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술사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소설)
「오직 두 사람」은 총 7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김영하의 소설집이다. 책 속의 단편들은 모두 고유한 상실과 비극을 담고 있다.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한 사람, 아버지를 잃은 상실을 보여주거나(오직 두 사람), 오랜 세월 끝에 유괴된 아들을 찾았으나 결국은 자식을 잃게 된 아버지의 이야기(아이를 찾습니다), 마음의 고향이자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이야기(인생의 원점),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린 남자의 비극(옥수수와 나), 아버지의 유품을 얻은 대신 아버지의 유골은 가져오지 못한 아들의 상실(슈트), 삶을 잃은 박인수와 최은지에게 가정을 빼앗긴 한 남자(최은지와 박인수), 취업을 빌미로 인생을 빼앗긴 4명의 청년들 이야기(신의 장난) 이렇게 각각의 단편은 그들만의 독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1973년 노벨상을 탄 오스트리아 학자 로렌츠(Konrad Lorenz)는 인공부화로 갓 태어난 새끼오리들이 태어나는 순간에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 즉 사람인 자신을 마치 어미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런 생후 초기에 나타나는 본능적인 행동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불렀다.” (출처 : pmg 지식엔진연구소)
나는 김영하의 단편 소설 중 「아이를 찾습니다」에 가장 큰 비극을 느꼈다. 유괴된 아이가 유괴범을 엄마로 각인 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고 그 존재조차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 유괴범은 단순히 아이를 한 가정에서 납치한 것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가족이라는 개념과 기억을 앗아갔다. 아이의 친부모 역시 10년이란 세월을 바쳐 끝내 찾은 아들이 더이상 자신을 부모로 생각하지 않고 외려 경멸한다. 아이와 부모 모두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아이는 3살에 납치되어 유년기를 유괴범과 보내게 되었다. 그 유괴범은 여느 범죄 드라마나 공포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흉악한 범죄자가 아닌 평범함 50대 여성일 뿐이었고, 유괴한 아이를 제 자식처럼 키운다. 덕분에 유괴된 아이는 유괴범이 엄마인 줄 알고 성장한다. 아이는 나름 풍족한 유괴범의 울타리 안에서 경제적인 부족함 없이 자란다. 그러나 실제 부모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 부부는 납치된 아이를 찾고자 생계도 포기하고 갖은 돈을 아이 찾는 곳에 모두 쏟아 부었다. 결국 부부는 아이를 되찾게 되어도 키울 수 있는 형편이 아니게 된다. 설상가상 아내는 젊은 시절부터 조짐을 보이던 조현병이 손을 쓸 수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남편 역시 끝이 없는 고통에 날로 지쳐간다.
유괴범 역시 멀쩡한 정신으로 살아가지는 않았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유괴범은 이내 자살을 하고 만다. 엄마로 굳게 믿고 살던 아이는 큰 충격에 빠져 경찰에 신고하러 왔다가 자신의 친부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더 큰 충격에 빠진다. 아이를 찾게 되어 기뻐하는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군다나 어렵게 찾아온 친부모의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반발심까지 갖는다. 아이의 친부모는 몰라보게 변한 아들의 모습에 알 수 없는 허망함을 느낀다.
이후에도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끊임없는 고난과 역경이 주어진다. 나는 아이를 찾습니다 속의 고통받는 아버지를 보며 오히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절대적인 것인지를 느꼈다. 물론 그 사랑이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소설 속 아버지가 계속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는 아들을 바꿀 수 없음에 절망하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아들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다시 한번 배우게 된다.
쥐 (합본)
아트 슈피겔만이라는 한 젊은 만화가가 14년 간 공을 들여 그린 만화가 나오자 만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만화인데도 어떤 다큐멘터리나 실화보다 더 사실적이었고, 어떤 소설이나 영화, 예술작품보다 더 섬세하면서도 묵직한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두 개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은 소설적 구성으로 꾸며졌다. 하나는 죽음의 올가미를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피맺힌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인 아들과 극한 상황을 경험한 아버지가 빚어내는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충돌에 관한 일상이다. 작가는 두 개의 플롯을 긴밀하게 뒤섞음으로써 홀로코스트의 참혹했던 기억을 구체적으로 현재화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경제적 성공을 바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림을 택한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를 못 견뎌한다. 그런 아들이 어머니의 갑작스런 자살 후 죄의식 속에서 방황하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아버지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만화로 표현하고자 했다. 만화가들은 슈피겔만이 개척한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영역에 ‘그래픽 노블’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992년에 쥐가 코믹북 사상 유례가 없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자, 이 새로운 흐름은 만화 문화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분명한 조류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쥐가 발간 20주년을 맞아 그 예술성에 걸맞는 고급스런 외관을 하고 합본판이 발간되었을 때, 이를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에세이)
언어의 온도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 (한국어판 독점계약)
악의
‘살인의 동기란 무엇일까?’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의 표지 하단에 적힌 물음이다. 그리고 이 물음의 답은 책의 제목인 ‘악의’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 그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어둠의 이면 말이다. 악의가 있기 때문에 살인을 행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된 악의가 무엇이길래,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감정 또는 심리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무서운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겼고, 그렇게 섬뜩하고도 소름 끼치는 악의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와닿게 표현한 표지에 이끌려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아동문학 작가인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로 시작된다. 그는 그의 친구인 베스트셀러 작가 히다카 구니히코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 사건을 제3자의 시점에서 수기로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수사를 진행하는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그를 향한 의혹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노노구치가 범인임이 밝혀진다. 범인과 범행 동기의 마지막 퍼즐까지 맞춰지는 듯했으나, 가가 형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노노구치의 진정한 범행 동기를 추리하기 시작한다. 노노구치는 어쩔 수 없는 히다카의 고스트 라이트였으며 히다카의 아내와 얽힌 이야기 등 그의 범행 동기는 명백하게 가가 형사의 추리와 일치했지만, 알고 보니 그 범행 동기 또한 치밀한 조작이었다. 노노구치의 궁극적인 동기는 히다카에 대한 ‘악의’였던 것이다.
보통의 추리소설은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범인이 아닌 범행 ‘동기’를 추리해야 한다. 이야기 초반에 범인이 밝혀졌고 그가 사용한 트릭도 드러났지만, 범인이 ‘왜’ 살인을 했는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동기를 찾기까지의 과정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었고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선한 인물이 돌고 돌아 결국엔 악한 인물이었다는 인물들의 선악구도가 반전을 맞이했다는 점과, 모든 사건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핵심인 동기가 대단한 추리력을 가진 형사는 물론 범인 자기 자신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심리적인 부분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말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트릭은 노노구치의 수기 초반에 등장한 고양이 사건이다. 히다카가 농약으로 고양이를 죽게 만들었다는 다소 사건과는 동떨어진듯한 이야기는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에도 히다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가가 형사 또한 그러했다는 장면이 나온다. 무의식중에 히다카의 잔혹함이 선입견으로 남은 것이다. 이렇듯 본인도 모르게 내재된 선입견과 더불어 우리의 삶에서 무심코 접했을 편견과 오류가 정말 무섭다고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히다카에 대한 편견은 실제로 언론에 휘둘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 한 개인이나 집단을 둘러싼 온갖 날조와 선동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눈에 선명한 이익을 위한 목적 때문이겠지만, 어떤 경우는 ‘악의’를 갖고 악의를 가진 대상을 향해 어떤 일도 감수한다. 그 일이 살인일지라도 말이다. 노노구치의 궁극적인 살인 동기는 히다카를 향한 ‘악의’였고, 특정한 사건 때문이 아닌 아무 이유도 없는 그 악의는 노노구치 본인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며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악의라는 감정은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에 그래서 더 숨길 수도 있었겠지만, 살인으로 이어질 만큼 숨길 수 없었던 미묘하고 무서운 감정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실제 우리의 인간관계에서도, 개인의 내면에도 누군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또는 오해, 열등감으로 인한 부정적인 감정이 존재한다. 나도 모르게 어떤 사람을 정의 내리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그러한 깊고 어두운 이면의 세계, 자기 자신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라는 심오한 생각이 든다.
달려라, 달리!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심쿵 라이프)
“달리는 병원에 버려진 아이였다. 전해 듣기론 신혼부부가 키우던 아이였는데 사고로 발 하나를 절단해야 한다고 하자 입양 포기 의사를 밝히고 두고 갔다고 한다. 당시 달리 나이가 두 살이었으니 1년은 함께 보냈을 텐데, 하루아침에 달리는 발도 잃고 가족도 잃었다. 몸이 아팠을지 마음이 더 아팠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당시 달리 심정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달리는 훨씬 더 오래 많이 아팠을 것이다.” 이는 책의 끝부분에서 달숙언니가 달리의 옛 사연을 들려주며 한 말이었다. 내 마음도 덩달아 먹먹해져 갔다.
정신적·신체적 아픔이 있었던 달리의 이야기를 지인 Y에게 들었을 때는 달숙언니도 입양이 꺼려졌다고 한다. 아마 그 전에 함께하던 반려견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도 있겠지만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이 거의 사람 아이 하나 키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아픔이 있는 달리와의 시작은 더욱 신중했을 것이다. 나도 애견인으로서 나의 인생 일부를 함께한 강아지를 떠나보내고 나면 두 번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 다짐한다. 단지 강아지가 아닌 가족을 떠나보냈을 때의 아픔이 너무도 커서 두 번 다시 그러한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진다. 그러나 나도 그랬고 달숙 언니도 그랬듯이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이 필요한 강아지를 외면할 수 없다. 그렇게 달숙 언니는 사고로 앞발을 하나 잃은 강아지 ‘달리’를 가족으로 들이게 된다.
달숙 언니는 먼저 보낸 강아지 ‘달구’에게 못 해줘서 후회됐던 부분들은 잊지 않고 ‘달리’에게 더 잘해주기로 다짐한다. 「달려라 달리」에는 달숙언니와 달리의 행복한 시간들이 기록되어있다. 수 많은 사진들과 듣기만 해도 미소지어지는 행복한 달리의 하루하루들이 달숙언니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받은 달리는 더없이 예쁘고 해맑게 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한없이 즐거운 달리네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가슴이 미어져 갔다. 아마 우리 집에도 혼자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는 흰 강아지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강아지를 키우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랑해주려면 함께 있어 줄 시간도 필요했고, 맛있는 간식과 아프지 않게 돌봐줄 돈도 필요했다. 그래서 늘 우리 강아지에게 “미안, 나중에 누나가 여윳돈 생기면 맛있는 간식 매일 사줄게!”, “미안, 오늘은 시간이 마땅치 않아서 산책 못 갈 것 같아.”라며 핑계 대고 미뤘던 지난날들을 지금에서야 후회하고 있다.
이런 나를 꾸짖듯 달숙언니는 주인의 손길에 따라 한 생명체의 존엄이 결정되고, 그 영혼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고 있다고 말한다. 내 손길은 지금 우리 강아지의 존엄함을 지켜주고 있는지, 또 그 짧은 견생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달려라 달리」는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책인 것 같다. 그저 ‘귀여운 달리 사진이나 좀 구경해볼까?’하고 책을 펼친 것이 후회될 정도로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던 것이었다. 단순히 애완견에 대한 사랑을 담은 책이 아닌, 현재 유기견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들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를 보여주며 ‘개’라는 동물과 함께할 인간들에게 앞으로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그들을 바라봐야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나는 애견인으로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특히 개는 그저 짐승일 뿐 인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도시와 건축을 성찰하다)
우연찮게 눈에 들어온 책으로 전공서적을 둘러보던 중 발견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이 책 제목이 강하게 나를 이끌었다. 도시가 움직인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건축을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한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저자는 건축을 보이지 않는다고 표현했을까?
목차들 제목만 봤을 때는 다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각 세부적인 내용들은 통합적으로 한 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바로 ‘본질’ 이다. 건축이 갖고 있어야하는 의미와 본래의 정의, 그리고 도시가 갖고 있어야하는 고유성과 전통성, 나아가 그들의 상호관계까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지하고 있었지만 놓치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가 그 안의 본질보다는 외관을 봐왔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계속 봐왔다는 것을. 비로소 이 책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건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건축은 움직이는 도시 안에 들어있다. 도시 속의 각 건축들은 예술적, 기능적인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 거기서 살아가는 거주자와 그 공간의 본질에 맞추는 것이 먼저이며, 이 보이지 않는 건축을 감싸는 도시들은 마스터 플랜에 맞게 구성된 것이 아닌 그 주변 환경과, 지형, 현재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한마디로 개발과, 기능, 물질이 아닌 관계와 공존, 재생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건축과 도시는 서로 눈에 보이지 않게 아름다움을 지니며,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는 우리의 고유함이 살아가는 공간들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그 안에서 거주하고, 생활하는 건축에 대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