인데, 그 모습이 대단하다며 그렇게 물어보는 이가 있었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아르바이를 가고 저녁엔 수업을 듣고 그 사이사이 짬을 내서 여러 일까지 참여하는 모습이 너무나 바빠 보인다며.

어설프지만 로망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다 보면 어떤 로망은 은근 슬쩍 현실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건 꽤 질 좋은 행복임에 틀림없다.

문득 이 단어가 생각났다. ‘어쿠스틱 라이프’
어쿠스틱(Acoustic)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의 느낌은 잔잔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어쿠스틱 기타외의 다른 느낌은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 그 단어와 ‘라이프(Life)’의 조합이 퍽 조화롭게 느껴졌다.
그 단어는 책의 제목이었고, 혼자 살던 시절에 가끔 보곤 했던 웹툰의 제목이었다. 
그냥 지나가면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한 사람의 생활기를 그냥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느낌을 가진.
어두울 때가 많고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단순히 읽기 편해서 그리고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부드럽게 넘기며 내용을 읽을 수 있기에 이 작품을 좋아했다. 
기존에는 일반 소설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당시 외국에 살고 있던 터라 소설을 읽는 것 마저 공부와 같이 느껴져 
담담히 읽혀지는 이 작품을 더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매일매일 어쿠스틱 라이프
다시 아까의 질문을 받은 순간으로 돌아가본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요? 
남들이 다 하니까. 라기보다는 결국 내 말의 종착지는 이와 같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어느새 평범하게 살기위해 아등바등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본다. 우리는 평범하게 친구와 만나고 밥을 먹고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
빅데이터에 대해 배우고, 4차 산업에 대해 연구하며, 이전에는 관심도 없던 다른 전공에 대해 공부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잘 살고, 멋지게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닌.
막상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선 간단한 음식 만들기, 집안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 세탁이란 이런 것이다와 같은 책을 읽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이 난무하는 바다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표류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토익의 자릿수를 변화시키기 위해 영어를 공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달려가고 있는 모두가 그리고 여태껏 그렇게 달려온 모두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전혀 쓸모 없는 것을 배웠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는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전력질주를 하며 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왜 달리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삶의 가치에 있어 정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그 가치에 대해 되뇌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아빠의 행복을 부탁해

아빠의 행복을 부탁해

 

같이 있는 시간이 비례하는 것일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엄마와의 애틋함과 달리 아빠와는 어딘가 모르게 미묘한 어색한 감정이 있다. <아빠 어디가?> < 아빠 본색> 같은 아빠 참여 프로그램도 많이 생기면서 과거와 다른 친숙한 아빠, 친구 같은 아빠가 대세이고 점차 아버지에 대한 사회상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아빠하면, 낯설고, 어색해한다. 일생을 가족의 안녕을 위해 바쳤는데 왜 고마움보단, 어색함이 앞서는 것일까? 작가는 아빠에게 이런 어색함을 갖고 있는 평범한 20대로써 아버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에세이이다.

 

아빠는 나를 위해서라면 바위 같은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남들에게 나를 부탁한다는 말을 쉽게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난 한번도 우리 아빠를 부탁한다는 말을 해본 적도,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빠는 나에게 언제나 강인하고 척척 해내는 나의 슈퍼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퍼맨 아빠도 외로움을 느끼는 거 같다. 요즘들어 부쩍 엄마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면, “그게 뭔데?” “무슨 얘기해?”, 영화를 보다가다 왜 갑자기 저 남자는 죽은거야?”라고 물어본다. 그럴때마다 그냥 그냥이라며 말끝을 흐리기 일 수 였다. 그러나 [아빠의 행복을 부탁해]라는 책을 읽은 후, 이처럼 아빠의 언어, 외로움, 고됨, 이런 감정을 다 느끼기란 아빠 당신만이 알기에 자식으로써 전부 헤아릴 수 없지만 아빠를 이해하고 내 자신을 반성하게 한다.

 

대나무 회초리로 맞아 종아리에 빨간 피멍이 생기도록 혼나야지 반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아빠의 행복을 부탁해>라는 책은 받는 거에만 익숙한 자식을, 아빠와의 대화를 피하는 자식을….혼내키려는 책이 아니다. 단지 아빠를 위로 하는 글인데 내가 혹여 아빠를 속상하게 한 행동이 없나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이 반성은 책을 덮고 고개를 돌리면 사라지는 연기 같은 반성이 아니다. 오래토록 책의 구절이 아빠를 마주할 때 떠오른다.

 

책을 읽기 전, 나는 다른 집과는 달리 아빠와 유독 사이가 좋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빠에게 잘하고 있다는 오만한 생각까지 가졌다. 그래서 아빠에 대한 위로의 글에 반응하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러나 중간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목넘이가 뜨겁다. 짧은 토막의 글만이라도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고 깊은 울림을 준다. 위로라는 것이 친숙한 사이에서 해야지만 와 닿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와 어색한 작가가 하는 위로는 소리 없는 울음 같아 더욱 절절하다.

아빠와의 사이가 좋은 집, 어색한 집 상관없이 나와 같은 20대라면 한번쯤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리뷰를 끝으로 책의 한 구절을 빌어 아빠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아빠가 지나가는 말로

인생을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때문이었다고 했는데

 

아니야, 아빠.

아빠는 가족 때문에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빠니까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거야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오늘도 난 아빠의 행복을 부탁해!

 

 

 

언어의 온도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나이를 먹고 점점 커 갈수록 말 한마디 마다의 중요성을 느낀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집어 들게 한 이유였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책을 읽을 시간을 거의 갖지 않았는데, 우리 학교 학술정보관에서 내가 스스로 책이 읽고싶다고 느껴서 책 대출을 한 건 부끄럽게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책은 여러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고 일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부담없이 읽기 좋았다. 공감되는 부분도 굉장히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내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꼭 어른으로 자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답게행동하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어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발견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닌진짜 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자신과의 싸움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게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부분은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게 해 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얼만큼 잘 알고 있었고, 잘 해줬는지 생각해보았다. 나와 평생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인데, 그동안 주변만 신경쓰면서 살진 않았는지, 그러면서 본래 나의 모습을 감추거나 바꾸려고 하면서 살진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이기주 작가는 방향키가 망가진 배처럼 갈팡질팡하는 상태를 말하는 ‘rudderless’라는 단어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삶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인 러덜리스라는 영화를 언급하면서, “내 탓이야라며 혹독하게 스스로를 책망하며 죄책감의 바다에서 표류했었다는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나를 용서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에 자책과 분노로 똘돌 뭉친 월을 숀은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장 못하는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위로해주는 것.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그게 뭐 대수야?’, ‘잘 할 수 있어라는 말로 위로와 용기를 불어주면서 우리는 정작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냉정하기만 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문장이었다. 작가는 가끔 삶이 버겁거나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비겁함으로 둔갑하려는 순간마다 인생의 바다에선 누구나 한 번쯤 길을 잃는다는 것과 숀교수가 들려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곤 한다고 한다. 우리도 지금 한번씩 말해주자.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잘하고 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고, 나에게 한없이 차가웠던 내 자신에게 나름의 따뜻한 언어의 위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민이 많고 현재 자신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직접적으로 힘내라는 말보다 따뜻한 언어 하나 하나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2017)

 올해, 2017년은 참으로 폭풍같았던 해였다. 전 대통령은 탄핵되어 법정에 섰고, 국민은 선거를 치렀으며, 새로운 대통령을 뽑았다. 9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인용이 발표된 순간의 함성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순간 오롯이 기쁘지 못했다. ‘끝났다, 이겼다’는 생각과 함께 멍한 느낌. 후련하거나 기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마음껏 표출하는 군중 속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있었다.  
 나로 하여금 광화문에 주말마다 나가게 했던 원동력은 분노와 억울함이었다. 개인적으로 지금 뇌물혐의를 받고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 ‘그 분’을 단 한순간도 지지한 적이 없다. 아니, 지지할 수 없었다. 이념과 정책은 모두 차치하고, 그  분이 선거 운동 중에 했던 연설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국회의원직을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했으면서 입법활동은 활발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이상과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다면, 그 투지가 말과 표정으로 나오기 마련인데, 그 분은 자신의 주관이 없어보였다.
 이런 판단을 내릴 당시, 나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물론 내가 Y세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기성세대보다 우리나라의 복잡한 이념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래서 순수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에게도 보이는 문제를, 정작 투표권을 쥐고 있는 어른들은 보지 못했고, ‘그 분’은 높은 지지율로 당당히 당선되었다.
 유시민 작가는 책에서 이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물론 2016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이 가치있는 것은 맞다. 시민들이 기뻐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당선되기 전부터 많은 결함을 보였던 후보자에게, 꼼꼼히 살펴보지 않고 ‘대충’ 투표권을 던진 자신의 행위를 먼저 반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비판을 들으면서 독자들은 의문을  품게 된다. ‘우리가 왜 지도자를 신경써서 뽑아야 하지?’
 작가는 독자들이 자문자답할 수 있도록 책 속에 길을 터 주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사상가들의 국가론을 제시하면서, 국가란 무엇이고 통치자란 무엇인지, 민주주의는 어떻게 작동되며 시민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에 모두 답변한 셈이다. 책 속의 모든 사상가들은 이어져 있다. ‘민주주의가 이제 회복된 거 아니냐’라며 타성에 젖기 시작한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다시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의 길을 걸어가길 바란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

  자유시장 경제는 가장 합리적인 시장 경제 체제일까? 이 책의 내용을 가장 핵심적으로 간파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자유 시장 경제는 현대 우리의 삶 속에 가장 타당한 경제이론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자유 시장 경제를 통해서 우리는 공정하게 시장 거래를 할 수 있고, 이러한 시장 거래가 활발해지면 경제는 활기를 띄게 된다하지만, 시장 경제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는 현대 사회의 우리가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하여 착각하고 있는 것을 명확히 꼬집으며, 자유 시장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는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오해와 문제점을 23가지 챕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실제 존재하는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준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지 등의 오해에 대하여 제시하고, 오해를 바로 잡는 설명이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이러한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23가지의 내용을 개인 차원, 정부차원, 국가 간 차원의 문제점으로 정리해 보았다.

우선 개인의 차원에서 자유 시장 경제를 살펴보자. 자유 시장 경제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하에 시장거래를 하게 된다. 또한, 인간은 이기심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적인 판단과 이기심을 통해서 시장거래는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고 결국 시장 경제도 합리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시장 경제가 합리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효율적인 것은 생존하게 되고, 비효율적인 것은 생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그들이 얼마나 효율적이기 위해서 성실하냐에 따라서 빈부의 위치를 스스로 결정한다.

하지만 자유 시장 경제의 주장은 기본 전제 부터가 잘못되었다. 인간은 이성적인 면도 있지만 감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를 처리하여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는 못한다. 결국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려고 노력하는 제한된 합리성을 가진 감정적인 동물이다.

또한, 인간은 이기심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인간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이기심만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일부 행동은 자기에게 이로운 일이기 때문에 행한다. 하지만 모든 행동을 자기에게 이롭기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행동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옳은 일과 옳지 못한 일에 대하여 교육을 받는다. 이로 인해 인간은 도덕성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이러한 도덕적 동기에 의해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의사결정을 할 때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이기심을 가지고 있지만 의사결정을 할 때 자율적 도덕성의 영향을 받는다.

자유 시장 경제의 기본 전제가 올바르지 않다면 그로인해 도출해 낸 결론도 옳지 않다. 인간은 이기심과 합리성으로 의사결정 하지 않으므로 시장 거래 또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장 거래가 합리적이기 않다면 시장 경제도 결국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는 합리적이지 않다. 시장 경제가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시장 조정이 불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적인 이유로 시장 경제에 규제를 가하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로 시간제 근로자들의 시간당 수당을 올리고, 경제적인 이유로 금리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 자유 시장 경제의 전제가 옳지 않아서 자유 시장 경제가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옳지 않을 뿐더러 전제를 제외하고도 시장은 정치와 경제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자유시장 경제는 합리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자유 시장 경제의 또 다른 결론 인간은 결국 얼마나 성실하냐에 따라 빈부가 결정된다.’ 는 옳은 결론일까? 정답은 ‘No’ 이다. 왜냐하면 시장 경제가 정치와 경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이민자 거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개발 도상국의 능력있는 버스 운전사들은 선진국의 버스 운전사들과 경쟁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자유 시장 경제의 논리에 따르면 정치적인 규제로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를 막을 수 없고, 인간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능력있고 값싼 노동을 고용한다. 하지만 나라에서 ‘규제’라는 울타리를 쳐놓았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값싼 버스 운전사를 쓸 수 없고, 그로인해 능력에 무관하게 나라의 발전 수준에 따라 선진국의 버스 운전사들은 개발 도상국의 버스 운전사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게 된다.

이번엔 정부 차원에서 바라보자.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개인의 시장 거래에 정부가 개입하게 되면 자유 시장은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시장이 합리성과 이기심에 바탕을 둔 개인 거래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합리적인 시장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고, 자유 시장 경제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한 시장 경제가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합리성은 제한되어 있다. 현실에 존재하는 정보는 무한한데에 비하여 인간이 의사결정을 내릴 때 사용할 수 있는 뇌의 용량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규칙과 규제를 통해 무한한 정보에 대한 복잡성을 줄여주는데 도움을 준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정부가 복잡성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규제 안에서 제한된 합리성을 이용하여 최상의 의사결정을 하게되고, 이것은 시장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이기심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업에게 좋은 선택이 시장에게 좋은 선택은 아니다. 심지어는 기업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신에게도 좋지 못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정부는 규제를 통해서 산업 부문 전체이익과 나라 전체 이익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는 말한다. 정부가 기업에게 복잡성을 줄여주고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규제만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가 복지제도이다. 복지제도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어 부자들이 경제활동을 할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은 주어 가난한 사람이 더더욱 게을러지도록 한다. 따라서 부자들의 돈을 뺏지 않고 능력의 보상으로 인정해줘야 부자들은 투자를 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결국 나라 경제가 살아난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지 않고 벌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가난한 사람들이 일을 시작하여 생산성이 높아지고 이것은 또한 나라 경제를 살리게 된다.

과연 맞는 주장일까? 부자들이 늘어난 부로 투자를 하여 생산성을 높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실제로 여러 데이터를 비교해 보았을 때도, 부자는 더 많이 번다고 하여 그것을 더 많이 투자하는 것은 아니였다. 따라서 정부는 부자에게 주는 추가적인 부가 사회 전체로 파급되도록 복지 정책이라는 메커니즘을 사용하게 된다. 복지제도가 잘 되어있으면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껴 변화에 더 잘 적응하게 된다. 부자는 안정감을 가지고 변화에 적응하는 투자를 할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안정감을 가지고 여러 방면에서 일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 볼 것이다. 결국 정부의 복지제도는 부자로 하여금 벌어들인 돈에 대하여 확실하게 생산성을 늘리게 하고, 경제를 역동적이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자유 시장 경제학자는 국가 간의 경제 차원에서도 자유 시장 경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시장 거래를 하고자 한다. 따라서 국가 간에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서 자유 무역을 채택하여야 한다.

하지만 경제력과 국가 생활 수준이 다른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동등한 입장에서 국가 무역에 문을 열게 되면 개발 도상국은 선진국에 의해 착취된다. 왜냐하면 개발 도상국은 자국의 튼튼한 산업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은 산업 성장 초기에 보호 무역을 통해 성장해 왔다. 영국, 프랑스 등의 선진국들은 모두 초기 자국의 산업이 튼튼하게 성장 할 때 까지는 타국과의 무역을 거부해왔고, 그들이 타국과 무역을 해도 자국의 산업이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기초를 견고히 쌓은 뒤 자유무역을 채택한 것이다. 결국 정치적 경제적 강압을 통해 개발 도상국에게 자유 무역 채택을 강요하는 선진국들은 자신의 우위를 이용하여 개발 도상국을 착취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개발 도상국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의 말처럼 정말 선진국보다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일까? 아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오히려 선진국의 사람들보다 더 성실하다. 그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선진국 만큼의 견고한 경제력과 정치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실의 문제가 아니라면 교육의 문제일까? 선진국들은 지식 산업이 튼튼하기 때문에 부자인 것일까? 교육은 경제의 생산성 향상에 중요하지 않다. 이 주장은 여러 데이터 자료에 의해 증명된다. 대학교 진학률이 높은 나라가 국가 생산성이 높은 것은 아니였다. 결국 교육은 인간이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식 산업에 대한 주장 또한 문제가 있다. 지식은 산업화 시대부터 중요했었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제조하는 물건에 대한 기술과 지식이 필요했고, 그러한 기술과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효율적인 노동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지식은 최근에서야 중요시된 산업이 아니다. 또한, 지식 산업은 제조업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딸린 청소부, 급식부 와 같은 인적 자원 산업이 존재하는 것이다. , 제조업은 발전 속도가 지식 기반 산업의 발전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값이 더 빨리 내려가게 되고, 사람들은 이것을 발전의 차이가 아닌 중요도의 차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조업을 덜 중요하고 덜 인식하게되고, 덜 부담스러운 산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제조업이 여전히 생산 가치를 창출하는 제 1순위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자유 시장 경제의 많은 문제점들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명심해야할 점은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올바른 자본주의는 장기 투자와 생산구조를 바꾸는, 기술혁신을 이끌어내는 자본주의 경제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8가지 방법을 기억해야한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나쁜 경제 시스템이다. 인간의 합리성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존재한다는 인식 위에서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지만 나쁜 면 보다 좋은 면을 발휘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항상 받아 마당한만큼의 보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건 만들기를 더 중요시 해야한다.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의 시간차이를 더 적절히 균형 이루게 해야한다. 더 크고 더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세계 경제 시스템은 개발도상국을 불공평하게우대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우리는 자유 시장 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최적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설립할 수 있다.  

이 책은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오해와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면서도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자칫 어려울 수 있는 시장 경제 체제를 쉽고 논리적인 말로 풀어서 설명하여 읽는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따라서 교양적인 지식을 쌓으려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경제의 주요 축을 맡고 있는 사람들 에게 까지도 도움을 제공 할 수 있는 책으로써 이 책을 추천한다.

편의점 인간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우리가 꿈꾸는 보통의 삶이란 무엇일까?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그러한 흔하디 흔한 삶이 보통의 삶일까? 그렇다면 그러한 삶만이 올바른 것인걸까?

 

 이 책의 주인공은 18년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만 해오며 생계를 유지하는 미혼 여성의 삶을 다루고 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해오던 이 여성은 어느순간부터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장결혼을 하여 동거를 시작하고, 그동안 잘 해오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정규직’사원이 되기 위해 취직을 준비한다. 그러나 결국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삶으로 돌아와 그동안의 만족을 다시 얻게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우리는 매번 삶의 주체가 되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체적 삶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시선을 타인의 시선에 비추어 평가한다. 또 그러한 시선은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말뿐인 주체적 삶을 살아가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은연중에 평가하고 또한 우려와 염려를 표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치고 타인의 평가에 대비하여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즉,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면서 ‘보여주기’식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삶은 자신을 위선적으로 만들며 소모적이게 만든다. 이 책의 주인공이 친구들에게 ‘보여주기’식 삶을 위하여 거짓말을 늘어놓는 모습을 통해 잘 느낄수 있다.

 

‘보통’의 삶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한 삶을 산다고 해서 그러한 삶이 올바른 삶이라 정의할 수 없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타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나’에 대하여 평가할 수 없다. 각 개인의 삶은 옳고  그름이 아닌 ‘나와 다르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알아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하여 쉽게 판단하지는 않던가?그렇기에 이 책은 현대인의 알고도 못고치는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책을 읽고 ‘학벌’에 매달린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명문대를 나와야 성공한다라는 명분에 ‘학벌’을 고집하던 나는 결국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한 수단, 가끔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그러한 순간을 위하여 ‘학벌’을 고집하던게 아니었던가.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만, 은연중에 타인의 잣대에 자신의 삶을 들이밀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으면 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나이 20살까지, 그리고 현재에도, 나에게 있어서 역사란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짧은, 20년 동안, 내 인생에 역사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왔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역사에 흥미가 없었던 난, 그동안 오직 수업시간 역사교과서로만 역사를 접했었다. 그마저도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택하지 않아 고2부터는 역사를 접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내가 20년 동안 알게 되고 배우게 된 역사가 무엇이 있을까?

초등학교 땐 뗀석기, 간석기….중학생 땐 좀 더 체계적으로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사 까지 시대별로 특징을 정리해가면서 배웠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땐,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좀 더 심화시킨 것 뿐 반복되었었다.

솔직히 말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나에게 역사란 항상 부담되고 힘든 부분으로 다가왔다. 항상 역사수업시간에는 펜을 들고 수업시간 내내 팔이 아플 정도로 빽빽하게 필기하고, 그 필기한 내용을 어떻게는 외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기억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교과서 뿐만 아니라, 역사라는 주제 자체가 나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말 열심히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하려고 애썼지만, 시험 결과는 항상 나에게 눈물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지금 역사란?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나이를 먹어서 일까? 역사란 그냥 흘러가는 여러 사실들의 나열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는 흐르는 강물이다라는 명언처럼 역사는 무언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인생의 흐름 그 자체인 것이다. 심지어 내가 오늘 6시에 전공시험을 본 것도 나의 역사가 될 수도 있고 전공 시험 후에 친구와 함께 떡볶이를 먹으러 간 것도 나의 역사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또 지금 생각해보면, 3까지 내가 역사과목에 약했던 이유는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난 역사를 단순히 암기해야할 사항들을 빼곡히 나열한 것이라는 생각뿐 이였고, 그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고 여러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마 지금 깨달은 이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역사라 아마 좋아졌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두려워했고, 부담스러워했고, 힘들어 했지만, 지금의 난 역사문화학부라는 곳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있다. 여기서의 개인의 작은 소망이 있다면, 4학년이 될 때쯤이면, 역사를 사랑하고 역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심장 뛰는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의 3학년을 마무리 짓고 있는 이 시기에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누군가 나에게 한다면, 난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난 역사에 대한 나의 생각, 주관이 자리 잡지 못했다.

대학에 입학해서, 역사과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3학년을 마무리 짓게 된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대학생이라는 기분에 취해 있던 것뿐이다. 여러 동아리와 학생회에 들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에 빨리 동화되는 법을 익히는 것에 급급했다. 그 결과, 친구들과 아는 선배들, 즉 인간관계는 넓혀졌지만, 역사에 대한 나의 관념, 생각은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역사라는 것에 대한 나의 주관도그 외의 나에 대한 모든 생각들이 실타래가 꼬인 것처럼 단단히 꼬여 풀릴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요즘 들어 나 자신에 대해 많이 혼란스러워 여러 친구들, 선배님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생각을 공유해 보았다. 단순히 넌 꿈이 뭐니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너 인생에 있어서 역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에 이르기까지 많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정말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소한 것 하나라도 각 자의 쓰임새를 지닌 것처럼, 그리고 모든 생명들이 지닌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사람들마다 각 개인이 가진 색깔과 특성이 다르다.

이 사람들 중에서는 역사과가 자신과 맞지 않아 전과를 고민 중이라는 사람도, 꿈을 정하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는 친구도, 공무원 준비를 하는 선배들도, 독일로 유학을 가는 친구도, 꿈도 없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없지만, 역사가 좋다는 것만큼은 확신을 갖고 있는 언니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역사가 좋아서 역사문화학과라는 곳으로 왔지만, 실제로 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해보니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과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고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친구도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를 본 뒤부터 내 미래에 대해, 내 꿈에 대해, 내 길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길이 보이지 않아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2학기를 지나서 주변사람들과 이러한 생각을 나눈 후에, 나의 초조함에 가면 갈수록 심해졌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꿈을 향해 첫 발을 내딛고 있지만, 난 아직도 고 3의 연속인 것처럼 어두운 암흑 속에 나 혼자 갇혀 있다는 느낌에 내 스스로가 답답하고 이런 악 순환이 지속되자 나도 모르게 점점 스스로 지쳐갔다. 아무리 고민하고 고민해서 출구가 없는 터널 속을 무한 반복해서 뱅뱅 돌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아직도 난, 계속 고민하고 있다. 스스로 난 아직 스무 살 밖에 안됐어! 라며 위로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내 자신스스로가 너무나 불안해하며 떨고 있다.

 

특히 대학에 들어와서 역사라는 전공이 나에게 과연 어떠한 길을 안내해 줄까 라는 불안감과 궁금증이 존재했다. 난 내 손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고도 싶고, 여행사에서 여행가이드로 일하고도 싶고, 박물관에서 유물, 유적에 대해 설명해 주는 사람이 되고도 싶고, 너무나도 많은 일을 하고 싶다. 아마 그래서, 내 스스로 불안해하는 것 같다. 역사라는 전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살린 일을 하고 싶다.

누군가는 내 나이에 꿈이 많은 것이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좋을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발전이 없어 보일 뿐이다.

위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선, 먼저 역사에 대한 나만의 관점과 생각이 바로서야 한 다고 생각한다. 역사란 과연 무엇일까? 언제쯤 난, 이 답을 얻을 수 있을 까? 10? 20? 아님 평생 동안 난 이 답을 갈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난 이번 과제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듣고, 읽고, 이해해 보는 것도 내가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H 카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인문학에서 굉장히 유명하며, 역사학도들의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책 중 하나라고 들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끝까지 읽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다 읽을 수 있었다.(서론)

 

 

저자 E.h 카는 여섯 개의 목차를 통해 역사가의 의무와 역할, 역사와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 사회와 개인의 관계와 역할, 역사와 과학과 도덕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역사에 있어서의 인과관계, 진보로서의 역사 등을 다루고 있다. ,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와 역사가와 역사서와 인간과 세계로 두루 관찰하는 역사철학을 담아내고 있다.

 

<1>

 

1부에서는 역사가와 사실을 다루고 있다. 역사상의 사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않고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 순수한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하여 항상 굴곡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역사책을 읽으려 할 때에 가장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은, “그 책 속에 어떤 사실들이 실려 있느냐는 문제보다도 그 책을 쓴 역사가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문제이다라고 이야기 했으며, “역사를 연구하고 싶다면 사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라고 역사와 역사가에 대한 오해에 대해 기술하였다.

시계의 제반 역사서들은 과거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역사가들이 특정 사실을 골라서 자신의 역사철학에 맞도록 구성한 것이며, 따라서 역사 또는 역사서 읽기를 전후하여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며 정의했다.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역사를 해석하는 시점의 사화분위기와 학문적 연구동향에 따라 계속해서 역사적 사건에 대해 다른 조명과 해석이 비추어진다.

또한 19세기 랑케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역사는 확인된 사실들을 모아둔 것이라며 워털루 전투를 프랑스, 영국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역사는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굴절된다는 것인데, 과연 어떤 역사가의 주장이 가장 역사의 기록에 근접한 것일까?

그에 대한 답으로 사실과 주관의 공존. 역사는 역사가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건을 뽑아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는 E. H카의 말을 들 수 있다.

E. H카는 친일파의 서구숭배주의자들이 구성한 한국의 과거 역사와 현대시기가 불신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명쾌하게 지적한다.

역사가는 임시로 선택된 사실과, 그러한 사실선택을 이끌어준 임시적인 해석, 그것이 타인의 것이건 자신의 것이건 모두를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일이 진해됨에 따라서 해석이나 사실의 선택 및 정리는 다 같이 쌍방향의 상호작용을 통하며 미묘한 반무의식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또한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가 아울러 내포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결국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결과이며, 현재와 과거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첫 번째 장에서는 권기중 선생님 수업시간에서 중간고사 보기 전에 배웠던 내용과 많이 일치해 읽기가 다른 장보다는 수월했다. 하지만 여러 번 읽어도, 정확히 어떤 말을 의미하는 건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2>

 

2부에는 사회와 개인을 다루고 있다. 사회와 개인의 상호관계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사회와 개인의 역할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사회와 개인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고 대립관계가 아닌 상호간 필요한 관계라는 것이다.

J.S 밀의 견해를 들어보면 인간은 함께 모아놨을 때 다른 종류의 실체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종류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던가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 했다. 역사이전의 모든 관계에서 인간은 사회 속에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회 속에서 개별화의 과정과 사회의 힘 및 결합력의 증대와의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일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는 것이며, 서로가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복잡하고 발달한 사회라고 할 때에 그것은 각 개인의 상호의존관계가 진보되고 복잡한 형태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근대국가 사회가 개인구성원들의 성격과 사상을 형성하는 힘에 있어서나, 그들 간에 단합성이나 획일성을 이룩해 놓는 힘에 있어서 미개부족 사회보다도 무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들은 자유와 평등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개인적인 자유와 사회적인 정의 사이의 긴장이라든가 하는 문제를 추상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는 도안에 자칫하면 그러한 싸움이 추상적인 관염의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기 쉽다. 그것은 개인 그 자체와 사회 그 자체와의 투쟁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는 개인집단 상호간의 투쟁인 것이며, 각 집단은 자기편에 유리한 사회정책을 추진하고 자기에게 불리한 사회정책을 저지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위인을 역사적 과정의 산물 내지는 그 사역인 이면서도, 동시에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사회 세력을 대표하고, 창조하는 뛰어난 개인을 가리켰다.

사회와 개인 간 의 가상적 대립이란 우리들의 사고를 혼란시키는 함정에 불과하고 추상적인 고립된 개인 간 대화가 아니라 금일의 사회와 지난날의 사회의 대화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 사회를 이해시키고 현재 사회에 대한 그이 지배를 증진시킨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인 것이다.

역사가로서 역사가를 연구하려면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연산군 이라는 인물을 연구할 때, 그의 탐욕과 폭군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의 권력다툼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연산군의 나쁨에 대한 복잡하고 높은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개인의 행동이 아닌 무의식적인 외부의 어떠한 힘으로만 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겨버린다.

 

<3>

 

3부는 역사와 과학과 도덕이라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세상에는 명칭 이외에는 보편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같은 명칭을 가진 사물도 그 하나하나는 모두 개별적이고 단일한 것이다라는 홈스의 명언을 소개하면서 비판한다. 그런 관점은 자연과학에 있어서도 진실임에 틀림없으며 같은 지질학에도 똑같은 두 개의 지층이 없고 동물도 사람도 똑같은 개별은 없는 것처럼 역사에서도 동일한 두 개의 역사적 사건은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제 2차 세계대전은 크게 다른 것이고 특수한 것이지만, 역사가들은 양자를 모두 전쟁이라고 부른다.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과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다. 역사가가 사실과 해석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이 양자도 떼놓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양자 중의 하나만을 우위에 올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E. H카는 역사가가 보편성과 일반성을 다루는 문제의 진정한 핵심은 이를 통해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데 있다고 한다. 즉 어떤 한 사건에서 얻어낸 교훈을 딴 대목의 사건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일반화를 할 때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이러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예언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단서는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사이의 차이점을 놓여 있는 것이라며 역사가에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개별적인 예언은 아닐지라도 미래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능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역사와 과학을 함께 바라보면 역사가는 과학자가 사용하는 같은 방법으로 역사연구를 하고 있다. 이는 기본법칙을 추구하는 것을 단념하고 사물의 동태를 조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가들이 연구과정에서 사용하는 가술의 지위와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지위와의 사이에 유사성이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설정하고 귀납적인 방법으로 법칙을 찾고 다른 반대 세력들과 가설에 대해 싸우면서 진리에 다가간다. 사실 역사도 똑같다. 역사에는 과학과는 다르게 절대불변의 진리란 게 존재하지 않을 뿐 역사적 사실의 원인과 다양한 가설들로 역사의 기록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를 전제로 역사와 과학에 대한 현재 시점을 적용해보면, 정치나 경제, 사회문화 현상에 대해 경제학자나 역사학자들, 또는 정치가나 정치 평론 자들이 소위 객관적이라는 전제로 분석, 진단, 예측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객관적일 수 없으며, 그렇다고 주관적이지도 않은, 즉 상호작용에 의하여 미래의 예측이나 예상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반응, 대응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역사와 도덕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가가 자기가 취급하는 역사 인물들의 사생활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오늘날 새삼스럽게 내세울 필요조차 없다면서 역사가와 도덕가의 입장은 다른 것 이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해 역사가는 도덕적 판단에 의해서 역사를 서술해선 안 된다.

결국 역사가는 과거의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하는, 보다 이득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헨리 8세가 나쁜 남편 이였을지 몰라도 그는 좋은 국왕임을 확실하다.

 

<4>

 

4부에서는 역사에서의 인관관계를 다루고 있다. 역사가에게는 일반화란 불가피한 것이고 또한 일반화를 통해서 비록 개별적인 예언을 아닐지라도 미래행동을 위한 타당하고도 유용한 일반적인 지침을 마련할 수 있다.

E. H 카의 말대로, 개인뿐만 아니라 역사가들 역시 미래에 일어날 역사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 예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현재의 조건을 따져봄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 대한 개연성 또는 합리적 추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 또는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역사가 중요한 것이다.

역사가란 끊임없이 ?”라고 질문하는 것, 그리고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역사가란 한 사건에 대해 한 가지 원인만 중요시 하는 일은 없어야한다. 역사가가 원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첫 번째 특색은 한 사건에 관해 여러 가지 원인을 분석 하는 것이라 한다.

책에서는 1917러시아 혁명에 대한 답으로 비유했는데, 요즘 사건에 접목해본다면 세월호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비유해 볼 수 있겠다. 사건의 원인을 화물의 과적, 무분별한 증축, 늦은 구조와 위기관리능력 다양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접근법 두 번째 특색이 필요하다. 저 정도 이유를 찿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의 상호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결론을, 마지막 분석을 궁극적 원인 또는 모든 원인 중의 원인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의 주제에 대한 해석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렇게 원인을 제시하는데 역사가들은 항상 어떤 원인을 위에 놓아야 하는가에 하는 문제에 귀착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세월호 원인에 대해 항상 어떤 원인이 우선인가 섣불리 정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측면이라고 본다.

역사에 대해 한편으로는 우연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우연의 집합체 이며 우연에 일치에 의해 결정된 전적으로 우발적인 원인이 결과라고 생각되는 사건들의 연속이라 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E. H카는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역사가와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이중의 상호적 성격을 갖는다. ‘원인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고, 동시에 역사가의 해석은 원인의 선택과 정리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여러 원인들의 상하 관계, 하나 또는 한 묶음의 원인, 또는 다른 원인의 상대적 중요성이야말로 본질 인 것이다. 해석을 해보자면 원인은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고 역사가의 해석은 원인을 선택하는 것이다.

 

<5>

 

5부에서는 진보로서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역사에서 역전이나 이탈, 중단이 없이 일직선으로만 전진해 나온 진보는 없다고 설명하며, 역사의 의미와 내용, 방향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피력한다.

유전에 의한 진화는 몇 년 전, 몇 백만 년을 단위로 해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써, 유사 이래로 인간에게는 아직도 이렇다 할 생물학적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획득에 의한 진보는 세대를 단위로 하여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과거의 여러 세대의 경험을 측정함으로 자기의 가능성을 발전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다. 획득된 기량이 세대에서 세대에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를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진보의 내용은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어떠한 자동적인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서술을 진보하는 과학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이 발전해 나가는 제 사건의 진전에 대해서 부단히 넓혀지고 깊어지는 통찰을 마련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사에 있어서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와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이라 하고, 이러한 상호과정을 가장 깊이 통찰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객관적인 역사가라고 설명한다.

가장 인상적인 글귀는 역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라는 것은,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을 찾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라는 마지막 문장이였다. 우리들이 온 방향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이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믿음과 굳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미래의 진보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사회는 과거에 자기들이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급속히 무관심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역사라는 것이 축적되어 지금 현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문화이든 과학이든 과거에 획득된 기술이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 진보하는 것이다. 진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진보라는 것은 계속되는 여러 시대의 요구사항과 조건에 의해서 각 시대만의 특정한 내용이 채워지는 과정 이라고 한다. 또 객관성에 대해서 E. H카가 짚고 갔다. 역사 사실은 완전히 객관적일 수 없다. 역사가가 주는 의의에 따라 역사상의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리의 가치와 관점은 항상 시대와 더불어 이동해 나가며, 그래서 우리들의 눈은 상대적이고 한계가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여지위에서 역사사고의 객관성과 유효성은 무엇이고, 이러한 문제를 추구하고 찾아감에 있어 저자의 진가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본론)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E. H 카의 명언 중에 하나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해 에드워드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61년에 쓰인 책이 2014년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 되서 읽히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도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에드워드 카와 어떤 대화를 했을까? 이것이 사실 역사를 무엇인가를 읽고 난 뒤 마지막 남은 과제라고 생각한다,

앞서 책을 읽기 전에 했던 내 인생의 역사란 무엇일까?’를 해결하기엔 아직 먼 것 같다. 오랜 시간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는데 너무 큰 그림을 보지 않고 보이는 것부터 생각해야 될 것 같다. 아직 내가 머릿속으로 가지고 있는 여러 의문들, 그리고 나의 인생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은 해결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직 혼란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도 많고 내가 챙겨야할 사람들도 많고, 스스로에게 묻지 못한 답들과 질문도 많다. 그것들에 대한 답들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해보았다. 계속된 고민 끝에 내가 생각해 낸 답은 하나 뿐 이다.

내 인생의 목표 하나를 정해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아가다보면, 내가 품고 있던 여러 의문들에 대한 실마리를 알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 가닥 한 가닥 엉킨 부분을 풀다보면, 어느새 누군가가 강요하거나 만들어낸 결론이 아닌 나만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던 의문보다 더 많은 의문들을 품게 된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책을 읽기 전 에 구하려던 답보다 새롭게 얻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가진 고민은 지금까지 이 책을 읽는 시간동안 나는 어떤 대화를 했는가? 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난 E. H카 와 많은 교감과 교류를 했다. 그가 가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신적인 세계와 내가 가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세계가 서로 뒤 엉킨 것이다. 서로의 가치관과 정신세계가 만나 그가 가진 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나는 그 답에 대해 독후감 마지막인 만큼 명쾌하게 답을 쓰고 싶고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단 몇 줄로 내가 이해한 그의 세계를 서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와 난 이 책을 통해 많은 대화를 했다는 점이다. 보통 내가 책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대화해보려고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그 결과를 통해 책을 통해 서로 대화를 한 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것이 어떤 느낌이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이는 매우 큰 경험이었고, 엄청난 변화 중에 하나이다. 앞으로도 난 어떤 책을 읽든지 서로 대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이러한 점들은 아마 지금 이 책을 읽고 과제하는 많은 친구들도 마찬가지일 것 이라고 예상한다. 중요한 교훈을 얻었지만, 여러 의문을 남긴채로 역사란 무엇인가읽기를 끝내려고 한다.

 

 

 

 

 

햄릿 (세계문학전집 3)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은 과거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가 웃으며 얘기했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이다. 드라마 ‘도깨비’ 속 공유가 살아야할지, 무로 돌아가는 일종의 ‘죽음’을 선택할지 고민했던 것처럼, 햄릿 또한 같은 고민을 한다. 그리고 삶의 이유를 찾아 방황하던 햄릿에게 삶의 이유가 된 것은 결론적으로 복수였으며, 이는 햄릿이 작품 내에서 하는 모든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햄릿은 부왕의 유령을 만나 부왕이 삼촌인 클로디어스에게 어떻게 살해됐는지를 전해 듣고, 이에 대한 복수와 모든 것을 기억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에 대해 햄릿은 유령의 말이 사실인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면서 클로디어스에 대한 의심을 지속한다. 그리고 햄릿은 유령의 말을 바탕으로 자신이 기획한 연극을 통해 클로디어스의 반응을 살피고, 그제서야 유령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복수를 꿈꾼다. 이후 햄릿은 기도하고 있는 클로디어스를 발견하고 복수를 위한 절호의 기회임을 인지하지만, “아서라 칼아, 더 끔찍한 상황을 만나자. 구원받을 기미가 전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다리를 걸자라며 복수를 미뤄버린다.

이러한 햄릿의 태도는 햄릿이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졌음을 증명해주는 지표로 쓰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꿈꾸는 복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작품 속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햄릿이 꿈꾸는 복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햄릿의 사회적 위치를 고려했을 때 설명이 가능하다.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로서, 부왕의 뒤를 이어 덴마크를 올바른 방향으로 통치해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그에게 복수란 새로운 왕이 된 클로디어스를 죽이는 반란의 형태로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차기 덴마크의 지도자로서 자신이 꿈꾸는 덴마크를 어떻게 수립해 나갈 것인지를 고민했고, 이를 복수로 정한다. 그는 부왕이 이루고자 했던 뜻을 계승하면서도, 비윤리적인 통치자와 그로인해 어지럽혀진 사회 정의를 다시 세우려 했던 것이다. , 햄릿이 꿈꾸는 복수란 단순히 살인자를 죽이는, 자신이 당한만큼 갚아주는 복수가 아니라 덴마크 사회의 질서를 정립하고 새로운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수를 미루는 햄릿의 태도는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 아니라 복수를 단순히 살인이 아니라 정의로 만드는 법을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이러한 햄릿의 복수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클로디어스의 음모에 따라 레어티스와 칼싸움을 제안 받았을 때, 수상쩍다는 것을 알면서도 칼싸움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령의 요청대로 클로디어스를 죽이는 것에 성공하지만, 그 또한 레어티스가 칼 끝에 바른 독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그는 호레이쇼에게 자신이 죽은 후, 이 모든 사건들이 후세에 전달해달라는 유언을 남긴 체 죽으며, 덴마크의 새로운 통치자는 포틴브라스가 된다. 정치적·도덕적으로 완벽한 왕이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이상으로 꿈꿨던 햄릿에게 포틴브라스가 왕이 됐다는 사실은 그의 복수가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과거 햄릿이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복수를 핑계로, 무고한 백성들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포틴브라스를 비판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애초에 유령에게 부탁받았던 복수 두 가지는 모두 성공한다.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인 클로디어스를 죽이는데 성공했으며, 호레이쇼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 후세에게 그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모든 것을 기억해달라는 요청 또한 이루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햄릿의 복수는 성공이라고 부를 수도, 실패로 인정할 수도 있는 상태의 것이며, 성공과 실패의 모호한 경계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중간한 복수를 다룬 작품이 왜 현대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일까?그 답은 아마 우유부단해 보이는 햄릿의 태도가 오히려 그의 고결한 성품을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삼촌의 즉위, 그리고 어머니와 삼촌의 조속한 재혼은 분명히 의심스럽고 비윤리적인 일련의 사건이지만, 햄릿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고뇌에 빠진 햄릿에게 이 고민들을 ‘망각’할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칫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는 태도로 이 사건들에 대해 자신의 고뇌를 멈추지 않는다. 또한 위의 일련의 사건들에 의문을 품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몸을 부딪혀가며 ‘모든 것을 기억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다. 따라서 햄릿의 작품성은 그의 복수가 성공했느냐로 단순히 결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을 둘러싼 정치 권력 및 사회와 싸우는 햄릿의 고결한 성품이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대변한다.

 

자본주의 (EBS 다큐프라임쉬지 않고 일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기 힘든가)

사회 과목을 좋아했지만 경제는 숫자와 연계된 강한 느낌 때문에 경영학과지만 경제학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있었다. 나에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일하는 만큼 돈을 버는 체제. 공산주의의 반대 원리 정도라고 여겼다. 하지만, 투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경제를 공부하기 위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으며 자본주의가 굉장히 철학적으로 다가오는 계기가 되었고, 경제체제에 대해 쉽게 알 수 있었다. 방송된 다큐를 엮어 종이책으로 내어, 경제 기본 원리나 금융상품 등을 학자들의 인터뷰와 인포그래픽 삽화 등으로 쉽게 설명해준다. 처음에는 생소해 읽는 속도가 나지 않을 수 있지만, 경제 원리나 금융상품을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어, 과목을 배우고 있는 친구들이나, 재테크를 준비하는 기성세대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
은행은 우리를 각박한 세상으로 내보내 다른 모든 사람과 싸우라 한다. 은행은 결코 자선단체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빚을 만들고 그 빚을 통해 돈을 버는 은행, 우리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며 스스로 공부해 금융 지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과거처럼 은행을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 된다. 우리는 스스로 공부해 자신을 지켜야 한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소비’라는 행동원리를 기반으로 돌아간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며 ‘소비는 미덕’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근데 이러한 것도 마케팅으로 주입된 생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케팅의 공격에 우리는 너무 쉽게 무너졌다. 마케터들은 상품의 이미지와 환상을 주입하고, 소비를 합리화 시킨다. 소비와 합리화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과소비까지 이어지면 안 된다. 필자가 말하는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자본주의, 복지자본주의 속 진정한 내면과 행복을 얻기 위한 현명한 소비를 했으면 좋겠다.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 (정석 교수의 도시설계 이야기)

[상상독서 베스트리뷰 선정 도서 | 대출하러가기]

[2017 베스트리뷰 공모전 수상작]

  내가 도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된 때는 작년부터이다. 학교 근처 자취방을 알아보던 중, 성북구 장수마을에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이 참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쭉 자란 나에게 서울은 번쩍번쩍하고 웅장한 건물이 가득한 우리나라의 수도였다. 간혹 주말에 부모님 혹은 친구들과 서울의 관광지를 구경하곤 했는데 특유의 시끌벅적함과 복작함은 나를 적잖이 당황스럽게 하면서도 매혹하였다.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을 꿈꾸며 치열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마침내 나는 상경하였다. 내가 살게 된 장수마을이라는 곳은 내가 생각했던 서울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올망졸망한 주택들이 제각기 모여 조화를 이루어 성곽을 따라 자연과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기대했던 모습과 달라 매우 실망했다. 하지만 장수마을의 다세대 주택에 살면서 새롭게 느끼는 것들이 많아졌다. 태어나 줄곧 아파트에서 살아왔는데 그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이웃의 정이라던가 성곽의 아름다움, 골목길의 재미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도시의 참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지금까지 나는 도시에 관심을 끊이지 않고 갖고 있다.

   이번 학기 중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과목은 도시계획론이다. 이 과목의 과제로 인하여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 나는 의문이 조금 들었다. 도대체 튀는 도시는 뭐고 참한 도시는 무엇인가 말이다. 튀는 도시는 특색이 있는 도시라고 지레 짐작이라도 했지만 도무치 참한 도시는 추측이 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참한 도시를 튀는 도시의 반대라고 생각하여 특색이 없는 도시라고 가정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특색이 있는 도시가 특색 없는 도시보다 훨씬 좋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나라의 도시가 저마다의 랜드 마크를 만들려고 매우 노력하는 추세인데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이렇게 읽기 전에는 정말 수많은 의심을 품으며 책장을 열었다.

   저자인 정석 교수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근무를 하면서 서울의 많은 도시들을 계획하는 사업에 참여하신 분이다. 그 경험을 토대로 사례를 들어 필자의 의도를 풀어나가는 형태이다.  예부터 우리나라의 조상들은 타국과 달리 자연을 굉장히 중시해 도시를 계획할 때 자연을 해치지 않고 그에 맞춰 어울리는 모습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근데 지금의 도시는 어떠한가. 서울만 보자면, 극히 소수의 지역 빼고는 정말 많은 지역들이 변화무쌍하다. 필자는 이러한 도시의 변화를 대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했는데 이에 발맞춰 정부는 우리의 오랜 문화를 담고 있던 많은 주거지들을 겉보기에 달콤한 정책들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을 더욱 편리한 환경에서 살게 해준다는 감언이설로 정부는 집값을 올려 가난한 사람을 근교로 내쫓고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여 계층 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필자가 내세우는 가장 핵심인 문제는 도시를 변화시키면서 수많은 자연경관을 해쳤다는 것이다. 서울에는 한강이라는 매우 큰 강과 수많은 산들로 둘러 쌓여있다. 많은 시공업체들은 이러한 자연경관을 막는 높고 뚱뚱한 건물인 아파트를 건설하여 시민들에게 전망 좋은 집을 광고하며 분양하였다. 물론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멀리 있는 서울의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겠다만, 아파트 밖의 시민들이 자연 경관을 보려고 할 때는 이 건물들이 막고 있어 볼 수 없겠다는 것이 함정이다. 참 이기적인 생각으로 서울의 많은 아름다운 모습들을 해쳤다. 해외에 있는 고풍의 건물들은 극찬하면서 어찌 우리나라의 것들은 다 무너뜨리고 편리함을 쫓아 많은 것들을 버렸는지 매우 안타까운 바이다.

   지나간 날들을 후회해봤자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반성하고 지난날들의 문제점을 발판삼아 개선해나가면 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하고 있는데 내가 이 책의 사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은 ‘2009년 동소문동 재개발 반대 운동 승소 사건이다. 이 운동을 앞장서 승리로 이끈 주인공은 놀랍게도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피터 바살러뮤씨이다. 사람들은 그를 한국인보다 한옥을 더 사랑하는 외국인이란 표현만큼 소개하곤 하는데 이는 마땅한 근거가 있는 표현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로 한국에 와 한옥에 매료되어 약 40여 년을 한옥에 살고 있다. 피터가 살고 있는 동소문동 한옥 주거지 일대는 2004년 재개발예정구역으로 지정되어 계속 그 곳에서 살기를 원하는 피터와 이웃 주민들이 재개발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후에 2008,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내었고 2009년 마침내 승소하게 된 사건이다. 피터 씨는 이 사건 이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20년 이상 된 집은 무조건 노후건축물로 간주하고 재개발 대상으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집이 무슨 냉장고입니까?”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머리가 띵했다. 나 역시도 장수마을에 사는 입장으로서 수없이 재개발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해본 적이 있다. 물론 서울시는 현재 장수마을을 재개발구역에서 해제한 상태이긴 하지만, 이 마을에 사는 입장으로서 조금 불편할 때가 있긴 하다. 집까지 올라가는 언덕이 너무 높고 골목길이 좁아 잘 살다가도 편리함을 위해 이 지역이 재개발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도시는 우리가 함부로 바꿀 수 있는 전자제품 따위가 아니다. 나는 정말 어리석은 생각을 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조상들이 지혜롭게 잘 계획하여 만들어주신 이 도시를 앞으로도 자연과 어떻게 잘 더불어 공존해 나갈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도시에 관련하여 정말 많은 책임의식을 느끼기도 했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에 관하여 많이 생각해보았다. 앞서 책의 제목에 반신반의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으리으리한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한 도시를 계획하고자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깊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